소설리스트

<33화> 살려는 드릴게 (2) (277/481)

<33화> 살려는 드릴게 (2)2021.01.19.

무림인들이야 어디에나 있는 이들인 데다, 이곳 귀주성은 방랑 무인들이 꽤나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니 객잔 안에 무림인이 앉아있는 것은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것은 순전히 설영의 감이었다. 혈마의 후예로 낙인찍힌 뒤, 추격전을 거듭하며 갈고 닦은 그녀의 직감. 때문에 전음을 사용해서라도 주의를 줄까 했지만, 어느새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천화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설령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16586674035472.jpg‘일단은 호위를 맡기로 했으니까.’

천화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일류의 무위를 지닌 설영이었지만, 이번 원류검법을 익히고 깨달음을 얻으면서 한 단계 발전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사사삭- 그렇게 살짝 긴장하며 설영이 주위를 살피는 동안, 천화는 바쁘게 젓가락을 놀려 음식들을 먼저 맛보았다. 배가 고팠는지 게 눈 감추듯 입안에 음식들을 쓸어넣고서는 볼록해진 배를 만족스레 두들겼다. 무인들은 언제든 최상의 상태로 싸움에 임할 수 있도록 적당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공복도’라는 것이 있는 천화로서는 좀 더부룩하더라도 수치를 채워두는 것이 유리한 까닭이었다.

1658667403548.jpg“점소이, 여기!”

16586674035484.jpg“예. 갑니다.”

점소이를 불러 방을 하나 잡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16586674035472.jpg“하나?”

다만 특이한 것은 평소와 달리 방을 하나만 잡았다는 것이다. 조금 큰 방이고 침상도 두 개나 놓인 곳이기는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이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은가?

1658667403548.jpg“응. 설마 이 흉악한 놈하고 나를 둘만 두려고 했어? 호위무사 씩이나 돼서?”

네가 더 흉악한 것 같은데. 설영이 천화에게 따지려 했지만, 이상하지만 틀리지도 않은 천화의 논리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대신 허튼 수작을 부렸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를 덧붙이고서.

1658667403548.jpg“자, 그럼 올라갈까?”

결국 하나의 방만을 잡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은 적당히 배를 채우고 방으로 향했다. 객실로 오르기 전 천화가 점소이에게 동전을 쥐여주며 뭔가를 부탁해 받기는 했지만, 야식이나 그런 것쯤을 챙긴 것이겠지. 끼이익.

1658667403548.jpg“읏차.”

쿠웅 그렇게 방안으로 들어선 천화는 일단 제압된 호랑의 몸뚱아리부터 한쪽에 던져두었다. 대신 점소이에게 받아두었던 주머니 하나를 꺼내들고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1658667403548.jpg“흠. 방은 쓸 만한데 좀 지저분하네.”

16586674035472.jpg“응? 괜찮은 것 같은데?”

하지만 뭔가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값을 제법 치른 까닭에 크기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컸음에도, 천화는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1658667403548.jpg“괜찮기는. 이렇게 똥파리가 잔뜩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얼핏 보기에는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더러운 살기를 흘려대는 놈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휘익- 파앙! 천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들고 있던 주머니를 허공에 대고 털었다. 그와 함께 방 안에 퍼져나가는 하얀 가루들.

16586674043643.jpg

  좀 전에 점소이에게 따로 구한 밀가루였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16586674035484.jpg“콜록!”

독 혹은 마비산. 일반적으로 사파 무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그것과도 비슷한 색과 형태였기에 급히 호흡을 멈추었지만, 천화가 이 같은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까닭에 일부 흡입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그와 함께 침상 밑에 숨어있던 자객이 몸을 튕겼다. 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 이미 정체불명의 가루를 마신 상태였기에, 단숨에 제압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당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오해가 있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조급한 것도 사실이었다.

16586674035472.jpg“어딜!”

채앵! 설영이 검을 떨쳐 천화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살수의 은신 능력은 설영의 감각을 속일 만큼 좋았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능력의 활용도는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법이었다. 그것이 살수들의 강점이자 약점이니까.

16586674035484.jpg“제길.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16586674035484.jpg[헤헤. 주인님. 저 잘했죠?]

  그렇다면 일류 고수인 설영도 감지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천화가 알아차릴 수 있던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혈마검을 통해 전해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상의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녀석이었기에 아무리 숨을 죽이고, 기를 갈무리한다 해도 속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생체기능까지 거의 죽여버리는 귀식대법으로 숨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 터였다. 귀식대법을 한번 사용하면, 다시 몸과 정신이 깨어나더라도 한동안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혈마검의 감지능력은 살수를 상대하는 데 최적화되었다 말할 수 있는 치트키가 아닐 수 없었다.

1658667403548.jpg‘그래그래. 밥값은 했네. 예상 범주이긴 했지만 말이야.’

16586674035484.jpg[아…….]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살수들의 습격은 천화의 예상 범주 안에 들어있던 일이었지만 말이다. 심령의 연결을 통해 그 말이 허세가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혈마검이 시무룩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매일 밤 천화가 운기를 할 때, 더 많은 내공을 쌓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혈마검씩이나 되다 보니 그 정도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느끼는 것이다. 좀 더 자신의 존재를, 그 의의를 증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천화에게 언제고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기에, 혈마검은 스스로 의지를 다졌다.

1658667403548.jpg‘그건 그렇고, 다녀와라.’

휘익! 혈마검의 몸뚱아리가 날아올랐다. 정확히는 던져졌다. 설영과 싸우고 있는 살수가 아닌, 침상 천장을 향해서.

16586674035484.jpg“큭!”

푸확! 나무판자 따위를 가뿐하게 꿰뚫은 혈마검의 끝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 내렸다. 설마하니 위층의 손님 피는 아니겠지?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천장을 부수며 누군가 떨어져내린 것이다.

16586674035484.jpg“크아아악!!!!”

그러나 혈마검에 상처입은 살수는 동료와 합류할 수 없었다.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듯한 요사스러운 검을 뽑아내려 손을 대는 순간,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자신을 차지한 이에게 힘을 주는 것이 보통이던 혈마검이지만,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는 시련을 주는 것도 그의 능력이었으니까. 고문 훈련을 일상적으로 받는 것이 살수라지만, 혈마기에 침범 당하는 고통은 훈련이나 연습으로 참아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생명력 그 자체에 관여하는 힘이었기에, 혈마검을 움켜쥔 살수의 전신 핏줄이 솟아오르며 바닥에 널브러져 부들거릴 뿐이었다.

1658667403548.jpg“신경 쓰지 말고 일봐.”

16586674035484.jpg“이, 이게 무슨……!”

놈의 격한 반응에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려던 살수와 설영에게, 천화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다행히도 혈마검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 듯싶었다. 무기 효과를 꺼놓은 덕분에 붉은 혈마기가 넘실거리는 모습까지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날이 꽂힌 상처 부위에서 피가 흡수되는 것을 확인했다면 의심할지도 모르겠지만, 설영은 그럴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상대는 몰라도 그녀만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16586674035472.jpg‘또 천화가 천화 한 거겠지.’

우우웅!! 펼친 것은 잔혼비검. 게다가 검기까지 피워올리자 상대도 더 이상 동료 따위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영혼마저 썰어버릴 듯 검 끝이 떨리며 변화를 일으키자 설영이 상대하던 살수의 검이 부러지고, 전신에 상처가 가득 생겨났다. 고작해야 이류 수준인 살수의 능력으로는 검기를 막아낼 방도가 없는 것이다.

16586674035472.jpg“누가 보냈지?”

그런 놈을 순식간에 제압한 설영이 놈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대었다. 설마 추격자들이 자신에 대해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두려운 것이다.

16586674035484.jpg“말할 것 같……. 컥!”

그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천화가 회수한 혈마검의 검면으로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 탓에 놈이 기절해버렸지만 상관없었다. 놈들의 정체 따위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1658667403548.jpg“뭘 묻고 그래? 뻔하지.”

16586674035472.jpg“……아?”

슬쩍 눈짓하는 천화의 행동에 설영도 상황 파악을 마쳤다. 흑겸살광 호랑. 그를 칭하는 다른 이름 중 하나가 바로 흑월문의 문주라는 직책인 것이다. 이놈들은 흑월문에서 놈을 구하기 위해 보낸 살수였고. 뭔가 그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이야?

16586674035472.jpg“벌써 움직이다니…….”

한편으로는 혈마를 쫓아온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들 역시도 설영이 감지해내지 못하지 않았나? 살수 무공의 특성 때문이라고는 해도, 천화가 아니었다면 낭패를 보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현상금 수령을 위해 가야 할 위곡현까지는 아직도 이틀은 더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이런 위협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제 아무리 설영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기에 잔뜩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16586674035484.jpg“흐흐흐. 내 부하들이 너희를 쫓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나를 풀어주고 목숨을 구걸…….”

이때다 싶었는지 방 한편에 짐짝처럼 던져진 채 그 상황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호랑이 스산한 목소리로 천화와 설영을 협박했다. 마혈을 점해 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아혈을 놔둔 까닭에 목소리는 낼 수 있던 것이다. 빠악!! 입을 함부로 놀린 죄로 여지없이 천화에게 처맞고 말았지만.

1658667403548.jpg“흠, 그래? 그럼 그냥 여기서 죽여줄까? 네 수하들이 네가 죽은 다음에도 쫓아다닐지 궁금해지는데? 사파인들의 눈물어린 의리! 참 기대된다. 그치?”

흠칫 진심어린 천화의 살기에 호랑은 뻣뻣하게 몸이 굳은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천화가 진짜로 자신을 죽이고 보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16586674035484.jpg‘이놈은 진짜다.’

유가장으로 자신을 데려가려 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에게 걸린 현상금 때문이겠지만, 그들이 내건 조건은 생포시 추가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생사를 불문하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의 입장에서도 추격과 습격이 거듭된다면 죽여서 데려가는 쪽이 더 편하지 않겠나?

16586674035484.jpg‘……내가 죽은 뒤에도 그놈들이 의리를 지키려들까?’

또한, 천화의 말처럼 사파인들에게 의리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이야 살아있으니 어떻게든 구하려 들고 있지만, 과연 죽은 다음에도, 또한 상대가 암습도 통하지 않는 일류 고수라는 것을 완전히 파악한 다음에도 같은 행동을 할지 자신이 없었다. 아니, 수하들은 몰라도 자신의 의형이라면 어떻게든 복수를 해주겠지. 하지만 죽은 다음 복수를 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저승에서 그것을 기뻐할 수 있을까?

16586674035484.jpg‘오히려 가만히 놔둘지도…….’

어쩌면 그것을 빌미 삼아 유가장과의 전쟁을 벌일지도 모르지만, 유가장으로 자신의 시체를 끌고 가는 이들 둘에게는 더 이상 추격이 붙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차라리 유가장에 시체가 도착하도록 놓아두는 쪽이 유가장과의 전면전을 벌일 명분을 삼기에 좋을 테니까. 놈들이 자신의 시신을 잘게 잘라 개먹이로 주고 난 뒤에야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16586674035484.jpg“어, 그, 저…….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빠악!!!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파악한 호랑이 얼른 태세를 전환했지만, 천화는 한 번 더 놈의 머리통을 후려치며 혀를 찰 뿐이었다.

1658667403548.jpg“야!”

16586674035484.jpg“네, 넵.”

1658667403548.jpg“잘하자?”

16586674035484.jpg“아, 알겠습니다.”

이제 확실하게 상하관계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천화는 정신을 잃은 두 살수들을 정리한 뒤 점소이를 불러 방을 바꾸고 파손된 기물 값을 치렀다. 물론 살수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로. 아무리 소지품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는 살수들이라지만 최소한의 활동비는 필요한 법이기에, 놈이 묵고 있던 방을 뒤지자 제법 은자가 나온 것이다.

16586674035472.jpg“여기서 괜찮을까?”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긴 했지만 안심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잠든 사이, 또 다른 살수나 무인들이 습격을 해올 수도 있었으니까.

1658667403548.jpg“괜찮아. 알아서 깨우겠지.”

그러나 천화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레이더 겸 알람 기능을 갖춘 혈마검이 있는 데다, 이 정도 수준의 살수 두 명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압당한 것을 보고도 덤벼들 멍청이들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특히 제 목숨 귀한 줄 너무나도 잘 아는 사파에서는 말이다.

1658667406137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