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빈 집은 털어야 제 맛! (2)2021.02.02.
“운이 좋군.”
비영투와 비영사. 이 두 가지를 손에 넣은 것은 정말 운이 좋은 일이었다. 애초에 노리고 이곳에 온 것이기도 했지만, 비영사는 몰라도 비영투는 천화마저도 차후 흑천문주인 호림에게서 얻을 수 있는 물건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다.
‘아직 놈들도 몰랐던 건가?’
이렇게 되니 천화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아직 비영투에 대해 호랑과 호림이 알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호림만이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방치를 한 것이거나. 대문파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후자의 경우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천화 자신이었다면 유가장과 호랑이 원수가 된 시점에 이미 회수를 해두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지. 물품 정보는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고, 저들에게는 정보창이 안 나타나니까.’
따라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호림 역시 적어도 아직까지는 비영투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저의 특권 중 하나인 물품 정보창을 이용하더라도, 해당 물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그저 ‘알 수 없는 재질의 수투’ 정도로만 표기되었을 테니까. 실제 무림에서 인영비주 박허에 대한 정보 역시도, 천잠사를 거미줄처럼 쏘아내 벽을 타고 날아다닌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장치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은사를 다루는 무인들처럼 그저 손으로 던져 사용하는 것만으로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
‘꽤 수준 높은 수공을 익힌 게 아닌 이상에야 손이 먼저 걸레짝이 될 텐데.’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천잠사를 맨손으로 다룬다는 것부터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내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무림이기에 대충 넘긴 것이리라. 천잠사를 다룰 수 있는 수공 따위가 있겠거니 하고서.
‘당장 써먹기는 어렵더라도, 나중에 그걸 얻을 때도 요긴하게 쓰일 테고……. 뭐, 활용도야 높으니까.’
그렇게 비영투과 비영사를 합친 장비를 획득한 천화가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 써먹으려면 몇 번 사용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공이야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아니겠나? 그를 위해 무림에 남겨진 수많은 안배들 중 일부만 회수하더라도 내공쯤은 금방 채워넣을 수 있기에, 그것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근데 이것까지 손에 넣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리고 또 한 가지. 비영사와 함께 놓여 있던 비급 한 권도 발견했다. [역혈기공][특수] 익혀서 써먹기는 어렵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써먹기 좋은 물건이었다.
‘일단 챙기고.’
어떤 방식으로든 써먹는다 해도 지금은 아니기에, 천화는 그것을 소지품 창에 던져넣고 설영에게 눈짓을 했다. 둘은 다시 전각의 밖으로 조심히 돌아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들이 전각에 잠입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도록 일부러 동선을 길게 가져가고 있을 때, 설영이 복잡한 눈으로 천화에게 물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유가장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으니까. 유가장에 그들과 같이 객으로 머물고 있는 고수들이 있다지만, 흑월문뿐 아니라 흑천문까지 가세한 이상 이제는 일류 고수의 숫자에서도 우세를 점한다 이야기하기는 어려웠고, 전체적인 무인의 숫자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유가장이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지만, 아마 흑천문의 기습이 일어난 직후 인근의 동맹 문파들에게 지원 요청이 날아갔을 테지만, 그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인 것이다.
‘아니, 오기는 할까?’
유가장과 흑천문이 그나마 대립할 수 있던 것은, 주변 동맹 문파들의 전력을 동원했을 때 서로 비등한 수준이거나 승리한 쪽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잘못 싸움을 걸었다가는 자신들 역시 피를 볼 수 있는 상황이기에 주저하던 것인데, 만약 흑천문이 작정을 하고 휘하 문파들까지 데리고 왔다면?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유가장의 동맹들은 걸음을 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못 들은 척, 그런 일이 없는 척. 사태가 종식될 때까지 모르는 체를 하다가 뒤늦게 유가장의 멸문을 안타까워하겠지. 관계가 중요하다하나, 자신의 문파 역시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한 걸음에 달려올 만한 이들은 많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설영이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정작 천화의 대답은 화끈했다.
“뭘 어떻게 해? 당연히 도와야지.”
“으흠……!”
그 단호한 음성에 설영이 속으로 반성했다. 아, 천화에게도 정파인으로서의 긍지가 있구나! 마음속에 의와 협이 살아있다면 돕는 것이 당연하겠지. 더구나 자신들은 현재 유가장의 객으로 몸을 의탁하던 중이었으니 고민할 일이 아닐 텐데. 판세에 따라 몸을 피하는 것을 생각하던 자신의 이기심을 반성하는 그 순간, 천화가 홱 몸을 돌려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방향을 착각하기라도 한 것일까? 천화가 달려간 곳은, 한창 전투와 대치가 벌어지고 있는 장원의 공터와 연무장 쪽이 아니었다. 마구간.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을 비롯해 객들의 말과 유가장에서 직접 키우는 말들이 있는 마구간을 향해 뛰어든 것이다.
‘아! 말들을 이용해 교란하려는 거구나.’
그 모습에 갸웃거리던 설영은 금방 천화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무사들의 수와 질 모두에서 밀리는 유가장을 돕기 위해, 말들을 풀어 날뛰게 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암수와 전략보다는 직접 검을 맞대는 쪽을 선호하는 무림인들의 특성상 자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 꼬리에 불을 붙여 날뛰게 만들며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흔히 알려진 전술 중 하나이니까.
“뭐해? 타!”
“……응?”
허나, 막상 마구간에 도착한 천화는 제 것을 골라 올라탈 뿐이었다.
“도우러 간다며?”
“응. 그럴 건데?”
“……?”
설영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찾아 올라탔다. 무림인이라면 말을 타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하긴 하지만, 아예 마상 무예를 익히지 않는 이상 땅에 발을 붙이고 싸우는 것만은 못한 것이다.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무공들은 기본적으로 보법이 갖추어졌을 때 제 위력을 내는 법이니까.
“그럼, 가자!”
“말들은? 풀어놓지 않는 거야?”
“응? 그걸 왜 풀어?”
“그야 혼란을…….”
“에이. 유가장이랑 흑천문 중에 누가 더 개싸움을 잘할 것 같아? 이거 풀어봤자 하나도 도움이 안 돼.”
“끄응.”
그대로 말에 올라 나서려는 천화에게 설영이 질문을 던졌지만 합리적인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개싸움이라면 사파인들의 특기이니까. 오히려 정파인들은 통제된 상황에서의 전투나 방진을 짜서 싸우는 쪽에 익숙한 쪽이었기에, 말들을 풀어놓아 봤자 방해만 될 뿐인 것이다.
“어? 그쪽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마구간을 나섰을 때 설영의 예상은 또 한 번 빗나갔다. 천화가 마구간을 나오자마자 말머리를 돌려 장원 밖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 맞아. 흑천문이 저쪽이잖아?”
“뭐?”
천화가 노리는 것은 흑천문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단둘밖에 되지 않는 인원으로 그들의 배후를 노린다는 것부터가 무리수나 다름없는 일.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택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개인적인 이득도 챙기고!
“설마, 또 빈집털이?”
“오! 정답입니다. 학생! 가르치는 보람이 있군요!”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것일까? 설영이 그제야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 관건은 유가장이 얼마나 버텨 주느냐겠지만, 만약 버틸 수만 있다면 흑천문과 호림이 제 집에서 불길이 치솟는데 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정도면 도움 정도가 아니라 구원이라 보아도 좋을 터였기에 천화는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못 버티면…… 어쩔 수 없고!’
물론 버티지 못한다면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유가장주가 겉으로는 인망이 높은 사람이니 주변 문파 중 소식을 접한 몇몇쯤은 도우러 올 테고, 적어도 한 시진 이내에 끝장이 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호림이 작정하고 나서서 유가장주의 목부터 딴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유가장주 유몽헌이 그리 만만한 인물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뱃속에 칼을 품고 있는 능구렁이지.’
일류 끝자락. 대외적으로 알려진 유몽헌의 무위는 딱 그 정도였지만, 전력을 다한 그의 무위는 절정 초입에 이르는 것이다. 비록 벽을 완전히 넘은 것은 아니기에 절정급의 무위를 장시간 발휘하기는 어렵겠지만, 자칫 얕보고 덤볐다가는 오히려 호림이 당하고 말 터였다. 그것을 어디까지 숨기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재수 없으면 정체가 탄로 날 테니 어쩌면 죽기 직전까지도 제 실력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천화는 알고 있었다. 유몽헌의 무위도, 숨겨둔 무공의 정체도. 그렇기에 죽을 때까지도 정체를 감추려 하겠지만, 무신지로에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무공을 꺼내며 사달을 일으킨 것도 말이다.
‘중요 분기 임무의 시작점 중 하나인데, 그냥 두는 게 나을 수도 있으려나?’
그것이 무신지로의 중요 분기 임무로 이어지는 수많은 시작점 중 하나라는 것까지 알았기에 고민이 깊어갔지만 곧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천화가 알고 있는 중요 분기 임무의 시작점은 애초에 이것 하나만이 아니었으니까.
‘좋은 물건도 얻었겠다, 기분이다!’
더구나 힘들이지 않고 비영투과 비영사까지 얻었으니 그들의 운에 걸어보기로 했다.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은 흑천문의 장원이었다. 이미 유가장을 치기 위해 대부분의 인원이 빠져나간 통에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 자체가 많지 않았지만, 그대로 높게 솟은 담장이 주는 위압감을 만만치 않았다. 이류와 삼류 수준의 무인이라면 십수 명쯤 더 있을 테고.
“그럼 작전대로 가자구!”
타앗! 정면으로 뚫고 가는 것도 가능은 하다. 혈마검이 있고, 설영이 있으니까. 그러나 천화는 성동격서를 노렸다. 흑천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설영이 정문에서 소란을 피우면 천화가 잠입하여 흑천문을 털어먹는 것이다.
“에휴. 조심해. 그리고 이번 일 끝나면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도 잊지 말고!”
그래도 상대가 사파라는 것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설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들었다. 우우웅! 검기를 일으켜 흑천문의 정문을 가볍게 후려쳤다. 콰앙!!!! 꽤 질 좋은 나무로 만든 두툼한 문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귀에 착 달라붙는 타격음이 장원 전체를 뒤흔들자, 본단을 지키기 위해 남아있던 무사들이 우르르 정문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침입자다!”
“웬 미친놈이 이 시간에…….”
“조심해! 정문을 박살낼 정도의 고수다!”
개중에는 세력의 힘을 믿는 것인지 여유를 부리는 놈도, 하필이면 문 내의 고수들이 빠져나간 이 시점에 쳐들어온 것을 수상히 여기며 경계하는 놈들도 있었다. 사사삭- 그사이 천화는 담장을 돌아 넘으며 은밀하게 내부로 진입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날아가 볼까?”
쐐애액- 퍼억! 아직은 손에 익지 않았기에 조금은 어색한 손길로 쏘아낸 비영사가 지붕에 박혔다. 정확히는 손잡이 부분에 구멍을 뚫어 비영사를 연결시킨 비도가 박힌 것이지만, 어쨌든 힘을 주어 몸을 날리자 천화의 몸이 붕 떠올랐고, 뻗어나간 비영사가 다시 소매로 회수되며 포물선을 그리듯 천화의 몸이 날아올랐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거미인간처럼 말이다.
‘확실히 아직 여러 번은 어렵겠는데.’
이걸 반복해서 사용한다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겠지만, 비영사를 박아넣고 고정시키려면 적지 않은 내공이 소모되기에 아직 반복 사용은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여러 번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모든 무사들의 시선이 설영에게 쏠린 상태였고, 이 시점에 지붕 위까지 신경 쓸 만한 이들은 없는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소지품 창을 개방한 천화의 손에 손가락보다 조금 긴 막대기 같은 것이 들려졌다. 화섭자라 불리는 불을 붙이는 도구였다. 개방과 동시에 불꽃이 피어오르기에 보통 노숙을 할 때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불을 지르는데 사용되기도 하는 그것. 그것이 폭탄처럼 흑천문의 전각 곳곳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화르르륵!
“부, 불이다!!!”
“전각에 불이 붙었다!!”
일부는 돌벽을 쌓아 만들었지만 장원의 모든 전각이 그러기는 힘들었다. 석재건축물을 짓는 것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니까. 그것을 아끼기 위해 한두 채를 제외하고 모두 목재로 지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무형보를 밟아 지붕을 뛰어다니며 화섭자를 던지자 불길은 순식간에 사방에서 치솟았다. 하지만 불을 꺼야 할 인력들은 설영에게 붙들려 오도 가도 못하는 중이었다.
“자, 몰이는 끝났고. 이제 수금하러 가 보실까~?”
눈썰미가 좋은 이들이라면 알아차렸을 터였다. 불이 난 곳은 앞쪽의 전각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간부들의 숙소와 창고가 있는 뒤편의 전각 지붕 위로 누군가 빠르게 뛰어넘어 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