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미끼 (2)2021.03.04.
“아……. 역시 없는 건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설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포목점 등 면사를 판매할 만한 곳부터 돌아보았건만, 한참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손은 비어있었다. 얼굴을 가려주면서도 안쪽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어야 하는 면사의 특성상 꽤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는데, 이 작은 마을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가며 면사를 만드는 이가 없는 것이다. 작업이 번거로운 만큼 가격도 제법 나가기 때문에, 여성 무인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라면 구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무인들 자체가 그다지 많이 거쳐간다고 말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쉬어갈 수 있는 객잔이 있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그나마도 객잔은 숙박뿐 아니라 식사와 간단한 요리를 제공하기에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때문에 객잔에는 자리를 잡고 술을 한잔 걸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새 설영과 천화에 대한 소문이 돌았는지 객잔의 자리에는 대부분 순박하게 생긴 시골 청년들이 저마다 멋을 부리고 앉아있었다. 무공 따위는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이었지만, 설영의 미모를 멀리서라도 지켜보기 위해 혹은 설영이 그들을 마음에 들어해 먼저 말이라도 걸어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모여든 이들이었다.
“여기 술부터 빨리 한 병 내오고, 요리는 가장 자신있는 걸로 두 개!”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천화와 설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부터 했다. 설영이 기분 나빠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이런 상황들이 익숙한지 설영은 한숨을 한번 푹 내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 수준의 큰 마을에서는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 중에서도 그녀에게 수작을 걸어오는 이들이 꽤 많았으니까. 다만 얼른 면사든 인피면구든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요리를 기다릴 뿐이었다.
“점소이! 이리 오너라.”
“……?”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기를 잠시, 투숙객으로 보이는 세 명의 청년이 2층에서 내려오는가 싶더니 그중 부채로 얼굴을 가린 자가 점소이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무림인입니다.]
‘나도 알아.’
그와 동시에 혈마검이 경고를 보냈지만 그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은 천화도 이미 눈치를 챈 상태였다. 그들의 무복에 수놓아진 문양을 확인했으니까.
‘화산파가 여기 왜 있어?’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매화 문양의 수. 그것은 구파일방 중 하나인 화산파의 표식이었으니까. 그들이 기반으로 삼는 화산은 섬서성에 위치해있을 텐데, 왜 여기서 기웃거리는 것일까?
‘꼴을 보아하니 심부름이나 나온 것 같은데…….’
뭔가 임무를 받아 산을 내려온 것이겠지. 허나 임무가 그리 특별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딱 봐도 강호에 출두할 만큼의 고수가 아니었으니까. 구파일방 오대세가로 대표되는 무림 명문들의 경우, 혹여나 제자들이 밖으로 돌다가 문파를 욕보일까 봐 꽤 엄중히 강호출두를 금지시킨다. 그러니 허락을 받아 강호에 나서기 위해서는 최소 일류 중상급에 달하는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나마도 다섯 이상의 사형제들과 짝을 이뤘을 경우에만. 만약 홀로 강호를 독보하려면 일류 끝자락에서 절정급의 무위를 지녀야만 가능한 것이 일반적이었고.
‘뭐, 시비만 털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렇기에 잘 쳐줘야 한 놈은 일류 초입, 둘은 이류 중반쯤으로 보이는 저들 셋은 주기적으로 가문에 다녀오는 속가제가이거나 윗사람의 심부름꾼 역할로 산을 내려온 것으로 보이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시비를 걸면 귀찮아지겠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천화와 설영이 있는 자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따로 자리를 잡아 이동했으니까.
“오리구이 나왔습니다!”
“호오, 이게 가장 자신 있는 요리인가?”
하지만 잠시 후, 점소이가 오리구이를 한 접시 가지고 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아니오. 이건 저쪽 분께서 보내셨습니다. 여인의 피부에 오리고기가 좋다고…….”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점소이의 시선을 따라가자, 부채를 살짝 내리며 느끼하게 웃는 화산파 제자의 낯짝이 자리하고 있었다.
“풉. 술도 아니고 오리고기로 작업 거는 놈은 또 처음이네. 그것도 도사놈이 말이야.”
화산파는 도가 계열의 문파이다. 아미파나 무당파만큼 엄격한 계율의 도가 문파는 아니기에, 도사임에도 여성 또는 남성을 만나고 혼인을 하는 것까지 허락이 된다. 하지만 이처럼 처음 보는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짓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천화도 웃음보를 터트린 것이다. 더구나 마치 자신에게 반하지 않고 못 배길 것이라는 듯 느글거리게 웃는 모습과, 그다지 덥지도 않은 실내에서 부채를 활짝 펴고 분위기를 잡는 모습이 어우러지자 천화도 참지 못하고 배꼽을 잡았다. 화산파에 유명한 선(扇)법이 있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저건 누가 봐도 멋으로 쥐고 다니는 것이었으니까.
“큭큭.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그래? 공짜 고기까지 줬는데.”
“어휴. 적당히 하지?”
그 모습에 설영은 화산파의 제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대신 천화를 찌릿 노려보았다.
“이건 됐어요. 저쪽분들에게 돌려드리고 저희가 주문한 것만 가져다주세요.”
점소이가 설영과 천화, 그리고 화산파 제자들을 힐끗거리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설영은 정중하게 사양하며 오리고기 접시를 물렸다.
“하하.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성의이니 받아주시죠. 아니면 합석할까요?”
그때, 화산파의 세 놈이 천화와 설영이 있는 자리에 다가왔다.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화산파 이대제자 홍빈이라고 합니다. 여기 두 아이들은 삼대제자들로 저를 수행하러 함께 나왔지요.”
합석을 제의하며 은근히 자신의 신분을 과시했다. 화산파의 이대제자. 그것이 가지는 힘은 무림에서 제법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이대제자 주제에 일류급이면 재능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 따위로 여색에 눈이 돌아가서는 대성하긴 힘들겠네. 큭큭.’
하지만 웃었다. 좀 전처럼 소리를 내어웃지는 않았지만 실소를 금할 수 없었으니까. 수행원이라니? 자기 사제를 그 따위로 부르는 도사놈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령 화산의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그렇게 부르지는 않을 텐데. 꿈틀 애써 웃음을 참는 그 모습에 상대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다행히도 사달이 나지는 않았다. 첫 눈에 반한 여성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음이니까.
“설영이에요. 사문은 딱히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죄송하지만 조용히 쉬고 싶은데 가주시겠어요?”
하지만 삼대제자라는 사제놈이 의자를 가져오기도 전에, 설영이 한숨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쉬고 싶으니 사라져달라는 것. 명백한 거절의 의사표시였다. 하지만 놈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하. 이렇게 교류하며 담소도 나누고 서로 어울리면 그것 또한 쉼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호랑말코 같은 도사놈이 아니랄까 봐 궤변에 가까운 헛소리를 꼬아서 이야기하며 자리에 앉으려 들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크크큭. 요리까지 시켜주시고, 돈도 많은 것 같은데 합석하지 그래?”
그 모습에 설영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다시 거부 의사를 밝혔고, 천화는 그녀를 놀리듯 혀를 놀렸다.
“소협께서는 저희와 어울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선남선녀가 어울리는데 적당히 빠져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지요?”
그 모습이 고까웠던 것일까? 두목에게 충성하는 건달들처럼 삼대제자들이 제법 위협적으로 기세를 드러내며 천화에게 다가왔다. 천화를 끌어내듯 자신들의 자리로 데려가고 설영과 사숙을 둘만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들이 도사인지 파락호인지 모를 행동이었지만, 천화는 화를 내는 대신 능청스레 웃을 뿐이었다.
“에이~. 그래도 시킨 음식이 있는데 그건 먹고 가야지. 그게 음식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피식 그 의도가 뻔했으니까. 그러나 두 어린 도사들은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건 저쪽에도 똑같이 시켜줄 테니 어서 일어…….”
스륵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인지 양쪽에서 천화의 팔을 붙잡으려던 도사들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천화가 휙 팔을 휘젓자 그들의 손이 허공을 붙잡은 것이다.
“어이구. 두 분 도사들께서 기가 허하신 것 같은데? 쩝! 이래서는 뺏어먹는 것 같아서 민망하군. 이거라도 가져가서 드시죠.”
그들이 얼떨떨해 하는 사이, 천화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차며 오리고기가 올려진 접시를 집어들었다. 이거라도 먹고 기운 차리라는 것이다.
“……어?”
무공일까? 한자락 배운 실력이 있어 자신들의 손을 뿌리친 것인지, 그저 우연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기에 두 도사가 머뭇거렸지만, 힐끔 쳐다본 사숙의 표정이 험악해져있자 찔끔 몸을 떨며 다시 손을 놀렸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도록 금나수의 수법까지 섞어가며 천화의 팔을 붙들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두 도사의 손에는 나란히 오리고기가 담긴 접시가 들려있었다. 천화가 기우뚱 몸을 움직이며 들어올린 접시를 그들이 받아든 모양새가 된 것이다.
“어휴. 그렇게 먹고 싶었으면 말을 하시지. 사숙이 밥도 안 사주나 보네. 제가 한 그릇 더 시켜드려요? 여비가 부족하다고 처음부터 말을 했으면 시주라도 해드릴 텐데! 아, 도가니까 시주가 아닌가?”
거기에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조롱까지. 나름대로 무공을 쌓은 그들인지라 천화에게 농락을 당하고도 모자라 조롱을 듣는 것이 치욕스러웠는지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놈……!”
“세 번이나 말씀드려야 하나요? 합석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돌아가시죠.”
그 분노를 터트리려는 찰나, 설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합석의 의사가 없음을 소리 높여 명백히 밝힌 것이다. 여기서 난동을 부렸다가는 화산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 명색이 정파, 그것도 구파일방의 일원으로서 여기 있는 모두를 죽여 살인멸구할 것이 아니라면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만약 화산의 도사가, 그것도 이대제자 씩이나 되는 이가 여색을 탐해 다른 이들을 핍박했다는 소문이 돌면 명문 화산의 명예가 땅에 떨어치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 역시 본산에 돌아가는 대로 어떤 징계를 받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화산과의 교류를 마다하다니, 사파인가 보군. 가자!”
때문에 잠시 고민하던 홍빈은 천화 하나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삼대제자들을 노려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응. 안 무서워.’
그 뒷모습에 천화가 코웃음을 쳤지만, 설영은 지겹다는 표정과 함께 살짝 걱정스런 기색을 비쳤다. 그래도 명색이 화산파이니까. 당장 그들의 무공이 자신에 미치지 못하고, 파락호나 한량 같은 작태를 보였다지만 살짝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인 것이다.
“괜찮겠어?”
그렇다보니 오히려 설영이 천화를 걱정했다. 자신에게 호감을 품었으니 직접 해코지를 하려하지는 않겠지만, 천화는 아니었으니까. 당장이든 나중이든 어떤 식으로든 시비를 걸거나 해코지를 하려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지금 당장, 혹은 내일 당장 이곳을 떠난다 해도 기어코 쫓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괜찮아, 괜찮아. 안 참으면 지들이 어쩔 건데.”
하지만 정작 천화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년에는 화산 장문인이 머리 숙이게 만들던 그가 아니던가? 게다가 일대제자도 아니고, 심부름 나온 이대제자 따위가 화산을 대표할 수 없었기에 개의치 않는 것이다. 굳이 녀석이 화산을 끌어들이자면 천화가 화산을 모욕했다는 증거를 만들어야 하는데, 천화가 그런 틈을 줄 리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증명하거나 다른 이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이동하는 그들을 기다려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만약 다른 화산의 고수에게 가서 이른다? 그렇게 되면 과연 면박을 받는 것이 누구일까? 설영에게 집적대다가 창피를 당했다고 한다면, 설령 그들이 모욕을 당했다 한들 편을 들어주는 이는 많지 않을 터였다.
‘여차하면 다른 문파에 소문을 퍼트려도 되고.’
하다못해 편을 들고 나오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약간의 소문을 퍼트리면 그만이다. 화산의 제자가 여인을 추행했다는 소문이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혹은 그들의 자리를 넘보는 다른 대문파들에게 전해지기만 하더라도 마냥 제 식구를 감싸기만 할 수 없을 테니까. 물론 그럴 경우 어떻게든 천화와 설영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들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춘다면?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일탈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문파가 체면을 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화산 전체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원래보다 더 큰 벌을 내려야 하겠지. 명문이란 그런 것이다. 명예를 제 목숨보다, 제자들보다도 더 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천화에게 있어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화산, 화산이라…….’
그렇게 분을 삭이며 제 자리로 돌아간 녀석들을 바라보던 천화의 머릿속에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잘하면 재미난 그림이 만들어지겠는데?’
하루 빨리 중요 분기 임무를 모두 완수하기 위해, 마교의 꼬리를 드러내고 일을 더욱 키우기 위해 저들을 써먹을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