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전사의 증명 (2)2021.03.11.
“바이는 바보~. 주먹밖에 몰라~.”
후웅 후웅 대결은 일방적이었다. 승부가 갈릴 만한 어떤 결정적인 타격 따위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바쿠람이 공격하고 천화가 회피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설영을 제외한 모두가 바쿠람을 응원하고 그의 강맹한 공세에 열광했지만, 정작 천화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중이었다. 육체능력의 차이 때문에 감히 함부로 반격을 생각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답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놈! 전사답게 맞서라!”
찰싹! 보기와 다른 것은 바쿠람 역시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 공격을 뻗어내고 있는데 천화가 마주쳐주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약이 오르게 천화가 자신의 몸을 툭툭 건드려오는 것이 더 열받았다. 강인한 육신 덕분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찰싹 찰싹 찰지게 피부에 감기는 공격은 성질을 긁기에 충분했으니까.
‘생각보다 잘 참네.’
천화가 기다리는 것은 그런 놈의 폭주였다. 지금 상태에서는 설사 공격을 가한다 해도 자신의 피해 역시 감수해야 했으니까. 내공을 실어 휘두른 일격에도 비틀거리지조차 않는 녀석에게 제대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이쪽도 피해를 감수할 각오를 하거나, 더 큰 빈틈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디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천화의 의도대로 바쿠람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공방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철저히 천화를 두들겨 패기 위해 주먹을 휘둘러오는 것이다. 어차피 반격을 당하더라도 큰 타격이 없다는 생각이겠지. 그 의도가 뻔했기에 천화는 당황하는 척 연기를 하다가, 놈이 들이닥친 순간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
뻐억!!! 제자리에서 수직으로 뒷발을 올려차며 놈의 턱을 강타했다.
“크윽!”
아무리 외공을 단련했다 한들 턱뼈까지 단련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이 동네 사람들은 천생 강골로 태어나니 바쿠람이 유리턱이기를 기대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잠깐의 흔들림 그것이면 충분했다.
“무슨 짓이냐!!”
순간 아찔해진 시야가 돌아온 순간, 바쿠람이 잔뜩 성질을 부리며 몸을 휘돌렸다. 천화가 그의 등 뒤에 매달렸으니까. 다리로 단단히 놈의 몸과 팔을 조이고, 양손으로는 목을 조르는 초크 기술을 건 것이다.
타격이 안 된다면 관절기와 조르기로 승부를 걸면 그만이니까.
‘원래 강은 유로 꺾는 법이지.’
강은 유로 누르고, 유는 예로 베어낸다. 그리고 다시 예는 강으로 부순다. 아주 단순한 공방의 원칙이다. 때로는 강을 강으로, 강을 관통하는 예로 꺾는 경우도 있다지만, 그것은 압도적인 수준 차이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천화는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놈을 압박했다. 초크라는 기술은 단지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경동맥을 동시에 졸라 피와 숨이 통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순간적으로 상대를 기절시키는 기술. 자칫하면 숨을 끊어놓을 수도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천화는 전력을 다해 팔을 조였다.
‘이래서야 통하기는 할지 모르겠군.’
통나무처럼 두꺼운 바쿠람의 목은 아무리 졸라도 압박이 되기나 할지 의문일 정도로 강인했으니까.
“크으으으…….”
그 증거로 10초면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는 기술이 제대로 들어갔음에도 녀석은 벌써 20여 초째 버둥거리며 천화를 떼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조이고 있는 발이 힘에 의해 강제로 풀리기 직전이었다. 쿠웅!
‘큭!’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쿠람은 아예 땅으로 몸을 던져 천화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고작 그 정도에 힘을 풀어버릴 정도로 미숙한 천화가 아니었다. 등에 가해지는 충격을 참아내며 그 상태로 약 10여 초를 더 버티자 바쿠람의 몸에서도 슬슬 힘이 풀렸다. 이내 완전히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자, 천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세를 바꾸었다. 그대로 계속 초크를 유지하면 숨을 끊어놓을 수도 있다. 지금은 정상적인 전사들의 대결인 만큼 놈을 죽인다 한들 천화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겠지만, 굳이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읏차!”
뽀각! 하지만 몸성히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다. 바쿠람의 몸 위에서 기듯이 움직인 천화가 이번에는 팔에 매달리는가 싶더니 자신의 몸을 지렛대 삼아 잡아당겼다. 암바라 불리는 기술로 기절한 바쿠람의 팔을 반대로 꺾어 부러뜨린 것이다. 뽀각! 그리고 반대쪽 팔도 마찬가지로 부러뜨렸다. 기절했던 바쿠람이 다시 일어날 경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난동을 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절이라는 것은 자신이 기절한 줄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투욱 양팔을 부러뜨린 천화는 귀찮다는 듯 바쿠람의 몸뚱아리를 발로 차서 넘기는가 싶더니 슬쩍 주먹질을 가해 어딘가를 내리쳤다.
“요추 4번과 5번 사이. 허리디스크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부위지~.”
현대인들의 고질병이라는 허리디스크를 강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제 바쿠람은 정신을 차리더라도 허리통증을 느끼거나 다리가 저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겠지. 전사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겠지만, 허리디스크라는 것이 늘상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린 것이 아니니 일상생활과 어느 정도의 전투는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복근 운동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크윽? 이놈……! 으윽!!”
그리고 잠시 후, 짧게 기절했던 바쿠람이 깨어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허리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제대로 허리디스크에 걸린 것이다.
“그만! 바쿠람 네가 졌다.”
“바후멍! 나는…….”
통증을 참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바쿠람을 막아선 것은 둘의 대결을 관전하던 다른 전사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바쿠람의 패배를 대신 시인했고, 그와 동시에 천화의 눈앞에도 알림창이 나타났다. [바쿠람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전사의 증명’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의 전사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좋은 승부였다. 전사여.”
“별말씀을!”
부축을 거부한 탓에 아직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바쿠람의 눈빛도 달라졌다. 좀 전까지는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긴 하지만 양팔은 부러졌고, 허리까지 망가진 것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어우, 무식한 놈.’
그러면서도 부러진 팔로 땅을 디디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괴물 같이 보였지만, 이젠 상관없는 일이지. 전사의 증명은 끝이 났고, 그가 복수를 하거나 재대결을 신청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뒤에 친구도 도전을 할 텐가?”
“예. 물론입니다.”
다음은 설영의 차례였다. 무기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과, 그들이 외공을 어마무시하게 익혔다는 것은 천화의 대결을 통해 보았으니 한결 편하게 상대할 수 있겠지.
“얼굴을 가리다니, 날 무시하는 건가? 그딴 천쪼가리는 치워버려라!”
설영과 마주한 상대가 대결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불같이 화를 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설영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전사라면 상대의 눈을 보고 무언의 교감을 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
[안 돼. 다 끝난 다음에 벗어. 할 수 있지?]
끄덕 하지만 천화는 귓속말을 보내 그것을 거부하도록 지시했다. 만약 여기서 설영이 면사를 벗는다면, 여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상대가 대결을 거부할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그럴 바에는 전사로서 인정을 받은 후에 여성임을 밝히는 것이 백번 나았다.
‘면사를 썼다고 다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직접 뜯어보시지?”
때문에 설영은 면사를 벗는 대신 놈을 도발했다. 분노한 상대가 달려드는 것으로 대결이 즉시 시작되었다.
“얼굴 가죽까지 뜯어주지!”
손바닥을 쫙 펼친 상대가 설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림이란 이름을 가진 상대의 몸놀림은 바쿠람의 그것과 꽤나 달랐기에 한순간 다섯 번의 손짓이 펼쳐졌지만, 설영은 지지 않고 그것을 받아쳤다. 이미 일류 수준에 오른 그녀라면 외공의 고수라 할지라도 맞상대하기에 충분했으니까. 파바방! 손과 손이 부딪히는데 뭔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공을 가득 실은 탓이지만, 상대는 놀랍게도 내가기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것들을 무난하게 쳐냈다.
“힘이 제법이구나!”
짐짓 설영을 인정하며 다시 한 번 손톱을 할퀴어갔다. 노리는 것은 면사. 하지만 그것은 실책이었다. 처음의 격돌로 이미 설영이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았다면 고작 면사를 뜯어낼 것이 아니라 그녀를 쓰러뜨릴 생각을 하는 것이 옳으니까. 그러나 면사를 잡아채는 것이 더 쉽다고 판단한 것일까, 아니면 처음 내뱉은 말에 대한 오기일까. 녀석은 끝까지 면사에 집착했고, 설영은 유연하게 그것에 대처했다. 촤악! 면사를 내어주는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놈의 명치께에 가져다 댄 것이다. 퍼엉!! 그리고 내공을 힘껏 발출했다.
“커헉!!”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상대. 평소라면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겠지만, 혈마기에 적중당한 녀석은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내가중수법에 대항하기 위해 수련을 쌓은 그였지만 혈마기는 내가기공 중에서도 더럽기로 손에 꼽히는 것이었으니까.
“우, 우웩!”
열 발자국이 넘게 밀려나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긴 했지만, 피를 토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저 내부에 타격을 입힐 뿐 아니라 혈맥을 꼬이게 만드는 혈마기에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외공을 극한까지 익힐 경우, 따로 심법을 익히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내공이 피부와 근육에 쌓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부를 돌아다녔다. 기혈을 막고 뒤틀며 혈맥과 근육까지 꼬이도록 만들었다.
“제……길…….”
털썩 그것으로 끝이었다. 벗겨낸 면사 너머의 얼굴을 확인한 녀석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지며 그대로 거꾸러진 것이다. 여인에게 패배했다는 수치심에 몸을 떨 새도 없이 눈알을 까뒤집고 기절을 해버렸다.
“승자 결정! 새로운 전사가 탄생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도 바후멍이 대신 승리를 선언했다. 설영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인지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이미 전사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헉! 저 얼굴 좀 봐.”
“어쩌면 저렇게…….”
동요를 일으킨 것은 전사들만이 아니었다. 전사의 증명을 실시간으로 관전하기 위해 모여든 소수 민족의 사람들이 제각기 설영의 외모를 보고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못생겼어!”
“저 하얀 피부 좀 봐. 중원인들은 방 안에서 내공인가만 익힌다더니, 진짜인가 봐!”
“어쩐지 팔이 가늘더라니! 저런 녀석에게 진 거야?”
“전사로서는 인정받았을지 몰라도, 대전사한테는 어림도 없을 거야.”
“어휴, 흉해라.”
“괜히 보러 왔군. 눈만 버렸어!”
중원에서와는 정 반대의 반응이었지만 말이다. 처음 듣는 신랄한 반응에 설영마저 당황할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소수 민족에게는 구릿빛 피부의 근육질 또는 포동포동 살집이 오른 얼굴이야말로 미인의 표상인 것이다.
‘그래도 시비 걸릴 일은 없겠네! 아니, 반대로 시비가 걸리려나?’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천화만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뭐, 어쨌든 된 것 같은데?”
“어? 어……. 그렇긴 한데…….”
평생 들어보지 못한 못났다는 비난에 설영의 머릿속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지만, 천화는 넉살 좋게 바후멍에게 다가가 전사의 증표를 요구했다. [전사의 증표] 전사의 자격을 상징하는 증표 이것을 지닌 자는 소수 민족들에게 전사로서 존중을 받는다 제한된 장소에 출입할 수 있는 출입증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 소지시 [전사의 권위] 획득 - 힘 + 5 - 체력 + 5 주먹 모양이 음각되어 있는 평범한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다. 없는 것보다는 나아도 보유 효과 역시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천화가 굳이 싸움을 벌여가며 이것을 얻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것까지 얻었으니 이제 준비 완료군.’
전사묘. 그곳으로 가기 위한 길목을 이들 바이족을 비롯한 거라오족, 후이족, 야오족 등 소수 민족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길목을 제지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전사로 인정을 받은 이들뿐. 힘으로 뚫고 나갈 수도 있긴 하지만, 전사가 아니라 대전사쯤 된다면 중원무림을 기준으로 절정급에 이르는 강자들이었기에 무사히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증표를 얻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드디어, 전사묘로 찾기 위한 마지막 열쇠가 손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