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뜻밖의 재회 (2)2021.03.16.
혈마 강림! 그것은 설영을 한순간에 절정급의 무인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치트키였다. 단숨에 무공 수위를 한 단계 이상 높이고 막강한 힘을 쏟아낼 수 있는 대신, 혈정의 기운을 대량으로 소모한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나마 지난 전투들을 통해 약간은 힘을 보충해 두었기에, 두어 번 혈마화를 하는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천화도 믿고 혈마검을 던진 것이다.
“혈마의 후예가 왜 여기에……!”
“상관없다. 죽여라!!”
“혈마검과 비급을 빼앗아라!”
갑작스런 혈마의 강림에 마인들은 크게 당황했지만 곧 안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그 옛날에 악명을 떨친 혈마 본인은 아닐 테니까. 천마와도 비견되던 그때의 혈마라면 이곳에 있는 모든 마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고작해야 일류 수준의 무위를 갖춘 이가 혈마검의 힘을 빌린 것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그들에게 기회였다. 물론 그들도 생각한 바가 있어 소수 민족의 무공들을 탐내는 것이었지만, 혈마검과 혈마신공의 비급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더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만약 혈마신공을 익힌 고수들을 양산할 수만 있다면 무림을 제패하는 일이 훨씬 더 쉬워질 테니까. 혈마신공을 익히기 위해 피를 봐야 한다? 그것 또한 문제없다. 마공 중에는 여인들의, 혹은 아이들의 피만을 골라 흡수해야만 익힐 수 있는 더 지독한 조건의 것들도 제법 되기 때문이다.
“모두 물러나라! 저년은 내가 맡겠다!”
“각주님!”
“각주님이 나서셨다. 모두 혈마에게서 물러나! 작전에 집중해라!”
그래서일까? 뒤에서 가만히 전투를 지켜보고만 있던 중년인이 나섰다. 총 10개의 대를 거느리는 마교의 ‘각’을 책임지는 고수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인 것이다.
‘아마도 무공 수위가 최절정쯤이었지?’
천화가 기억하는 마교 각주의 무공 수위는 보통 절정 중에서도 최상급이라는 이른바 최절정의 경지. 절정의 끝자락인 최절정과 그 윗단계인 초절정의 사이에는 무림인들이 흔히 ‘벽’이라 부르는 커다란 깨달음의 차이가 존재했기에, 거기서 가로막혀 평생을 허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같은 절정이라는 경지 내에서 따로 구분될 만큼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는 수준인 것이다.
‘될까?’
때문에 설영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마화를 사용한 설영의 무위는 최절정에 가까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최절정까지는 아니었으니까.
‘하긴, 못하면 나가 뒈져야지.’
하지만 걱정도 잠시, 다시 눈앞의 적에게 집중했다. 설영이 아니라 혈마검을 믿기 때문이었다. 설영이 그 힘을 휘두르는 것이라면 자칫 단숨에 결판이 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설영의 몸을 지배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혈마검이니까. 전대 혈마들과 함께 강호를 질타하며 무수한 경험을 쌓았을 녀석이 고작 저 정도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천화에 비할 바는 아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투에 있어서만은 혈마검 역시도 고인물이라 불릴 만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까.
“적이 너무 많습니다.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인데…….”
“저들이 작전상 후퇴라는 말에 동의할 리가 없죠.”
그런 천화에게 고불이 검을 떨치며 말을 걸었다. 아무리 봐도 무모한 싸움이었다. 작정하고 덤비는 놈들이었기에 천화와 설영이 가담했다 한들 승리를 점치기는 무리였지만, 그렇다고 야만전사와 대전사들이 그들의 말에 따라 도주를 택할 리는 없었다. 죽더라도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면 전사묘로 영혼을 보낼 수 있지만, 비겁하게 도망을 치다가 죽으면 영혼이 구천을 헤맨다고 믿는 이들이니까. 이미 천화보다 먼저 전사로 인정을 받은 만큼, 그들의 특성에 대해서도 제법 이해도가 있는지 고불이 정확히 상황을 파악했다. 천화도 그 생각에 동의했고.
“물러서지 마라! 선조들의 영혼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외공 위주로 단련을 했다고는 하지만 전사와 대전사들의 무위는 중원 기준으로 일류에서 절정 수준이었다. 전사들이 일류급의 마인들을 맡고, 대전사들이 대주급의 마인들을 맡으며 나름 분투하고 있었지만 점점 밀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마인들이 어느 정도 손에 사정을 두고 있기에 이만큼이나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 그들이 작정하고 독수를 펼칠 경우 힘의 균형은 급격히 무너질 수 있었다. 그나마도 시간이 지나고 전사들의 수가 어느 정도 이하로 줄어들기 시작하면 전투가 일방적으로 흘러갈 것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여기서 전멸을 당할 것이 아니라면.
‘별수 없나.’
천화가 상대하던 마인을 잠시 고불에게 미뤄두고 전황을 살폈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 전체적인 전투에서도 마인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데다, 설영 역시 탐마각주에게 가로막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설사 설영이 승리한다 해도 이들을 패퇴시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설영 역시, 혈마검 역시 상당한 힘을 소진한 후일 테니까. 물론 혈마검이야 혈정의 기운이 남아있는 한 무한히 힘을 꺼내 쓸 수 있을 테지만, 그 힘을 담아내는 그릇이 문제였다. 완전히 단련되지 못한 설영의 육체가 혈마검의 힘을 얼마나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천화는 결단을 내렸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전멸은 피하기 어려워 보였으니까.
“휘익!!”
“?!”
천화가 돌연 길게 휘파람을 불자, 이곳까지 타고 왔던 말이 헐레벌떡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살기를 이용한 말 조련법. 천화는 이미 녀석을 얻은 직후부터 고인물들의 수법인 살기를 통한 조련을 해두었기에, 녀석은 주변에서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화를 향해 달려올 수 있었다. 이곳으로 뛰어들면 죽을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경고가 머릿속에 울려퍼졌지만, 그런 이성 따위는 날려버리는 진득한 천화의 살기를 떠올린 까닭이었다.
[그만하고 이쪽으로 와!]
그런 녀석의 등 위에 올라타며 천화가 설영에게 귓속말을 날렸다. 오직 설영만이 들을 수 있는 전언을 보낸 후, 몸을 날리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쪽이다!”
처음에는, 말에 올라탄 천화를 쫓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전사들 역시 실망을 했다는 듯, 냉기가 풀풀 날리는 눈으로 멀어지는 천화를 바라보았다.
“어딜 가려 하느냐!!”
“혈마강천!”
따르는 것은 오직 설영뿐. 탐마각주라는 자가 몸을 빼내려는 설영을 막아서긴 했지만, 설영은 혈마기를 이용한 큰 기술 하나를 날려준 뒤 전력으로 천화의 뒤를 쫓았다.
“섬전투영!”
콰앙! 쾅! 간신히 혈마강천의 기운을 해소하며 설영의 뒤를 쫓으려던 탐마각주에게 한 자루의 창이 날아들었다. 고불이 등에 메고 있던 창을 투척한 것이다. 고불은 현재 네 가지의 무기를 다루고 있었으니, 창 한 자루쯤 없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나마도 아직 무공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네 가지에 그친 것이지, 나중에는 동시에 여섯 가지의 무기를 다루게 될 터였다.
“큭! 이것들이!!”
고불의 창 투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공 초식이었기에 강대한 기운이 실렸고, 녀석은 주춤거리며 설영을 쫓을 기회를 잃었다.
“잘 있어라, 우리 먼저 간다!”
펄럭! 그때, 천화가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 손으로 펄럭거렸다. 전사묘의 지도. 그것을 일부러 마인들에게 내보이며 시선을 끈 것이다.
‘술래가 되는 건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가끔은 재미있긴 하지.’
“저건?!”
“쫓아라! 지도를 빼앗아라!!”
마인들도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진품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것이 전사묘의 지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천화가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초에 전사묘의 지도의 행방을 모르던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더구나 저것을 취하기 위해 움직이던 유가장이 멸문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으니, 천화가 자신들을 유인하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쫓는다! 선조들의 성역에 발을 들인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그리고 재미있게도, 천화를 뒤쫓는 마인들을 야만 전사들이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천화가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본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그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은 성역이자 금역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발을 들이면 설령 전사들이라 할지라도 살아나올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알아서 죽기를 바라며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대 추격전,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빨리, 더 빨리!”
“히이잉!!!”
천화의 재촉에,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듯 말이 울부짖었다. 준마이기는 해도 명마 수준까지는 아니기에 한계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는 덕분에 어지간한 일류 고수 이상의 속도는 내고 있었다. 하지만 천화에게는 한 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으니까.
“추격을 늦춰볼까요?”
“아니야. 그럴 시간이 없어. 잘못해서 탐마각주에게 붙들리면 그것도 낭패고.”
때문에 아직 혈마화를 풀지 않은 설영이 추격을 늦춰볼까도 생각했지만, 잘못하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 전사묘의 지도도 탐나겠지만 혈마검과 혈마신공은 그 이상으로 탐이 나는 것이니까.
“저도, 저도 데려가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뒤를 가장 바짝 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고불이었다. 천화를 겪어본 탓에, 천화가 말에 올라탔을 때부터 뭔가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버려? 말아?’
천화는 그것이 썩 탐탁지 않았지만 굳이 뿌리칠 필요도 없다. 여차하면 그가 시간을 벌어줄 테니까.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러는 사이, 전사묘가 가까워졌다. 정확히는 전사묘가 있다고 전해지는 특정 지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해(霧海). 안개가 바다처럼 깔린 이곳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이 일대는 좀처럼 안개가 끼지 않는 곳이었지만, 유독 이곳만은 특수하게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냥 자연 현상이 아니지.’
하지만 천화는 알고 있었다. 이 안개부터가 전사묘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 안개들은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천연의 진법이 이곳에 깔려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탓에 이곳에 잘못 들어왔다가 길을 잃어 헤매거나, 끝끝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 인근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소수 민족들마저도.
“올라타!”
눈앞에 안개가 펼쳐지자마자 천화는 속도를 늦추며 설영과 고불을 말에 태웠다. 한 마리의 말등에 셋이 함께 올라타자니 비좁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떨어졌다가는 서로를 잃고 흩어지기 십상이었으니까. 대신 뒤쫓는 마인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조금 거리가 좁혀지더라도 함께 움직이기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아직은 안개뿐이기에 저들의 속도가 그리 늦춰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야만 전사들이 그들을 추격하며 훼방을 놓기야 하겠지만, 선두에 있는 이들이나 최절정의 경지에 오른 탐마각주라면 안개 따위 무시하고 들이닥칠지 몰랐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모두 무사히 말등에 올라탄 것을 확인한 천화가 다시 말을 몰았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고, 방향 감각에 혼선을 주었지만 일단 계속해서 직진을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잘 숨은 뒤 혈마검을 이용해 다른 이들의 위치를 파악한다면 몸을 숨긴 채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천화는 이대로 전사묘까지 단숨에 달릴 생각이었다. 고수들의 감각은 단지 안개만으로 속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만약 저들이 서로를 묶고 천천히 산개하여 전진할 경우 발각 될 확률도 분명히 있으니까.
‘도착했군.’
그렇게 일각여를 더 달렸을 때, 안개가 잠시 걷히며 커다란 비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사묘(戰士墓).
드디어, 전사묘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