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전사묘 (1)2021.03.18.
“워, 워.”
전사묘라고 적힌 비석을 확인하자마자 천화는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아니, 아예 완전히 멈추어선 후 말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무척 위험했으니까. 본격적인 진법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단 한 발자국의 삐끗거림으로 나락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생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도 네 운이겠지.”
마지막으로 말에게 한 줌의 여물을 물려준 천화가 고삐를 잡고 말머리를 바깥 방향으로 돌렸다. 정확히 왔던 방향은 아니지만, 비스듬한 방향으로 달리게 만들어 적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어지간한 기척쯤은 가볍게 지워버리는 무해의 특성상,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 타악 말 엉덩이를 때려 녀석을 달리게 만든 천화는 즉시 몸을 돌렸다. 이제 전사묘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잠시만.”
하지만 천화라고 전사묘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생문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전사묘에 들어갔다면 외우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정식 루트가 알려진 것은 훗날의 일이었으니까. 촤악
“야! 그걸 왜 적셔!”
천화는 전사묘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사묘의 지도에 물을 뿌렸다. 원래는 무해에서 헤매다 보면 저절로 지도가 젖게 되지만, 단순히 지도를 적시기 위해서라면 굳이 그럴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치이이익!
“대체 무슨…….”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도가 충분히 젖어들자 이번에는 화섭자를 꺼내 그을리기 시작했다. ↑↑↑→↓←↑……. 그러자 지도 위에 화살표 모양이 떠올랐다. 화살표 하나가 딱 1장(약 3미터)을 뜻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천화는 그것이 드러나자마자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 발자국 잘 보고 따라와. 삐끗하면, 알지?”
끄덕 침을 꼴깍 삼키며 진지하게 천화의 걸음을 주시하는 설영과 고불의 반응과 달리, 천화는 동네 마실 나가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비석을 지나쳤다. 일 장이라는 거리는 딱 떨어지는 아주 정확한 수치가 아니었기에 알고서도 거리 계산에 실패할 수 있지만, 고인물인 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머리가 계산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정확한 보폭으로 걸음을 이어가며 한 발 한 발, 전사묘를 향해 나아갔다.
‘진짜 새하얗네. 미세먼지라 아니라 다행인가?’
가시거리가 한 1미터쯤이나 될까? 어마어마하게 끼어있는 안개 때문에 눈을 떠도 뜬 게 아닌 상황에서, 천화는 쓰잘데기 없는 잡생각까지 하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언제 끝나는지 모를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지만, 이전에 이곳에 들어섰을 때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으로, 운과 깡으로 돌파했던 그때는 지금 생각해도 참 미친 짓에 가까웠다. 아예 지형을 변화시켜 가며 뚫고 나갔으니까.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그대로 무해를 헤맨 망령이 되었을 뻔했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레드 카펫을 깔고 사뿐 사뿐 걸어가는 수준이었기에, 지루함 따위를 느낄 새도 없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일각, 이각.
“@^*&$!!”
화아아악- 더디지만 착실히 안으로 들어서도 저 멀리서 들려오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안개의 길이 사라졌다. 그런 그들을 맞이한 것은 성처럼 높이 솟은 바위산이었다. 슬쩍 올려보자 바위산의 곳곳에 은근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박혀 있었다. 이곳이 전사들의 무덤임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전사들의 무구들이었다. 검과 도, 창, 부, 곤 등등 각종 무구들이 장식처럼 박혀있었고 다 낡아빠진 거대한 깃발이 박혀 있었다. 그곳이 최종 목적지라는 것은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일단 쉬자.”
“응? 여기서?”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천화. 그 모습을 보고 설영과 고불이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추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굳이 이런 좋지 못한 장소에서 쉬겠다는 것일까?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 아늑한 쉼터가 되어줄 동굴이 눈앞에 있는데 말이다.
“너도 슬슬 반동이 올 때가 됐잖아? 저길 올라가려면 팔이 후들거릴 텐데?”
설영의 물음에 천화는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진법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혈마화를 해제했기에 슬슬 몸에 부담이 올 때가 된 것이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저쪽으로 올라간다고? 동굴이 아니라?”
그리고, 천화가 가리킨 방향은 동굴이 아닌 절벽 쪽이었다. 그런 몸으로 절벽을 타고 오르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깝지 않겠나? 하지만 설영은 황당한 눈으로 되물었다. 아무리 봐도 저 동굴이 산의 정상으로 이르는 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멀쩡한 길을 냅두고 왜 굳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거 바이족 선조들이 한 말인데.”
“어, 음. 멋진 말이네. 아주 철학적이야.”
천화의 헛소리에 설영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가 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기에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천화를 바라보았다.
“명예롭게 죽기 위해 싸우는 놈들에게 뭘 바라? 분명 저 동굴을 통해서도 안으로 진입할 수 있긴 하지만, 그러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할걸? 저 안에 펼쳐진 시련에 대해서는 이 지도도 해답을 주지 않으니까.”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장 무림인들만 하더라도 시대를 풍미한 인물의 무덤에는 수많은 기관진식을 설치해두지 않던가? 소수 민족이라 해서, 야만인으로 치부되는 이들이라고 해서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아니, 천화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확실하겠지. 때문에 설영도 포기한 듯,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천화의 말처럼 혈마화의 반동으로 아까부터 전신이 욱신거리고 있는 것이다.
“어……. 마교 놈들이 그 전에 도착하진 않겠죠?”
하지만 고불은 뭔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진법의 생문을 통해 편안하게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이 근방에 펼쳐진 진법의 위력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일류 고수만 수십에, 절정 고수가 다섯, 그리고 최절정 고수가 하나였다. 어지간한 진법이나 기관 따위는 힘으로 부수고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인 것이다. 사실 틀린 것은 아니다. 마교쯤 된다면 진법에 대해서도 잘 아는 존재가 있을 수 있으니까. 특히 중원 침공을 목표로 힘을 기르는 이들인 만큼, 놈들이 마음먹고 진법을 해제하려면 중원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진법들을 파훼할 수도 있을 터였다.
“뭐, 할 수 있으면 해보라죠.”
그러나 천화는 그야말로 천하태평이었다. 그 역시 저 무해를 힘으로 뚫고 나온 바 있긴 하지만,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마교 놈들은 절대 그리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니까 했던 거지, 나니까.’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데, 어디 감히 일개 마교의 각주 따위가? 설령 인원을 동원해 해제하거나 파훼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단시간 내에 될 수가 없다. 최소 한 달 이상은 고생을 해야 하겠지. 천화로서는 그만큼 시간을 번 셈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푹 쉬세요. 저게 저래보여도 꽤 높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천화는 아예 대자로 뻗어 누워버렸다.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지 뭐! 정상에 오른다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제대로 체력을 회복시켜 둘 생각인 것이다. 드르렁~ 드르렁~ 금방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지는 모습에 설영도 크게 한숨을 푹 쉬더니, 한편에 자리를 잡고 몸을 기댔다. 천화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감을 활짝 열어둔 채 잠시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했다.
“크흠. 그럼 저는 잠시 운기를…….”
둘이 이렇게 나오자 고불이라고 별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슬쩍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마인들과 겨루느라 소모한 내기를 보충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그때, 자는 줄로만 알았던 천화의 코 고는 소리가 뚝 끊기더니 심드렁한 충고가 들려왔다.
“어째서입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전사들의 무덤입니다. 사념과 사기가 잔뜩 모여 있는 곳이죠. 여기서 잘못 운기를 했다가는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별것 아니라는 듯 조언하는 것치고는 무척이나 놀라운 이야기였다. 단지 운기를 하는 것만으로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는 곳이라니? 물론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같은 이유로 공동묘지나 전장 한복판에서 운기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기는 하다. 운기 중에 주변의 사기가 함께 흡수될 수 있기 때문이지만, 실제 그런 상황으로 빠지는 것은 운이 나쁜 극소수뿐이다. 하지만 천화는 지금 마치 확정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믿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시험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휴식을 취하도록 하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운기를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내공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를 머물러야 할지,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도전을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운기를 통해 내력을 회복할 수 없다면 최대한 편히 쉬며 휴식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인근의 바위 옆에 자리를 잡았다.
“넌 괜찮아. 마음대로 해.”
그런 고불을 힐끔 쳐다본 천화는 다시 드러누우며 설영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설영은 운기를 해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아.”
그 말에 고불이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가, 곧 수긍했다. 혈마화를 한 설영을 보았으니까. 혈마기를 진하게 풍기고, 단숨에 무위 상승을 이루어낸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기엔 고불의 식견이 너무 넓은 것이다.
‘흠, 괜찮겠지. 뭐.’
천화는 그것이 살짝 불안했지만 이내 개의치 않고 다시 잠을 청했다. 무림공적. 혈마와 혈마의 후예들에게 찍힌 그 낙인 때문에 대부분의 정파인들은 설영을 보자마자 죽이려 들겠지만, 고불이라면 글쎄. 비무를 청했으면 청했지, 암살을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도 했고, 암습을 가한다 해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전사묘에 한하여 천화가 설영에게 혈마검을 맡기기로 했으니까. 여차하면 운기 도중에라도 혈마검이 혈마기를 저절로 일으켜 설영을 보호할 것이 분명했고, 암습이 실패한 이후에는 고불의 실력으로 설영을 어찌하기 어려울 터였기에 신경을 끄기로 한 것이다.
‘내 코가 석 자이기도 하고.’
좀 더 정확히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일단 자신의 내공부터, 무위부터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당장 이곳에서만 하더라도……. 드르렁~. 푸후!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떠올리던 천화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천화가 다시 일어난 것은 약 세 시진이 지난 후. 등이 배기지도 않는지 꿀잠을 잔 뒤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불을 피우는 건 좀…….”
“뭐 어때? 안개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수통을 꺼내 세수를 하고, 아예 주변의 얼마 없는 잔가지들까지 모아 불을 피우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할 준비까지 했다. 그 모습에 설영과 고불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고작 그 정도에 위치가 특정될 정도였다면 애초부터 금지(禁地)로 불리지도 않았겠지. 천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소지품 창에서 냄비와 식재료들을 꺼내 요리까지 하기 시작했다. 노숙에는 취미가 없다고 말을 했던 천화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질리도록 해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던 말이었으니까. 오히려 요리나 진지 구축 따위의 기본 기술들은 극한까지 숙련도를 올려보았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맛있는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안개가 장벽이 되어 진법 내부로까지는 퍼지지 않을 테지만.
“자, 잘 먹겠습니다!”
그 맛깔스러운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키던 고불이 요리가 완성되자마자 모닥불 옆으로 바짝 붙었다.
“잠깐. 누가 공짜라고 했죠?”
“예……?”
“한 그릇에 은자 한 냥. 싫으면 굶으시든가.”
그런 그에게 천화가 활짝 펼친 손바닥을 내밀었다.
‘와, 이 날강도 같은…….’
기연 동굴과 같은 곳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기연 동굴에서 자신에게 판 것처럼 영물의 고기를 넣은 것도 아니고, 평범한 고깃국 한 그릇에 은자 한 냥을 내놓으라는 천화를 보며 설영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는, 식재료와 요리 기술을 가지고 있는 천화가 갑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