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전사묘의 수호자 (2)2021.03.25.
전사묘의 동굴 안에는 천연의, 그리고 인공적으로 설치된 진법이 몇 개나 펼쳐져 있었다. 타닷 탓 타다다다!! 제 아무리 천화라도 그냥 들어왔다면 고생 깨나 했을 법한 절진들이었지만, 흑우에게는 아니었다.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던 녀석이었기에, 이전의 주인으로부터 진법의 생문을 완벽하게 교육받은 것이다. 그러니 진법의 지독한 효과는 둘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비스듬한 경사를 돌고 돌아 올라가며 흑우가 단숨에 동굴을 달렸다.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잠깐!!”
“……?”
끼이이익!! 그러던 중, 갑작스레 소리치는 천화의 목소리에 흑우가 멈춰섰다. 왜 그러냐는 듯, 살짝 불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천화를 쳐다보았다.
“네가 여기서 먹던 거 있지? 이끼랑 차가운 물. 그게 있는 곳부터 가자.”
“무우! 무우!”
천화의 요구에 흑우가 귀찮다는 듯, 혹은 그것들을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투레질을 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이어진 천화의 한마디에 황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이따 삼겹살 구워줄게.”
“무우웃!!!”
흑우는 방향을 돌려 한걸음에 그리로 달려갔다.
‘나도 참, 이걸 깜박할 뻔하다니.’
천화가 전사묘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미뤄가며 흑우의 먹이였던 것들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싸, 개이득.”
그곳에 영약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도착한 곳은 식수를 길어먹는 작은 우물이었다. 묘지기 역할을 하는 이가 생활을 해야 하는 공간인 만큼, 식수를 길어올릴 공간은 필수인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시범을 보이겠다는 듯, 두레박 줄을 입으로 끌어올리는 흑우를 무시한 채 천화가 어딘가로 향했다. 고작 향을 맡았을 뿐인데 내장까지 얼어버릴 것 같았다. 급히 몸 안에 내공을 휘돌리며 간신히 저항해낸 천화는 그 향을 쫓아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곳에는 우윳빛깔의 액체가 오므린 손바닥만큼 고여 있었다. 공청 석유. 단 한 방울만 마셔도 환골탈태를 할 수 있다는 전설적인 천연의 영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소문과 다르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것 전부를 마신다 한들, 그 정도의 효과를 보기는 어려웠다. 극음의 기운을 가지고 있기에 날름 입을 대었다가는 폐부가 얼어붙어 즉사하고 말 것이다. 충분한 내공을 지닌 상태에서 공청석유의 음기를 중화시킬 또 다른 영약을 함께 섭취한다면 모를까, 북해빙궁쯤 되는 곳에서 익힌다는 극음의 무공을 익히지 않는 이상 그만한 성취를 이루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천화는 걱정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당장은 무리이지만 언젠가 이것을 섭취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질 테니까.
‘조심, 조심…….’
보통의 경우, 영약을 보관하는 특수한 병에 담아 보관을 해야 하지만, 플레이어인 천화에게는 소지품 창이라는 꼼수가 있었다. 손등에 한 방울만 떨어져도 동상에 걸려 손이 바스라질 수 있었기에, 천잠사로 이루어진 비영투에 내공을 담아 손을 보호하며 소지품 창에 공청석유 한 모금이 담긴 병을 소중히 챙겨 넣었다.
“무후?”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공청석유를 챙기는 천화를 지켜보던 흑우가 못 볼 꼴을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 맛대가리 없는 걸 왜 담는담?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혐오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천화는 오히려 녀석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 처먹고도 멀쩡한 저놈이 이상한 거지.’
흑우가 보통 영물이 아니게 된 이유가 바로 이 공청석유를 핥아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고통이야 있었겠지만 어쨌든 살아남았고, 내공 심법을 운기한 것이 아니기에 막대한 내공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말도 안 되는 육체 능력을 얻은 흑우였다.
“가만, 저 혀로 핥았으면 여기 담은 것보다 많이 먹었겠는데? 와, 많이도 처먹었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 천화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흑우를 돌아보았다.
“무?”
아무리 영약을 처먹었어도 어쨌든 소인 주제에 무공을 펼치고, 외공이든 내공이든 가뿐히 견뎌내던 흑우의 능력도 새삼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무신지로에서는 천화가 아닌 다른 고인물의 반려동물이었지만, 그 미친 힘과 맷집만은 천화마저도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자, 이제 정상으로 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천화는 다시 흑우의 등 위에 올라탔다. 흑우를 재촉해 전사묘의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일등인가?”
전사묘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흑우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늘상 다니던 길이니까. 수많은 진법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과한 흑우와 함께 정상에 도착한 천화는,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놀면 뭐하나~.”
설영과 고불이 도착하기 전에, 주변을 돌며 폐품 수집을 시작했다. 후두둑!
“이크!”
하지만 전사묘의 정상에 가득 꽂혀있는 무기들을 수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땅에 박혀있는 그것들을 집어들 때마다 자루가 바스러지고, 검신이 부러지기 일쑤였으니까.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이나 관리를 받지 못하고 땅에 꽂혀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대에 명검이라 불리던 것들이라도 이 정도로 방치가 되면 쇳덩어리 수준으로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화는 그것들을 조심스레 뽑아 소지품 창에 넣어두었다.
‘모아두면 다 써먹을 데가 있지.’
무기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차후 소수 민족들과의 협상이나 보상을 얻어내는 데에는 쓸모가 있으니까.
“쩝. 이건 챙기기 힘들겠군.”
또한 무공 비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수 민족의 무공 비급은 중원의 것처럼 혈도와 내공에 대한 깊은 이해 대신 몸을 쓰는 방법과 몸을 단련하는 방법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이를 정리한 책자는 아주 얇았다. 그러나 책자를 이룬 종이나 가죽의 재질과 관리 상태가 영 좋지 못해서, 그야말로 손대는 순간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천화는 그중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것들을 골라 소지품 창에 챙겨두었다. 특히 비급의 경우, 조금이라도 훼손되었을 경우 그 가치가 반감하거나 뭔가 빠진 채 익힐 경우 주화입마 등 오히려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건질 수 있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우, 무우!”
“응? 따라오라고?”
그때, 가만히 천화가 내어준 음식과 술을 먹어치우던 흑우가 다가와 투레질을 했다. 그러더니 천화를 이끌고 어디론가 앞장서서 이동했다.
“오, 이건……?”
그곳에는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비급들이 널려 있었다. 잔뜩 바래고, 몇 장은 서로 붙어있긴 했지만 잘만 복원하면 모두 정상에 가까운 상태라 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썩 괜찮았다.
‘설마 이걸…….’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확인하던 천화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비급들이 흩어진 모습이나 누군가 침을 듬뿍 묻혀 넘긴 것 같은 흔적까지. 모두 흑우가 이것들을 보고 익혔다는 정황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 누구냐!!”
그때, 경계 어리고 날 선 목소리가 천화를 위협했다.
“응? 벌써 왔어?”
다름 아닌 설영의 것이었다. 좀 더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한 것이다.
“천화?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암벽 등반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오르겠다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을 몰랐던지, 설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쩐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더 쉬운 길이 있었고, 천화가 그것을 혼자서만 이용한 것 같다는 생각.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괜스레 뾰로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우?!”
그때, 설영과 고불을 발견한 흑우가 크게 흥분했다. 콧김을 크게 씩 내뿜더니 그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소? 대체 무슨……!!”
그 사나운 기세에 설영이 먼저 반응했다.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흑우를 향해 혈마검을 뻗어낼 준비를 했다.
“헛?!”
그러나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천화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기에 죽이기를 망설인 탓도 있지만, 설영의 예상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로 지척까지 파고든 것이다.
“크윽……. 응?”
그러나, 그대로 들이받힐 줄 알고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던 설영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흑우는 기세를 낮춘 채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며 머리를 부벼대는 것이다.
“그, 그래. 착하다.”
뒤늦게 당황한 설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녀석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부르르르- 그러자 흑우가 기분이 좋은지 잘게 몸을 떨어댔다.
“와, 얼굴도 안 보일 텐데 그걸 아네.”
그 모습을 보며 천화가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녀석이 좋아하는 것은 술과 고기, 그리고 예쁜 여자였으니까. 암컷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예쁜 인간 여성의 손길을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설영이 여자라는 것을, 또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는 것을 어떻게 단번에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고도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그 돌진에 부딪혔으면 설영이라 하더라도 크게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 어쩌면 절벽 아래로 튕겨나갔을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과연, 그래서 영물인가?!”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천화가 감탄하는 사이, 흑우는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며 설영에게 애교를 부려댔다.
“헉?!”
번뜩! 그때, 고불이 신기했는지 자신도 흑우를 만져보려다가 엄습해오는 살기에 움찔 몸을 떨었다.
주인도, 아름다운 여성도 아닌 그가 감히 자신을 만지려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섬뜩한 살기를 날린 것이다. 그것도 일류 고수조차 헛바람을 집어삼키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살기를.
“그, 그래. 안 만질게…….”
결국 겁을 먹은 건지, 마음이 상한 건지 시무룩해진 고불이 흑우에게서 물러섰다. 좋은 선택이었다. 대전사의 붉은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어찌 되었든 절벽을 올랐으니 이곳에 있는 것까지는 인정을 해주겠지만, 함부로 흑우에게 다가섰다가는 들이받힐 수도 있었으니까.
“적당히 하고 이쪽으로 와.”
그때 천화가 상황을 정리했다. 흑우를 진정시키고 설영과 고불은 자신의 쪽으로 불러들였다. 어쨌든 그들 역시 전사묘에 올랐으니 합당한 보상을 챙겨야 하지 않겠나?
“여기가 전사묘란 말이지? 으흠, 생각보다 썰렁한데? 절벽에 꽂혀있던 무기들보다도 수가 적어 보여.”
“크흠.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보다 이거 받아.”
설영의 짧은 감상에 찔리는 게 있었는지 천화가 헛기침을 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비급 중 하나를 집어 고불에게 던져주었다.
“너 하나, 너 두 개. 나……. 다섯 개!”
다시 설영에게 두 개를 던져주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전부를 자신이 챙겼다.
“그게 무슨 셈법이야?”
“왜? 진법도 내가 뚫어, 여기 올라오는 방법도 내가 알려줘, 제일 먼저 온 것도 나야. 이 정도면 다섯 개쯤 먹어도 괜찮잖아?”
“그건…….”
그 황당한 셈법에 설영이 뭔가 불만을 토로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천화의 말 중에 틀린 것이 없으니까. 당장 천화가 아니었다면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을 테고, 진법에 걸려 헤매고 있지 않았겠나? 어쩌면 마교인들과 혈전 끝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은 천화에게 업혀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두 개, 아니 한 개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그때, 가장 먼저 비급을 받아든 고불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유성창법. 천화가 고불에게 건넨 것은 유성창법이라는 무공의 비급이었다. 그가 익힌 칠성무와 비슷하게 떨어지는 유성을 본떠 만들어진 아주 위력적인 창법이자, 한때 소수 민족 출신으로 강호를 질타했던 유성신창 백무의 무공인 것이다.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잘만 연구한다면 칠성무의 창법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도 있을 만큼 수준 높은 무공임에 틀림없었다.
‘혹시?’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설영이 받아든 비급을 살펴보았다. 근육단련법. 불굴.
“이게 뭐야?”
이름부터가 뭔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비급들이다. 확실히 중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 것일까? 설영이 불안한 마음으로 펼쳐보자 단출하지만 꽤 세밀한 내용들이 나타났다. 근육단련법. 그것은 말 그대로 근육을 단련하는 방법이었다. 이름은 단순하고 얄팍해 보이지만, 근육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는 수련법이 거기 있었다. 단순히 울긋불긋하게 튀어오르는 근육뿐 아니라 몸을 쓰는 데 최적화된 잔근육을 만드는 법까지 말이다. 내공에 비해 육체 능력과 내구력이 떨어지는 설영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굴. 그것은 일종의 심공이었다. 내공 심법도, 무공 초식이 적힌 비급도 아닌 정신 수양을 위한 공부랄까. 야만인으로도 불리는 소수 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들이 외공에 치우친 힘만으로 중원인들과도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이유는 그 정신력에 있었으니 쉽게 볼 것은 아니었다. 이 역시 자칫하면 혈마검에 정신까지 먹혀버릴 수 있는 설영에게 필요한 공부였지만 당장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설영은 떨떠름해하면서 그것을 품에 챙겨넣었다.
‘하지만 진짜는 이거지.’
그사이 천화는 혹여 제목이라도 드러날까 조심스레 자신이 챙긴 다섯 권의 비급을 소지품 창에 잘 넣어두었다. 한 칸씩을 차지한 그것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