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전사묘의 수호자 (3)2021.03.28.
일부 훼손되어 위험한 것들을 제외하고, 건질 만한 비급은 총 8개였다. 그중 고불에게 하나를 주고 설영에게 두 개를 주었는데, 마침 그것들은 그 둘에게 딱 맞는 무공들이었다. 여러 무기를 사용하는 고불이야 그것 하나만으로 무공 전체를 뜯어고치거나 보완하기 무리였지만, 하나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무위의 상승을 이룰 수 있었기에 적잖은 이득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설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영에게 부족하던 심공과 육체단련법을 얻었으니, 잘만 익힌다면 일류 급 중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상태가 될 터였다. 하지만 진짜 이득을 취한 것은 역시 천화였다. 설령 둘에게 맞는 것이 있다 한들 양보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전에 얻은 건 이 중 두 개뿐이었지.’
그리고 그 다섯 개의 비급 중, 무신지로를 플레이할 당시 천화가 얻은 것은 두 개였다. 고금제일인 천화를 만들어준, 자유분방한 무공의 기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꽤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고. 이미 경지에 오른 이들이 본다면 별다른 이득을 취할 수 없는 기본공 같은 것이었지만, 소수 민족 무공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천화는 그것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하지만 비급이 전부는 아니다. 흑우가 모아놓은 것 중에는 비급뿐 아니라 무기들도 제법 있는 것이다. 검과 도, 창, 부 등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이 저마다 아직도 시퍼렇게 날을 빛내며 남아있었다. 지금까지 천화가 회수한 것들이 기껏해야 ‘명검’의 축에 드는 것이라면, 이것들은 ‘보검’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인 것이다. 물품 등급으로 따지자면 최소 ‘희귀’에서 유일 등급의 무구들. 아쉽게도 ‘패왕’이나 ‘전설’ 등급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하나가 일개 현이나 성 정도에서는 거센 피바람을 일으킬 수준은 되는 것이다.
“꿀꺽!”
때문에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무구들을 바라보는 설영과 고불이 꼴깍 침을 삼켰다. 내심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경매를 할 시간이군.”
“……뭐?”
“경매라고?”
하지만 천화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경매라니? 갑자기? 이것도 나누는 것이 아니었나?
“왜, 뭐.”
살짝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천화는 당당하게 그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여기서 더 바라는 게 오히려 염치없는 것이 아닌가? 꿀릴 것도, 민망할 것도 없기에 턱을 들고 당당히 묻자 할 말이 없어진 것은 그들이었다.
“좋아. 네가 없었으면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들이니까. 얼마를 원하는 거야?”
“흐흐흐. 세월이 흘렀음에도 영롱한 이 자태를 봐. 이게 보통 무기들이겠어? 딱 봐도 어?”
“그래서 얼마냐구.”
“크흠. 딱 금자 오십 냥만 받을 게. 하!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약해요.”
금자 오십 냥이면 은자 일천 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당장 설영이나 고불의 수중에 그런 큰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기에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설영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싸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뛰어난 검이었으니까. 당장 이곳을 벗어나면 다시 혈마검을 천화에게 넘겨주어야 할 터이기에, 설영은 큰 맘 먹고 검 한 자루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좋아. 그럼 난 이걸로 할게.”
“잠깐! 건드리지 마. 함부로 손을 놀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안 배웠어?”
“왜, 또!!”
“경매라니까. 다른 쪽의 얘기도 들어봐야지?”
천화의 눈빛이 고불을 향했다. 경매를 한다고 이야기했으니, 고불이 상위 입찰을 한다면 이것을 가져갈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만한 돈이…….”
그러나 고불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가진 돈이 많지도 않았던 데다 비무행을 하며 계속해서 자금을 소모해야 했다. 특히 이곳에 온 뒤로는 소수 민족과 친해지기 위해 고기와 술을 사서 베풀기도 한 까닭에, 금자 오십 냥은커녕 이제 수중에 금자 한 냥도 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담보도 받는다구?”
하지만 천화는 끝까지 그를 꼬드겼다.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설영이야 이곳을 나가서도 함께 다닐 테니 외상이 가능하지만, 방랑자에 가까운 고불과는 헤어질 테니 신용 대출은 어렵고 대신 비슷한 가치의 물건을 담보 잡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고불이 내놓을 수 있는 것들 중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담보라니, 나는 그만큼 가치 있는 걸 가지고 있지…….”
“영약이라든가, 영약이라든가, 영약 같은 것?”
칠성신단. 천화가 요구하는 것은 분명했다. 언젠가 비무의 승리 보상으로 내걸려 했던 칠성신단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물론 담보로 잡는 것인 만큼, 돈을 갚으면 돌려주어야 하기에 그가 걸어도 당장 먹어치울 수는 없겠지만, 천화는 자신 있었다. 고불이 돈을 갚지 못하리라는 자신이!
‘낭인왕 시절에도 왕창 벌어서 펑펑 쓰던 녀석이니까.’
정확히는 자신이 펑펑 썼다기보다 돈이 줄줄 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만 말이다. 따지고 보면 청부업자인 낭인의 신분인 주제에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 기껏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벌어들인 돈을 몽땅 허공에 흩뿌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천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고불을 부추겼다.
“어이쿠! 여기 마침 창도 있고 수투도 있네? 오오, 이 신발은 뭔가 특별한걸? 앞꿈치에서 철침이 튀어나오는 구조인가? 이건 녹여서 비도를 만들면…….”
무구들을 마구 집어들며 물품 설명창에 나타나는 정보들을 마구 읊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넘어와라 쫌. 어차피 너한텐 필요도 없잖아.’
일종의 호객 행위였다. 고불이 익히고 있는 칠성무에 대해서도 꿰고 있는 천화였기에 그 활용처까지 정확히 짚어내며 고불을 구슬렸고, 고불도 크게 흔들렸다. 칠성신단이 귀하기는 하나, 이 정도 수준의 무구 또한 구하기 어려웠으니까. 게다가 칠성신단은 무려 최대 20년 내공을 증진시켜 주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낮은 수준의 무인이 섭취를 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낮은 수준에서는 일단 기운의 크기만 불리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아쉽게도 칠성신단에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있기 때문에 일류 이상의 무인이 섭취할 경우, 내공이 불안정해지거나 안정화를 위해 상당한 기운을 유실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당장 고불이 먹어봐야 제대로 효과를 보기도 어려운 특이한 특성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그러니 영약을 가지고도 있음에도 고불이 아직까지 섭취하지 않은 것이고 말이다.
‘약간의 비밀이 숨겨져 있지만 모르면 꽝이지 뭐.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쓰는 게 낫지 않겠어?’
물론 거기에는 천화만 알고 있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그럼……. 칠성신단을 담보로 잡으면 얼마를 융통해 줄 수 있어? 그리고 후에 되찾고 싶다면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어디 보자, 칠성신단이라는 게 20년 내공을 주는 영약이라고 했지? 그러면…… 좋아. 까짓 것, 기분이다. 내가 금자 300냥까지 쳐주지! 시간과 장소는 일 년 뒤, 천하상단 낙양지부!”
결국, 고민하던 고불이 반쯤 넘어왔다. 아니 완전히 넘어왔다. 칠성신단의 가치를 물어본 순간부터 이미 그의 마음은 결정이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지금의 말은 그저 천화에게 등 떠밀어 달라 신호를 보내는 것에 다름없었다. 그래서 천화는 값을 넉넉히 쳐주었다. 그래야 갚지 못할 것 아닌가? 약간은 치사한 수작이었지만 어쨌든 거래는 정당한 것이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크흠. 그렇다면…….”
결국 마음을 정한 고불이 주섬주섬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교인들과 싸우며 잃어버린 창부터 특수한 금속이 박힌 수투와 철침이 튀어나오는 신발, 철퇴가 부럽지 않은 유성추, 녹여서 비도를 만들면 수십 개는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쇠봉,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영이 노리던 보검까지 모두 여섯 개의 무기를 골라 차곡차곡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오호, 금자 300냥치 전부?”
“크흠. 그래. 일 년 뒤, 천하전장 낙양지부라고 했지?”
덕분에 보검을 노리고 있던 설영이 사납게 노려보긴 했지만 고불은 시선을 회피하며 그것들을 챙겼다. 그리고 반드시 돈을 갚고 칠성신단을 되찾겠다는 듯, 약속 장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맞아, 맞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 아니 고객님!”
“그럼 나는?”
이렇게 되자 설영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꼬우면 돈을 가져오든가! 아직 이전에 검을 구입할 때 빌렸던 돈의 원금도 제대로 갚지 못한 설영이었기에, 볼을 부풀리기는 해도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칠성신단을 천화에게 넘기고 물건을 가져간 고불만 얄밉다는 듯 째려볼 뿐이다.
‘결국 돈을 번 사람은 아무도 없지.’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고불이 천화에게 금자 30냥을 빌려 그것들을 모두 구입한 셈이었지만, 실제로 돈이 돌지는 않았다. 금자가 실제로 오가는 대신 말로만 돈을 주고받은 까닭이다. 결국 천화는 공짜로 얻은 무구들은 고불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칠성신단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나중에 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남의 것을 팔아 영약만 하나 더 얻은 것이다.
‘유성창법의 비급을 팔아치워도 적잖은 돈을 얻을 수야 있겠지만, 어차피 그 정도 창법이야 나한테 특별할 건 없으니까.’
당장 내공의 수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천화에게 있어 영약보다 귀중한 것은 없었으니, 유성창법의 비급쯤은 서비스로도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좀 쉬자.”
“뭐? 설마 이게 끝이야?”
그렇게 전리품에 대한 배분을 마치자 설영이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전사묘라면 나름 소수 민족들에게는 전설 같은 장소인데 고작 비급 몇 권과 무기 몇 점으로 끝이라니, 왠지 아쉬웠던 것이다. 물론 하나하나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 데다, 꼭 필요한 것들이기에 고작이라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고작 무덤에 뭐가 더 있을 줄 알았어? 금은보화? 뭐, 황제의 능이나 중원에서 이름을 날린 천하제일인의 무덤 따위라면 도굴할 만한 뭔가가 나올 수도 있긴 하겠네. 근데 여긴 그런 거 없어. 이게 전부야. 적어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말이지.”
게다가, 가지고 나갈 수 없는 것 중에는 적지 않은 가치를 지닌 것들이 조금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수련을 위한 도구와 장치들. 야만인이라 불리는 소수 민족의 것이기에 투박하기 짝이 없는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중원인들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소수 민족 대전사들의 수련 도구인 만큼 그 효과만은 탁월했다. 물론 그것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들 민족 특유의 강골과 빠른 회복력 등이 필요하겠지만 그것 또한 어떻게든 해소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그럼 여기서 쉬었다가 떠나는 건가?”
“아니? 안 나갈 건데?”
설영의 말에 천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러면…….”
그 모습을 본 설영이 뭔가 말을 덧붙이려다가 머뭇거렸다. 지금 밖으로 나갔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뻔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밖에는 자신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마인들이 득실거릴 테니, 진법을 나서는 순간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혹시 이번에는 탈출구가 없는 거야?”
그 점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천화가 이번에도 다른 출구를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 설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만약 저번의 지하수로와 같은 별도의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자신들이 마교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놈들이 소수 민족 마을을 공격할 때 보였던 전력 정도라면, 그리고 운이 좋아서 소수 민족의 대전사들이 그들의 일부를 더 쓰러뜨려서 약화된 상태라면 한 가닥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자마자 탐마각주라는 자를 만난다면, 혹은 오히려 적이 증원을 했다면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일 터였다. 천화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설영의 표정이 까맣게 죽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
“뚫고 나가면 그만이거든.”
하지만 다른 방도가 있다는 듯, 천화가 씨익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뭔가 불길한 그 웃음에 설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천화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야.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꿀은 제대로 빨고 가야지.”
그런 설영에게 천화가 다시 한 번, 이곳에서 당장은 나가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마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오래 머무르기 어려운 곳이긴 하지만, 그건 소지품 창에 담긴 음식들로 어느 정도 해소가 가능하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 소지품 창 가득 음식들을 쌓아온 것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수련의 기회를 포기하고 나가는 것은 꽤나 아까운 일이었다. 마교의 추적과 수색이 잠잠해질 때쯤, 그리고 소문을 접한 정파의 무인들이 슬슬 이곳으로 몰려들 때쯤 천화는 이곳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제대로 몸을 만들어 두어야겠지. 길을 뚫는 것쯤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후를 생각하면 이곳에서 수련의 기초를 다져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자, 따라와. 너희를 헬스의 세계로 인도해주지.”
“……?”
처음 듣는 단어에 설영과 고불이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지만, 천화는 설명 대신 그들을 이끌고 흑우와 함께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