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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남만야수궁 (3) (315/481)

<71화> 남만야수궁 (3)2021.04.18.

배시시~ 흠칫! 두 여인, 아니 한 소녀와 암컷 한 마리가 미소를 짓자 천화와 흑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심지어 흑우는 그 좋아하는 술과 고기가 잔뜩 놓인 잔칫상 앞에서도 깨작깨작 눈치를 보며 입을 놀릴 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꽤 많은 양이긴 했지만, 작정하고 달려들었다면 한 상에 올려진 음식쯤은 녀석 혼자서도 벌써 모조리 입안에 쓸어담고 말았을 터였기에 천화의 눈에는 흑우의 식욕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16586677240734.jpg“서방…… 아니, 공자님.”

16586677240742.jpg“예, 옙?”

16586677240734.jpg“많이 드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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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화라고 딱히 상태가 다르지는 않았다. 세주연의 눈빛이나 말투, 행동으로 보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16586677240742.jpg‘아마 머릿속에서는 벌써 혼례를 올리고 있겠지. 끄응.’

모태솔로. 세주연은 모태솔로였으니까 말이다. 세주연의 나이 자체가 애초에 그리 많지 않고, 이 세계는 자유연애가 공공연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일단 저 무시무시한 야수궁주가 애지중지하는 딸과 감히 정을 나누려는 이가 이곳 남만에 있기나 할까? 세주연의 취향이 아닌 것을 떠나서 그 자리부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어리긴 해도 실제 미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귀엽게 예쁜 외모이기에 영물과 인간 모두가 예뻐해주기는 하지만, 묘한 공허함이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

16586677240742.jpg“크흠.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16586677240734.jpg“아, 그럼 저도…….”

결국 그 눈빛이 부담스러운 천화가 먼저 자리를 떴다. 세주연도 함께 일어나려 했지만, 천화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홀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16586677240781.jpg“무우우!”

흑우가 자신도 데려가라며 헐레벌떡 뛰어왔고, 둘은 궁전 같은 야수궁의 난간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16586677240787.jpg“흐흐. 재미있게 즐기고 있나?”

그런 천화에게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야수궁주 세주안이었다. 천화를 따라 나온 것인지 그 역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16586677240787.jpg“그래, 이곳 남만에는 얼마나 더 있을 참인가?”

16586677240742.jpg“글쎄요.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만, 수행을 쌓으러 온 것이니 일단 만족할 만큼 강해져야겠지요.”

16586677240787.jpg“사내가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멋진 일이지. 혹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게. 이제 우린 친구가 아닌가?”

이 잔치가 끝나면 야수궁의 우호도가 크게 상승하며 관계가 한층 더 깊어지리라는 것은 천화도 예상하고 있었다. 야수궁은 그런 곳이니까. 그렇기에 그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받아 마시고 있었고. 워낙 도수가 높은 것들이 많아 중간중간 내기를 끌어올려 주독을 몸 밖으로 빼내야 했지만, 일단 반쯤 취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했기에 평판이 하락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야수궁주에게 고민이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16586677240742.jpg“물론입니다. 친구에게 무슨 말이든 못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그러니 궁주께서도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하시지요.”

16586677240787.jpg“형님.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르게.”

천화가 슬쩍 운을 띄우자, 세주안은 천화가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호칭까지 정정했다. 하지만 천화는 그것이 단지 친근감의 표시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 천화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다. 천화가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사위로 맞아들이는 것은, 딸아이를 다른 이에게 보내는 것은 또 다른 마음이지 않겠나? 아무리 남만과 중원의 혼인 연령이 낮다 한들 아직은 세주연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그였기에, 형님과 아우라는 관계를 통해 나름대로의 선을 긋고 싶은 것이다.

16586677240742.jpg“예. 형님.”

이전에도 겪어본 일이기에 천화는 덥석 그것을 받아물었다. 세주연의 미모가 범상치 않은 수준이긴 하지만, 천화는 이곳에서 어떤 여인과도 혼인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은 돌아갈 사람이니까. 게임이라면 모를까, 정말 이것이 현실이라면 누군가를 남겨두고 떠나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국지색에 비할 정도의 미모를 지닌 설영과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던 것이고.

16586677240742.jpg‘그리고 세주연이랑 엮였다가는 부부싸움에 맞아죽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세주연의 괴력과 배경 등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16586677240787.jpg“좋아. 아우가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한 가지 부탁을 하지. 원래는 잔치가 끝난 뒤 천천히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만…….”

16586677240742.jpg“말씀하시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습니다.”

그 호방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주안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디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16586677240787.jpg“최근 남만에 골칫덩이들이 생겨나고 있다네.”

16586677240742.jpg“골칫덩이요?”

사실 천화는 세주안이 무슨 말을 꺼낼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도 맞장구가 있어야 더 할 맛이 나는 법이기에, 짐짓 모르는 척을 하며 추임새 같은 대꾸를 했다.

16586677240787.jpg“그래.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른 영물들을 괴롭히는 포악한 영물들이 출현한 게지. 마을을 파괴하고 농작물을 망쳐놓는 것은 물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잡아먹기까지 한다네. 같은 영물들의 피와 살을 씹고 내단을 삼키는 일도 비일비재하지.”

16586677240742.jpg“사악한 놈들이군요.”

16586677240787.jpg“그래. 생각 같아서는 당장 놈들을 쫓아 쳐죽이고 싶지만, 우리의 율법 때문에 그것이 좀 어렵다네.”

16586677240742.jpg“영물이기 때문이군요.”

씁쓸한 표정을 짓는 세주안을 향해 천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물을 우대하는 야수궁의 율법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난리를 피워도 나서서 쳐죽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야수궁주라 하더라도 율법 아래에서는 평등했으니까. 그들에게 직접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기르는 영물을 해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남만에 서식하는 다른 영물들을 공격할 수 없는 것이다. 반격은 가능하지만 선제공격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16586677240787.jpg“알고 있다니 말이 편하겠군. 자네 말처럼 우리는 먼저 영물들을 공격할 수 없지. 저들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고. 나름대로 유인책도 사용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네.”

문제는 저 악물들이 야수궁의 고수가 나타나면 어떻게 알았는지 잔뜩 몸을 사리고 공격해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변장을 해봐도 마찬가지고, 내공을 갈무리해 기운을 감추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영물들은 기감도 뛰어나지만, 동시에 본능적인 감각이 크게 발달한 놈들이니까. 상대에게서 풍기는 위협적인 기질을 파악하고 먼저 몸을 피하거나, 굳이 선공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16586677240742.jpg‘영악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아무리 영물이라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 그들의 율법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이상,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피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반대로 남만인들로서는 답답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고.

16586677240742.jpg‘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지.’

그렇기에 천화가, 설영과 흑우가 필요한 것이었다. 남만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영물들을 상대 할 수 있는 인물이 말이다. 게다가 남만의, 야수궁의 문화와 율법을 꽤나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만한 적임자가 또 없었다.

16586677240742.jpg‘중원 무림 출신이 전혀 발을 들이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에게 부탁하긴 무리지.’

물론 남만은 그 특유의 기후적, 생태계적 특성상 농림업을 성장시키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중원에서 흘러들어오는 상인 무리는 제법 많았다. 그들이라고 채집과 사냥만으로 먹고 살기는 어려웠기에 매달 정기적으로 상행을 꾸리는 상단도 몇 개나 있었고, 그들을 따라오는 호위무사나 표사들 중에는 고수 소리를 들을 만큼 상당한 무력을 갖춘 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16586677240742.jpg“그래서 남만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제가 나서기를 원하시는 거군요. 하지만 왜 저입니까? 다른 중원 무림인들도 많지 않습니까?”

16586677240787.jpg“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

다 알면서도 예의상 되묻는 천화의 말에 세주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천화의 말처럼 남만에 드나드는 중원인 중 무인들도 제법 많았지만,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영물들이 꺼려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악물들의 처리를 맡기려는 것인데, 당장 선하디선한 영물들까지 그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면 자칫 오인 사살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중원인들은 탐욕스럽다는 세외 특유의 고정관념이 있다 보니 믿고 맡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만약 오해를 빌미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일반 영물을 악물로 규정하여 사냥하고, 그 부산물과 내단을 차지하려 든다면 어떻게 되겠나?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야수궁의 고수가 따라붙자니, 그랬다간 악물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유로이 방치하자니, 그들이 작정하고 속이려 든다면 일일이 잡아내기 어려운 것이다.

16586677240787.jpg“속내를 알 수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약하지. 피해가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리 만무하기도 하고, 그놈들이라면 그걸 빌미로 무엇을 요구할지도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약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오만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세주안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절정조차 초월한 그의 무력이라면 능히 무림 십대 고수라 불리는 이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이니까.

16586677240742.jpg‘세주안이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실제가 그렇기도 하고.’

또한 실제 전력을 비교해보아도 그렇다. 당장 악물이라 부를 수 있고, 야수궁의 고수들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놈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일류 고수급의 무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고작 호위무사나 표사 따위를 하는 이들이라면 전력상으로도 무리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그들 역시 일류 수준의 무인들을 모아올 수 있지만, 어찌어찌 피해를 감수하고 사냥에 성공한다 해도 문제다. 그들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테고, 그것이 다소 무리한 것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자칫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 남만야수궁과의 교류가 끊어질 수도 있지만, 일단 남만인들은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이들이니까. 호감도가 다소 낮아질 수는 있어도 교류가 완전히 끊어질 염려는 없고, 일단 요구한 것을 어지간하면 거의 다 들어줄 것이 분명했기에 이용해먹으려는 자들이 많을 터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세주안이 천화에게 직접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다.

16586677240742.jpg‘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겠지.’

흑우를 예뻐한 것은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천화에게 강한 친밀감을 보인 것이나, 그들을 단번에 친구로 받아들이기 위한 잔치를 연 것은 모두 이런 복합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감정만으로 움직이기에는 야수궁주라는 자리가, 남만의 통치자라는 자리가 가볍지 않으니까.

16586677240742.jpg“그렇다면 다시 물어야겠군요. 왜 저입니까? 저는 고작해야 이류 수준의 무인밖에 되지 않는데요.”

16586677240787.jpg“흐흐.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기에 천화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상단과 함께 들어오는 호위무사들조차 약하다고 생각하는 그가, 왜 이류 무인밖에 되지 않는 천화에게 이 일을 맡기려는 것일까?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능글맞은 웃음뿐이었다. 설마하니 천화가 고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16586677240742.jpg‘흐음. 뭔가를 보기는 했다는 건데.’

대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천화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만약 세주안이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면, 중원 무림의 다른 누군가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니까.

16586677240787.jpg“자네에게는 뭔가 특별한 냄새가 난단 말이지. 그런 이를 단순히 내공 수위로만 판단할 수 없지. 게다가 흑우 녀석 정도라면 남만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능력을 지녔고, 자네 친구 역시 중원 무림의 견제를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16586677240742.jpg“……예?”

그러나 세주안은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대신 늘어놓은 이야기들 중 마지막 말에 다시 한 번 천화가 흠칫 놀랐다. 설영이 중원 무림의 견제를 받는다는 말. 그 말이 마치, 설영이 혈마의 후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들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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