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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남만야수궁 (4) (316/481)

<72화> 남만야수궁 (4)2021.04.20.

설마 그녀가 혈마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일까? 아무리 남만과 중원이 같지 않다지만 혈마에 대한 악명은 그 역시 수없이 들어보았을 터였다. 거의 살인귀로 묘사된 그 소식의 일부만 들었더라도, 문제를 삼거나 구금이라도 하려 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16586677297054.jpg‘설마 협박하려는 건가?’

물론 세주안이 그런 인물은 아니긴 하지만, 천화는 순간 긴장했다. 남만에, 야수궁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니까.

16586677297061.jpg“긴장할 것 없네. 어찌 친구를 겁박할 수 있겠나. 자네의 친구가 혈마든, 천마든 나는 개의치 않을 걸세. 이것을 빌미로 자네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생각도 없어. 저런 짙고 정순한 기운을 지닌 이를 어찌 악인이라 부를 수 있겠나. 중원 놈들의 눈이 삔 게지. 아니면 질투에 눈이 멀었거나.”

16586677297054.jpg“아…….”

세주안의 다음 말에 의심은 현실이 되었다. 혈마에 대한 언급을 하며 슬쩍 천화를 내려보는 그의 눈은 이미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586677297054.jpg‘혈마기가 의외로 정순하기는 하지.’

아마도 도가에서 시작된 혈마기의 기운이 무척 정순하기 때문인 듯싶었다. 타인, 혹은 타 생명체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사악하다 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정제하여 받아들인 혈마기 자체는 무척이나 깨끗한 것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지저분해서 그렇지. 영물들과 친구 먹는 이들이다 보니 미모와 함께 기운의 기질까지도 판단하는 모양이다.

16586677297061.jpg“그 정도 무력이라면 충분히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네. 지금이라면 몰라도, 그녀가 그 검을 들고 있다면 어지간한 영물들은 상대가 되지 않겠지.”

혈마기에 이어 혈마검까지? 안목인지 기감인지, 그도 아니면 본능적인 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주안의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다. 천화는 둘러대봤자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86677297054.jpg“좋습니다. 도와드리죠.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16586677297061.jpg“조건?”

피할 수 없다면 이용해 먹는 수밖에. 애초에 악물 사냥은 천화가 처음 이곳 남만을 목적지로 잡는 순간부터 고려하던 중요한 임무이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6586677297054.jpg“조건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하네요. 준비를 위해 약간의 도움이 필요할 뿐입니다.”

16586677297061.jpg“하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주지. 무엇이든 말만 하게! 율법에 어긋나지만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터이니!”

호탕하게 웃는 세주안을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왕 부탁을 받은 거, 뽑아먹을 수 있는 것은 확실히 뽑아먹어야 하지 않겠나? 미리 생각해둔 것들을 세주안에게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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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물 사냥][지역 임무] 남만 땅에 서식하는 사악한 영물들을 퇴치하십시오. 남만인들의 골칫거리인 그들을 퇴치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성공 조건 : 악물 퇴치 0 / ? - 성공 보상 : 퇴치한 악물의 수와 수준에 따른 차등 보상 - 달성도 : 0% 악물 퇴치 의뢰를 받아들이면서 떠오른 임무창의 내용은 간단했다. 악물을 처단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겠다는 것. 평범하다면 평범한 임무였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16586677297054.jpg‘평범한 단순 반복 임무 같지만 실상은 좀 다르지.’

잘못 되었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식으로, 얼마큼 임무 달성도를 채우느냐에 따라 임무의 중요도와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16586677297054.jpg‘적당한 악물들만 처치하면 약간의 보상과 우호도 상승에 그치겠지만…….’

그저 깨작깨작 처치하기 쉬운 몇 마리의 악물만 사냥한다면, 야수궁의 우호도가 오르고 금전과 영초 등 약간의 보상을 얻는 것에 그친다. 물론 운이 좋다면 영물을 분양 받는 것도 가능하긴 하겠지. 그러나 이 임무의 진짜 가치는 ‘제대로’ 임무를 수행해냈을 때 드러난다. 세주안이 굳이 자신을 골라 이 임무를 맡긴 이유를 파악하고, 근심의 근원을 해결해주어야만 비로소 진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6586677297054.jpg‘차곡차곡 모든 악물들을 퇴치할 필요도 없이 100%를 채울 수 있는 데다, 제대로 해낸다면 아예 무림의 판도를 바꿀 수 있게 되니까.’

또한 [지역 임무]에 국한되던 것이 [중요 분기 임무]로까지 변하게 된다. 일단 중요라는 표현이 붙은 것부터가 남만 땅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인 데다, 지역이라는 표현이 빠지고 분기 임무가 됨으로서 남만뿐 아니라 중원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악물들에 골치를 썩느라 남만에 쳐박혀 있던 야수궁이 중원에 진출하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당연히도 골칫거리를 해결해 준 천화의 아군으로서. 게다가 모든 악물을 처리하지 않더라도 달성도 100%를 넘어 최대 120%까지도 기록할 수 있었다.

16586677301405.jpg“좋겠네. 그렇게 예쁜 아이가 좋아해주고.”

16586677297054.jpg“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16586677301405.jpg“그 야수궁주의 딸. 세주연이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야수궁을 빠져나와 악물들을 찾기 시작했을 때, 설영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천화에게 살짝 빈정거렸다. 그녀 역시 세주연이 천화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16586677297054.jpg“어린애인데 뭐.”

16586677301405.jpg“어린애는 무슨. 몇 년만 있으면 금방 자랄 텐데. 게다가 야수궁주의 딸이면 배경도 좋고, 귀엽게 생기기도 했고. 그 아이의 마음만 받아주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텐데 탐나지 않아? 잘 하면 차기 야수궁주가 될 수도 있잖아.”

야수궁의 율법과 성향을 잘 모르기에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외부인이라도 남만인과 혼인을 한다면, 또 이미 야수궁주의 형제로 인정받았으니 이곳에서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야수궁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무리였다. 만약 혼인을 한다 해도 야수궁주에 오르는 것은 그가 아닌 세주연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야수궁주의 부군이 되는 것이지만, 관심 없다. 세주연이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고, 아무래도 남만에서 사는 것은 불편함도 많았으니까.

16586677297054.jpg‘결혼은 무슨.’

게다가 무엇보다, 천화는 이곳에서 여인과 연을 맺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자신은 언젠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니까. 중요 분기 임무를 모두 마치고, 다시 소원을 빌 수 있는 상황이 될 때쯤에는 아마도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천하제일인이 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여기서 1인자 생활을 해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사치밖에 없는 것이다.

16586677297054.jpg‘하다못해 인터넷, 스마트폰이라도 쓸 수 있다면 모를까. 심심해서 죽어버릴 거야.’

때문에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는 것까지는 관심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당장 천화뿐 아니라 고인물이라 불리던 이들이 그리 된 것도 전부 심심해서였으니까. 호기심이라는 것도 빼놓을 순 없겠지만, 이미 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해보았기에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찾아다니다가 알게 된 것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16586677297054.jpg“관심 없어. 내 취향도 아니고.”

16586677301405.jpg“네 취향은 어떤데?”

16586677297054.jpg“글쎄. 좀 더 청순하고, 예쁘고, 여러모로 성숙한?”

16586677301405.jpg“흠흠, 그래? 그렇단 말이지…….”

16586677297054.jpg“……?”

심드렁한 대꾸였지만 설영은 그 대답이 나쁘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16586677301405.jpg“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야? 그 맹거인지 하는 사람이 지켜본다고…….”

16586677297054.jpg“괜찮아, 괜찮아. 야수궁주가 허락한 일이라니까.”

잔치가 끝나고, 편안한 잠자리까지 배정받아 푹 쉬고 난 천화와 설영은 야수궁을 빠져나왔다. 당연히 든든한 지원과 함께였다. 그들이 남만의 어딜 가든 야수궁주가 쥐여준 패만 있으면 숙식에 거하게 제공될 터였고,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비용의 지불 없이 취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것을 빌미로 굳이 필요가 없는 값나가는 물품들까지 취한다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꼼꼼히 따져물을 만큼 박한 집안도 아니었기에, 마음껏 질러도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만약을 위해 남만에서 중히 쓰이는 유일 등급의 피독주를 선물 받았고, 요상약과 영초로 만든 금창약도 지급 받았다. 재료가 워낙 뛰어난 까닭에 어지간한 중원의 명의나 대문파가 만든 것들보다도 훨씬 효과가 좋을 것이 분명한 물품들이었다. 더불어 매우 귀중한 전략적 요소로도 쓰일 수 있는 남만 전역이 세세히 그려진 지도 또한 손에 넣었다. 특별히 취급되는 영물들의 위치도 거기에 적혀 있었고, 지금까지 발견된 악물들의 위치와 간략한 정보 또한 따로 적혀 있었으니, 그야말로 남만의 모든 것이 담긴 지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6586677297054.jpg‘하지만 이걸로 끝나면 섭하지.’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금혈진체 보신단][희귀] 야수궁에 비전으로 전해오는 보신단 또한 손에 넣었다. 섭취하는 것만으로 혈액의 노폐물을 걸러주는 것은 물론, 단단한 육체를 만들어준다는 비전의 영단이었다. 이 영단의 장점은 그저 외공의 영역을 단련시켜주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 영약들처럼 내공을 상승시켜주는 효과는 없지만 몸을 보하고, 내상을 입을 확률을 낮춰주며 피부와 근육, 혈맥을 강화하여 보다 더 수월하게 몸을 움직이고 한계에 가까운 움직임을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귀한 물건이었다. 무신지로에서는 천화도 꽤나 여럿의 악물들을 사냥한 후에나 보상으로 얻을 수 있던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초기 지원 물품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16586677297054.jpg‘역시 아는 것이 힘이라니까.’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야수궁에서 내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는 물건이기에, 천화는 크게 만족했다. 가뜩이나 현재 천화의 무공은 내공보다 육체적인 능력에 치중이 되어있지 않던가? 또한 혈도를 자극하거나 혈류를 조정하여 단숨에 힘을 끌어내는 것들을 일종의 필살기로 가지고 있었기에, 천화에게 있어 금혈진체 보신단은 내공을 몇 년치씩 불려주는 영약보다도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일반 영약과 다른 성질과 효능을 지닌 것인 만큼 내공 심법으로 빠르게 소화를 시킬 수 없어서 그것이 몸 안 곳곳에 스며들어 완전한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테지만, 상관없다. 일단 섭취하기만 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기도 했고, 몸을 혹사시킬수록 더 빨리 소화가 되는 것이니 운이 좋다면 이번 임무가 끝날 때쯤에는 대부분 소화해낼 수 있을 테니까.

16586677301405.jpg“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처음은 이 녀석이라고 했지?”

천화가 만족스러운, 음흉한 표정을 짓는 사이 설영이 종이 뭉텅이에서 한 장을 뽑아 펼쳤다. 현상수배서라고나 할까? 알려진 악물들의 그림과 함께 간략한 정보가 담긴 종이였다.

16586677301405.jpg“돼지가 영물이라고?”

그리고 그것에 그려진 모습은 영락없는 돼지의 모습이었다. 멧돼지도 아니다. 사실은 거뭇한 털과 피부로 뒤덮인 사나운 멧돼지가 아닐까 설영이 잠시 갸웃거렸지만, 천화는 녀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녀석은 분홍빛의 고운 피부를 가진 진짜 돼지였다.

16586677297054.jpg“여기 소도 있는데 뭘.”

16586677313264.jpg“무우?!”

집돼지 같이 생긴 녀석이 말썽을 일으키는 악물이라니, 선뜻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흑우 역시 평범한 소였지 않나? 물론 전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소라는 점이, 게다가 천하의 영약이라는 공청석유까지 퍼마셨다는 점이 특이하긴 했지만, 소도 영물인데 돼지라고 뭐 다를 게 있을까. 그 말에 흑우가 발끈한 듯 소리를 냈지만 천화는 가뿐히 무시하고 전방을 살폈다. 그의 눈에 놈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16586677297054.jpg“이런 육중한 체구의 영물들은 발자국이 선명해서 좋지.”

그 말처럼 상당한 무게에 짓눌린 듯한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여기서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어디론가 이동을 한 모양이었다.

16586677297054.jpg“아참, 받아.”

그것을 통해 대략의 방향을 가늠하자마자 천화가 설영에게 혈마검을 던져주었다. 꼭 혈마화를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혈마신공을 익힌 설영이기에, 혈마검을 쥐는 것만으로도 무공 수위가 상승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혈마검의 혈정에서 기운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설영이 일으키는 혈마기가 혈마검에 공명하며 더 큰 힘을, 더 적은 내공 소모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천화는? 당연히 무명검이다. 무명검을 꺼내면 그 위력을 목격한 누군가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이곳 남만에서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남만을 지배하는 야수궁의 궁주에게 인정을 받은 그들이기도 하거니와, 이곳 남만인들은 신병이기의 힘을 빌리기보다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고 영물과 교감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으니까. 물론 중원인들이 전혀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운신할 수 있는 지역이 철저히 제한되기 때문에 괜찮다. 제멋대로 그것을 어기고 움직이다 걸릴 경우, 특히 영물과 마찰이라도 일으킬 경우 야수궁의 엄중한 제제를 받기에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만은 무명검을 마음껏 사용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르게 생각하면, 무명검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목표 달성은 물론 버티는 것조차 힘들 만큼 위험한 지역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16586677313274.jpg“꾸룩, 꾹꾹.”

그리고 잠시 후, 목표인 분홍돼지의 거체가 시야에 잡혔다.

16586677301405.jpg“어……. 근데 쟤 흙 먹는데?”

녀석은 땅에 머리를 처박고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땅 속에 집을 짓고 사는 벌레 따위를 잡아먹는 중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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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6677297054.jpg“조심해. 돌진력과 치악력이 대단하니까.”

그러나 그 모습에 방심을 해서는 안 된다. 이미 놈을 상대해본 전적이 있는 천화였기에, 설영에게 진지한 충고를 던지며 흑우에게서 뛰어 내렸다. 육중한 덩치에서 나오는 파괴력도 무서웠지만, 잡식성을 가지고 있는 돼지 영물이기에 잘못하면 산 채로 잡아먹힐 수도 있는 것이다. 턱 힘도 상당히 강해서, 일단 물리면 떼어놓기가 쉽지 않기도 하고.

16586677313274.jpg“꾸르?”

그때, 녀석이 천화들의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땅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홱 돌렸다. 활짝 열어둔 기감으로 녀석이 입에 물고 있는 벌레의 영성이 느껴진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지금 놈이 먹어치우고 있는 벌레 역시 영물이라 부를 수 있는, 대자연의 기운을 머금은 녀석인 것이다. 그런 영물들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으니 ‘돈왕’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것이겠지. 남만의 모든 영물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돼지 중에는 녀석보다 덩치가 크고 탐욕스러운 놈을 찾기도 어려울 터였다.

16586677313274.jpg“꾸우울?”

그 순간, 돈왕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설영의 미모에 반한 것일까, 생명력 넘치는 혈마기에 반응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설영이 이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16586677301405.jpg“엇?!”

돈왕이 바닥을 긁듯이 끌며 설영을 향해 폭발적인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16586677297054.jpg‘저거 시선 방향이 어째…….’

화들짝 놀라며 검을 떨칠 자세를 취하는 설영. 그러나 천화는 보았다. 녀석의 시선이 설영의 가슴팍에 꽂혀있는 것을. 붕대로 감아도 완전히 감출 수 없는 풍만한 그것을 향해 금방이라도 얼굴을 파묻을 듯 돈왕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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