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다시 중원으로 (2)2021.05.06.
“대체 무슨…….”
천화가 황급히 안아들어 바닥에 머리가 부딪히는 것은 면했지만, 설영의 상태가 좋지 않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낯빛이 창백했고, 혈맥이 마구 뛰고 있었으니까.
“가만히 있게.”
천화가 맥을 짚자마자 세주안이 달려와 그를 제지했다. 혹여나 아직 내공 운용의 측면에서는 수준이 낮은 천화가 뭔가를 잘못 건드려서 탈이 날까 싶은 것이다. 천화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동시에 합당한 조치이기도 했다.
“으흠. 주화입마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의 내공을 흘려넣어 설영의 상태를 파악한 세주안의 입에서 절망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주화입마. 모든 무인들이 두려워하는 그것이 설영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몸속의 혈도가 망가지고 기운이 제멋대로 들끓어 무공을 펼칠 수 없는, 나아가 자칫하면 일상생활조차 불가하거나 심할 겨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태. 그 말을 들은 천화의 얼굴도 크게 구겨졌다. 금강토룡을 사냥하며 너무 무리한 것일까? 분명 무리를 해서 혈마화를 하긴 했지만, 혈마신공을 익힌 설영이 그로 인해 주화입마에 빠질 일은 없을 텐데?
‘다른 이유일 수 있어.’
“이건 심각하군. 내공이 폭주하고 있어. 이래서는 나로서도 손을 쓸 방법이 없겠는데.”
극강의 무인인 세주안마저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면 누구라도 고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하늘에 맡겨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천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세주안이 설영을 다시 천화의 품에 안겨주자, 얼른 다시 맥을 짚으며 자신의 내공을 설영에게로 흘려보냈다.
“자네……!”
세주안의 말처럼 내공이 폭주하는 상황이라면 그저 내공을 불어넣어 살피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었다. 설영과 천화 모두. 그러나 천화는 과감하게 내공을 밀어넣었다. 그만큼 설영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가진 내공의 성질을 믿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무엇과도 섞일 수 있는 삼재심법의 기운이라면 설영의 내공을 자극하지 않고도 충분히 상태를 살필 수 있으리라.
‘이건…….’
그리고 예상대로, 설영의 상태를 안전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결론적으로 설영의 상태는 주화입마가 맞았다. 세주안의 진단처럼 내공이 폭주하는 것도 맞았고. 그러나 일반적인 주화입마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금강토룡의 피를 취한 것 때문인가?’
[그, 저도 이렇게 될 줄은…….]
천화가 슥 혈마검을 흘겨보았다. 모두 혈마검 때문이었으니까. 금강토룡의 피를 마구 취하는 과정에서, 또 혈마검과 설영의 내공이 공명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기운이 유입되었다. 혈마검이 모든 기운을 흡수해갔다면 상관없었겠지만, 단시간에 너무 과한 힘을 취한 탓에 상당수가 설영의 몸 안에 남게 된 것이 문제였다. 그 기운의 양이 설영의 내공을 넘어서면서 제어할 수 없게 되었고, 워낙 사특한 특성을 지닌 것이었기에 폭주를 일으켰다.
‘어떻게 안 되겠어?’
하지만 결국 믿을 것은 혈마검뿐이었다. 지금이라도 혈마검이 설영의 체내에서 날뛰는 기운들을 가져간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만 기운의 양을 줄여주더라도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터였다. 워낙 탁한 기운이 심해 내공으로 흡수하고 나면 그 양이 크게 줄어들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상당한 내공의 증진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무리입니다. 갑자기 많은 양의 기운을 먹어치웠더니 저도 지금은…….]
허나 혈마검에게서 나온 말은 무척 부정적이었다. 자신 역시 과도한 기운의 흡수로 인해 더 이상 흡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검도 배가 부르거나 체하는 것 따위가 있는 것인지 황당하기 그지없을 뿐이지만, 강요를 할 수도 없었다. 혈마검이 혈마의 정통 후계자인 설영을 일부러 죽게 놔둘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답이 없는 것일까? 이대로 설영이 망가져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나?
‘참담하군.’
아무리 고인물인 천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는 것이다. 이전의 내공 수위를 회복한 상태였다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쀼쀼!”
“응?”
바로 그때, 천화의 어깨 위에서 웅크리고 있던 은룡이 제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화를 벗어나 설영의 몸 위로 올라서더니 혀를 할짝거리며 뺨을 핥아댔다.
“걱정해주는 건가? 어……?”
단지 끙끙거리며 쓰러져있는 설영이 안쓰러워 그러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은룡이 설영의 몸 위로 올라타지 얼마 되지 않아 설영의 표정이 달라졌다. 내부에서 기운이 폭주하며 생겨났던 고통이 가시는지 표정은 평온해졌고, 황급히 맥을 짚어보자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공이 진정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폭주하던 기운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은룡이 무언가를 한 것일까? 얼른 기감을 열어 둘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은룡이 폭주하는 기운들을 정화하고 있다!’
은룡이 설영의 기운을 흡수하여 정화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폭주하는 기운뿐만이 아니다. 혈마검의 그것에 비해 탁하던 혈마기까지 흡수하여 정순하게 바꾸어놓았고, 그것을 제가 취하는 대신 다시 돌려주고 있었다. 설영의 몸속 기운과 은룡의 기운이 서로 공명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기사로군. 저 아이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니.”
그것을 세주안도 바로 알아보았다. 내공의 운용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다고는 하나, 세주안 역시 절정을 넘어선 고수였으니까. 야수궁주이기도 한 그 역시도 이런 능력을 가진 영물은, 신수는 처음 보는지 진심으로 감탄해마지 않았다.
“어느 정도까지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하면 오히려 기연을 얻겠어.”
그의 말처럼 이것은 기연이었다. 은룡이 혈마기와 금강토룡의 기운을 정화해내는 과정에서 힘이 일부 유실되기는 했지만, 대다수가 다시 설영과 은룡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으니까. 은룡이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설영이 주화입마를 벗어나 운신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만든다 하더라도 능히 기연이라 부를 만한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내공이 한층 정순해지고 크게 불어날 테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밖에 없겠군. 여봐라! 즉시 의당을 준비시켜라! 설영 소저가 몸을 추스르는 대로 성심을 다해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은룡과 설영의 공명은 삼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중간에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는지 설영은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취했고, 혈마심공을 운용하며 몸속 기운들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분투했다. @
“아우의 친구가 아주 큰 것을 얻어가겠군.”
“그렇네요. 잘만 하면 일류의 벽을 넘을 수도 있을 것 같던데, 대여료는 톡톡히 받아야겠어요.”
“대여료라고?”
“예. 은룡이는 제 신수이니까요. 아, 목숨도 구해줬으니까 그 값도 받아야겠구나!”
설영과 은룡이 무아지경의 운기를 이어가는 동안, 만약을 위해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해준 세주안과 천화가 담소를 나누었다. 이제 목숨이 위협되는 상황은 벗어났기 때문인지 그 말에 여유가 묻어있었다.
“크흠. 틀린 말은 아니군. 헌데, 아우도 뭔가를 얻어가야 하지 않겠나?”
신수를 돈벌이 수단으로 쓴다는 것이 살짝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은 세주안이 슬쩍 천화에게 운을 띄웠다. 소원권으로 얻은 부탁을 소진시키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천화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천화의 수준은 그의 입장에서 참담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것일까? 세주안의 은근한 물음에 천화가 정색을 하며 거부했다.
‘저것만은 피해야 해.’
세주안이 제안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뻔했으니까. 자신을 단련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만한 고수의 지도를 받는 다는 것은 남만인들뿐 아니라 중원 무림인들에게도 천금을 줘서라도 갖고 싶은 엄청난 기회였다. 하지만 이미 무신지로에서 그것을 한 번 겪어본 적 있는 천화로서는 그저 피하고만 싶은 일일 뿐이었다. 모르면 맞아야지! 그것이 바로 세주안의 교육 방식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게 초식의 미진함을 짚어주거나, 자세를 교정해주는 일 따위는 없다. 그것을 스스로 알아서 깨닫고 고칠 때까지 두들겨패는 것. 그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야말로 세주안이 가장 선호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아니, 괜찮지가 않아. 적어도 여인의 품에 안겨 다니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사내가 품지는 못할망정.”
‘젠장, 거기까지 본 건가?’
하지만 다음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떠올랐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여는 세주안의 말에, 천화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세주안은 세주연이 천화를 구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마초 성향의 남만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마초인 그에게 있어, 그 모습은 마음에 들려야 들 수가 없는 것이었겠지.
“아니, 그건 그게 아니라…….”
“그럼 내 눈이 잘못되었다는 겐가?”
“그건 아니지만…….”
“신소리 말고 따라오게. 내가 아우를 제대로 단련시켜 줄 테니. 어쩌면 이제 아우가 아니라……. 제길. 아무튼 따라오게!”
‘……망했다.’
거절을 거절한다. 딸아이를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세주안이었기에 천화의 약함을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미 마음을 굳힌 세주안이었기에, 천화에게 더는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천화는 울상을 지으면서 세주안을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고, 이동하는 내내 머리를 굴렸다. 그와의 대련으로 많은 능력치의 상승과 숙련도 상승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무차별적으로 얻어터지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군. 최대한 빨리 납득을 시키는 수밖에.’
세주안과의 대련이야 피할 수 없는 것이라지만, 그것을 최대한 빨리 끝낼 방법은 분명히 있었다. 바로 세주안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별다른 수련을 필요치 않는 수준이라는 것만 증명해낸다면, 세주안이 자랑하는 지옥훈련도 짧아질 수밖에 없겠지. 마음을 굳힌 천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공들을 점검했다. 처음부터 총력전을 펼쳐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최상의 조합법을 찾아냈다.
“자, 먼저 들어오게. 중원에서는 삼 초를 양보한다지? 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 역시 자네와 비슷한 수준의 공력만 운용할 것이니.”
연무장에 자리를 잡은 세주안이 느긋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응. 안 속아.’
그러나 천화는 속지 않았다. 저 말을 믿고 검을 떨치는 순간 ‘상대가 항상 널 봐줄 거라 생각 하느냐!’하며 벼락 같이 주먹을 내뻗을 테니까. 그 말이 완전은 거짓이 아니라서 약속한 대로 내공은 딱 이류 수준으로만 사용을 할 테지만, 세주안은 이미 전신이 흉기인 인물이다. 그런 이가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들, 어설픈 자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아마 내공을 완전히 배제하더라도 이류급까지는 상대가 안 될 테고, 일류급 역시도 고전을 면치 못하겠지. 물론 그렇다고 일류 무인 쪽이 이긴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게 필요한 건 이런 식의 단련이 아닙니다.”
“그거야 자네 생각이지.”
마지막으로 천화가 세주안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삼류든 이류든, 혹은 일류 무인조차도 맨날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 않은가? 내가 내공만 충분했다면 이길 수 있었다. 내공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노력으로 충당이 되지만, 영약을 섭취하거나 스승의 내공을 전수 받는 등의 형태로도 뻥튀기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대문파의 핵심 전력이라면 대부분 이런 영약들을 하나 이상은 먹는 것이 거의 당연시되니까. 그 제조법과 재료들을 독점하는 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할 정도로 말이다.
“검으로 나를 납득시켜보게. 그렇게 한다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물론 세 가지 부탁과는 별개로 말이야.”
“그럼 갑니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억지로 대련을 하는 것인 만큼 자신을 납득시킨다면 천화가 원하는 방식대로 강해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영약이라도 기꺼이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그 말에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천화는 가지고 있던 검 중에서 가장 쓸 만한 놈을 골라 손에 쥐었다. 혈마검은 설영의 안정을 돕는 중이고, 무명검은 상대를 죽일 각오가 아닌 이상 딱히 사용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예기는 세주안에게도 충분히 위협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혈마검처럼 검기를 뽑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순수한 자신의 무력으로 그를 상대하려는 것이다.
‘역혈기공, 혈류가속.’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무공으로서 세주안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천화는 시작부터 자신이 쓸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발휘했다. 역혈기공으로 내력과 육체 능력을 증가시키고, 혈류 가속으로 속도를 증폭시킨다. [혈류가속과 역혈기공이 조합됩니다.] [역혈가속이 발동합니다.] [위력이 증폭되고 후유증이 강화됩니다.] 단시간에 끝장을 보지 못하면 후유증이 밀려와 외려 위험해질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어차피 생사결은 아니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내었다. 세주안을 향해 짓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