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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다시 중원으로 (5) (326/481)

<82화> 다시 중원으로 (5)2021.05.13.

흑우의 재촉에 힘입어 천화와 설영은 빠르게 남만에서 벗어났다. 처음 왔을 때는 시작부터 길에서 벗어나 영물 사냥에 집중했기에 잘 몰랐지만, 남만의 대로는 꽤 잘 닦여있는 편이었다. 상인들이 대량의 식량을 싣고 이동을 해와야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덕분에 천화 일행도 속도를 내기가 편했다. 세주안이 준비해준 물품들을 수레에 싣느라 이전처럼 흑우가 전력으로 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느긋하게 움직여도 준마 이상의 속도를 내는 흑우였기에, 야수궁은 금방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져갔다.

16586678123008.jpg“슬슬 옮겨담아 볼까?”

그렇게 야수궁에서 멀어지고, 그들을 호위하던 야수궁의 고수들이 사라졌을 때 천화는 수레로 옮겨와 수레 안의 물건들을 소지품 창으로 옮겨 담았다. 갈 길은 멀었고, 수레 안의 물품들을 버릴 수도 없었으니까.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세주안이 수레 한가득 실어준 물건들은 오직 남만에서만 자라는 약초 따위가 가득 실려있었다. 단순히 돈으로 환산하더라도 금자 수십냥은 너끈할 만큼 값비싼 물품들. 특히 남만에서 나는 약초에 대한 전매권이 특정 상단에게 귀속되어 있었기에, 만약 멀리 나가 팔수만 있다면 훨씬 더 큰 값을 받아 챙길 수도 있을 터였다. 전매권이라는 것은 남만야수궁과의 거래를 특정 상단과만 진행 한다는 특권일 뿐, 개별적으로 유통되는 것이나 그들이 판매했던 것을 다시 팔아치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천화는 그 귀중한 물품들은 소지품 창에 차곡차곡 쌓아넣었다. 다행히도 소지품 창에는 무게 제한이나 중첩 제한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많은 칸을 차지하지 않고도 그것들을 모두 옮겨담는 것이 가능했다.

16586678123008.jpg“자, 이제는 변신을 할 차례이군.”

그렇게 수레를 모두 비우고 나자 천화는 설영을 자신의 쪽으로 불렀다. 다시 중원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약간의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원 전체의 관심인지, 아니면 귀주성에 파견된 이들의 관심과 의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계가 편치 않은 남만에까지 사람을 보내서 확인할 정도라면, 이대로 진입했다가는 금세 정체가 들통날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렇기에 천화는 출발하기 전 세주안에게 부탁하여 정체를 감출 수 있는 물품을 받아두었다. 인피면구. 다른 사람의 얼굴을 취할 수 있는 변장, 아니 변신에 가까운 특수한 물품이었기에 구하기도 어렵고 제대로 착용하는 것도 상당한 재주를 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화가 누군가? 인피면구 따위는 수백 번도 더 써보았기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설영의 얼굴에 다른 이의 얼굴을 입혀나갔다.

16586678123008.jpg“어때, 괜찮아?”

16586678123023.jpg“흐음. 맞춤형이 아니라 좀 아쉽긴 하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인피면구가 세주연에게 맞춰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세주연이 몰래 궁을 빠져나가 놀고 오기 위해 중원에서 들어오는 상단에게 몰래 부탁을 해서 구한 인피면구였으니까. 세주연은 아직까지도 세주안이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인피면구를 쓰더라도 세주안 정도의 고수를 속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남만 땅에서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세주안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세주연이 환상향에서 근신을 하고 있는 틈을 타 한 장 구해다 준 것이었다. 설영의 얼굴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아 인피면구에 정통한 이와 마주친다면 들통이 날 수도 있지만, 어지간한 놈들이나 그저 눈썰미가 좋은 이들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부족한 부분을 천화의 능숙한 손길로 어느 정도 메웠으니까. 어쨌든 덕분에 설영은 다소 평범해보이는 소녀의 얼굴로 바뀌었다.

16586678123023.jpg“휴. 드디어 치근덕거리는 놈들이 좀 줄어들겠네.”

16586678123008.jpg‘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 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설영을 보며, 천화가 슬쩍 거리를 긁적였다. 일단 초상화 따위로 설영을 알아볼 인물은 없을 테지만, 치근덕거리는 것은 글쎄. 어린 세주연이 사용하던 인피면구를 착용한 까닭에 평범하지만 꽤 어려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그에 비해 몸매는 육감적이니, 현대에서 흔히 베이글(베이비 페이스 + 글래머)이라 불리는 모습이 된 것이다. 이전에는 남장을 하기 위해 가슴을 동여맸지만, 지금은 인피면구 또한 여성인 까닭에 억지로 남장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경국지색이라 할 수 있는 미모를 자랑하던 이전보다는 줄어들겠지만, 과연 완전히 사라질지는 알 수 없었다.

16586678123008.jpg“문제는 이 녀석인데.”

16586678123037.jpg“무오?”

하지만 그것으로 정체가 탄로날 걱정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려웠다.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것도 아닌 천화야 그렇다 치고, 설영의 미모도 미모이지만 흑우의 특징적인 모습은 상당히 눈에 띄는 것이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귀주성에서라면, 그들과 마주쳤던 이들이라면 흑우의 모습만으로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것이 분명한 것이다.

16586678123008.jpg“이게 될지 모르겠군.”

그렇다고 흑우를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흑우는 그 자체로 상당한 전력이기도 했고, 힘과 체력이 어마어마해서 탈 것으로 쓰거나 도주용으로 활용하기에도 아주 좋았으니까. 그렇기에 천화는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가지 명령어를 발동시켰다.

16586678123008.jpg“흑우, 역소환.”

파앗! 천화의 말과 동시에 흑우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영물 ‘흑우’가 반려동물 관리창으로 이동합니다.] 시스템의 힘을 통해 일종의 아공간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무신지로의 접속을 해제한다면 저절로 역소환이 되긴 하지만 활동하는 중에도 반려동물을 계속해서 꺼내놓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들이 있었기에 편의 차원에서 지원하는 기능이었다. 다행히 그것도 사라지지 않았고, 흑우를 잠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16586678123008.jpg“좋았어. 은룡 역소환.”

내친 김에 천화는 은룡 역시 아공간으로 들여보냈다. [신수 ‘은룡’이 역소환을 거부합니다.]

16586678123008.jpg“응?”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은룡은 신수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친밀도가 흑우처럼 높지 않기 때문인지 스스로 역소환을 거부했다.

16586678127536.jpg“쀼! 쀼!”

자신은 들어가기 싫다는 듯 저항의 목소리를 내며 설영의 목에 뺨을 부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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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6678123008.jpg“흐음……. 이 정도는 상관없으려나.”

재차 역소환을 지시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천화는 곧 포기했다. 강제로 역소환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경우 가뜩이나 높지 않은 친밀도가 더 하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룡의 외형은 뱀과 비슷하니, 함께 중원에 나간다 해도 크게 이상해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뱀이나 조류 따위는 다른 무림인들도 종종 데리고 다녔으니까. 더구나 독사처럼 흉악하게 생긴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16586678123008.jpg‘설영과 계속해서 기운을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고.’

아직 완벽하지 않은 설영의 내공 안정화에도 도움이 될 테고.

16586678123008.jpg“그래도 모습은 조금 감추어야…….”

16586678127536.jpg“쀼뷰븃!”

하지만 은빛의 비늘이 특이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에 천화가 우려를 표하자, 은룡이 알겠다는 듯 소리치며 설영의 가슴팍으로 꾸물거리며 숨어들었다.

16586678123008.jpg‘와, 저게 되네.’

정확히는 가슴골 사이였다. 은룡이가 작다고는 하지만, 저게 저렇게 가려질 줄이야? 붕대로 감고 있을 때도 많아서 자신이 설영을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16586678123023.jpg“어딜 보는 거야?!”

16586678123008.jpg“크흠, 아냐. 아무것도.”

새삼 놀랍다는 듯 설영과 은룡을 바라보던 천화가 설영의 호통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결국 흑우만 다시 소환하여 삼겹살을 잔뜩 구워주기로 약속하고 다시 역소환을 한 천화는, 수레를 버리고 설영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16586678123023.jpg“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16586678123008.jpg“글쎄, 일단은 귀주성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고불의 소식도 확인하고, 마교와 정파인들의 움직임도 파악해둘 겸. 이제 어지간해서는 정체를 들킬 일도 없을 테니까. 왜, 혹시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16586678123023.jpg“어? 아,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지만…….”

어딘지 미적지근한 대답. 그 말에 천화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16586678123008.jpg‘그러고 보니 설영은 왜 무림에 나온 거지?’

등장과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추격을 따돌리는 데 전념하느라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문이 있었다. 설영은 무엇을 위해 무림에 출두를 했는가. 다른 이들처럼 학살을 자행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 일단 무림인들을 학살하고 힘을 기르기 위함은 아니다. 단지 무공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살생을 자제했고, 또 경지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영물을 사냥하면서도 살짝 꺼림칙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16586678123008.jpg‘그럼 명예 회복인가?’

그렇다면 유력한 목적은, 역시 혈마라는 이름에 지워진 굴레를 벗겨내는 것이었다. 이전의 혈마들은 스스로가 혈마임을 밝히고 불살의 비무행을 벌이기도 했지만, 정파의 공작으로 인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후를 바꾼 것일 수도 있겠지. 일단 인정을 받고, 나중에 혈마의 후예라는 것을 밝히는 식으로 말이다.

16586678123008.jpg‘역시 이럴 땐 돌직구가 최고지.’

하지만 그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때문에 천화는 거두절미하고 직접적으로 설영에게 그것을 물어왔다.

16586678123008.jpg“그런데 넌 무슨 목적으로 무림에 나온 거야?”

16586678123023.jpg“응?”

천화의 물음에 설영이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혈마의 후예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굳이 당황할 이유가 있나? 천화가 의아해하며 갸웃거리자, 설영이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16586678123023.jpg“혈마라는 이름에 지워진 굴레를 벗어내려고.”

16586678123008.jpg“흠?”

16586678123023.jpg“난 말이야. 더 이상 혈마라는 이름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어.”

모호하지만 대답이 되었다. 방법이야 어찌되었든 혈마의 악명을 자신이 지워보이겠다는 것이겠지. 좀 더 캐묻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더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설영의 표정을 읽었기에 천화도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16586678123023.jpg“너는?”

16586678123008.jpg“나? 나는…….”

화제를 전환하려는 것인지 되물어오는 설영의 말에 천화는 잠시 고민했다. 고금제일인? 정사대전의 종식? 이걸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까.

16586678123008.jpg“해야 할 일이 있어. 그걸 마쳐야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

16586678123023.jpg“음, 너에게도 그런 게 있구나.”

16586678123008.jpg“무슨 뜻이야?”

16586678123023.jpg“아니, 그냥. 되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했거든. 어쩌면 그게 모두 계획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천화는 순간 뜨끔했지만,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기에 다시 말을 돌렸다.

16586678123008.jpg“크흠. 어쨌든 딱히 가야 할 곳이나 가고 싶은 곳은 없단 말이지? 그럼 내가 마음대로 결정한다?”

16586678123023.jpg“음……. 그래. 그렇게 해.”

잠시 고민하던 천화는 목적지를 정했다. 중원 전역에 널려 있는 기연들이 모두 제 것이라면 어디로 먼저 가야 할까. 기억을 되짚어본 천화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16586678123008.jpg“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숭산으로 간다.”

16586678123023.jpg“숭산? 소림사?”

16586678123008.jpg“어. 곧 그쪽에서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것 같거든.”

무림의 태산북두, 구파일방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 말에 설영이 놀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범의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니까. 물론 들키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혈마의 후예라는 것을 들킨다면 살아서 나오기 가장 힘든 곳이 바로 숭산이 아닐까? 숭산에는 소림사가 있지만, 숭산이 있는 하남 지방에는 개방의 본단도 있으니까.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화에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하남이라면 자신이 가려 했던 곳과도 방향이 맞았으니까.

16586678123023.jpg“좋아. 가자.”

16586678123008.jpg“그럼 일단 귀주성부터 통과해야겠군.”

길이야 많다. 굳이 귀주성을 거치지 않더라도 빙 돌아가는 길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천화의 선택은 귀주성을 지나 사천의 경계까지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장강이 있으니까. 장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숭산에 닿을 수 있을 테니까.

16586678123008.jpg‘뭐, 어지간하면 정체를 들킬 일도 없고, 무엇보다 궁금하기도 하고.’

시간도 시간이지만 무엇보다 궁금해진 것이다. 약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귀주성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또 마교에 대한 정보는 어디까지 퍼졌을지. 최대한 빨리 마교를 전면에 끌어내고, 정사대전을 일으켰다 막아내는 것이 목적인 천화이기에, 미리미리 정보를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16586678123023.jpg“어? 마을이 빈 것 같은데?”

그렇게 길을 되짚어 그들이 남만으로 향하며 들른 적 있는 소수 민족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설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잔뜩 굳어진 얼굴로 기감을 넓혀보지만 걸려드는 사람의 기척이 없는 것이다.

16586678123023.jpg“당한 건가? 여기까지?”

원래부터가 유목 생활로 시작했던 이들이긴 하지만, 정착하고 나서부터는 어지간해서는 거취를 옮기는 일이 없는 소수 민족들인지라 불안한 마음부터 커졌다.

16586678123008.jpg“습격이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마을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습격의 흔적은,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자발적인 이주를 한 것이라는 뜻이다.

16586678123008.jpg‘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몰살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좋은 일이 있어 사라진 것은 아닐 터였기에 천화의 표정 또한 무거워졌다.

16586678144188.jpg“……중원인인가?”

그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던 빈 집들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포위하듯 그들을 향해 걸어나왔다.

16586678123008.jpg“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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