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얘가 왜 여기서 나와? (3)2021.05.20.
‘피독주도 있겠다, 그냥 들이받아?’
순간 천화는 진지하게 고민 했다. 피독주도 두 개나 가지고 있겠다, 한바탕 일을 벌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남만에서 얻어온 피독주와 대전사의 붉은 심장이 가진 피독 효과가 대단하다 한들, 당문의 합성독이라면 그 견고한 저항 능력을 뚫고 피해를 입힐 수도 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당문이 한번 작정하고 나선다면, 피해를 입든 입지 않든 아주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온갖 암기가 수시로 날아들고, 밤잠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겠지. 그렇기에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소련만이 떼를 쓰는 와중에 천화와 설영, 유모의 대치는 한동안 이어졌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거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무언의 공방이 그들 사이에 오가고 있었다. 만약 천화와 설영이 약했다면 이미 살기에 눌려 굴복했거나 저 유모라는 자가 어떤 식으로든 손을 썼겠지. 그러나 유모 역시 두 사람이 무시 못할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배경을 앞세워 은근히 압박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었다.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대를 두고 설영이 슬쩍 천화에게 눈을 돌렸다. 그의 생각을 묻는 것이다.
‘가만, 상관없잖아?’
그때 문득, 천화의 머릿속에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상관없지 않은가? 시스템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은룡이의 주인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은룡, 이리와.”
“쀼쀼?”
주인인 천화보다 설영의 품을 더 좋아하던 은룡이였지만,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는지 군말하지 않고 천화의 손바닥 위로 넘어왔다. 그 매끄러운 모습에 당소련이 또 한 번 꺅꺅거리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알겠지?”
“뿌우…….”
천화는 은룡이에게 귓속말을 하듯 무언가를 속삭였고, 은룡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알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정을 하셨습니까?”
“좋습니다. 후하게 값을 치러주시겠다고 했는데,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천화!”
작당모의를 마친 천화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당당히, 은룡이의 몸값을 요구했다. 드잡이질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천화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은 몰랐는지 일순 유모의 얼굴에 당황이 어린다. 곧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금자 열 냥 드리죠. 평범한 뱀은 아닌 듯하니.”
“오?”
금자 열 냥. 은자로 따지면 무려 이백 냥. 생각보다 큰 금액이 나왔다. 강짜를 부리기에 거의 강탈에 가까운 후려치기를 시도하려나 생각했는데, 오대세가답게 통 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이, 좀 더 쓰시죠. 은룡아, 그거 해봐.”
“쀼우~.”
쫄쫄쫄쫄 천화의 지시에 따라 은룡이가 하늘을 향해 입으로 물을 뿜었다. 마치 분수가 뿜어지는 듯한 모습에 당소련은 한 번 더 꺄르르 웃었고, 유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금액을 좀 더 올렸다.
“금자 열다섯 냥 드리겠습니다.”
“흐음. 그런데 말이죠.”
그제서야 천화도 만족했는지 손으로 턱을 쓸며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이 녀석이 영물이라 아무나 따라가진 않거든요? 이 자리에서 양보해드릴 수는 있지만, 다시 돌아오거나 당신네들에게서 도망치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시 돈을 돌려달라고 하셔도 못 드려요?”
마지막으로 살짝 약을 쳤다. 환불 불가. 영물이라는 것은 지성과 영성을 지닌 동물이 아니던가? 자신의 뜻이 동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주인을 떠날 수 있는 만큼, 그것까지는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천화는 그 경우를 상정하며 유모를 도발했다. 도발. 그것은 도발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문이니까. 당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은 역시 독이다. 그럼 그 독이 어디에서 나오겠나? 독초를 배합하여 만들기도 하지만 독물에게서 뽑아내는 것이 가장 쉽고 강력한 것이다. 그런 만큼 독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야수궁과 비견될 만큼의 실력을 자랑하는 그들이었고, 천화의 말은 그 자존심을 건드렸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우리 당문은 손 안에 들어온 것을 놓치는 법이 없으니.”
유모가 자신 있게 웃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물을 뿜어대는 것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영물인 것은 알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야 아직 어려 영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문은 아니니까. 영물을 가두는 도구나, 순응하도록 만드는 약과 섭혼술이 잔뜩 있었으니, 그 어떤 영물이라 한들 절대복종하는 순한 양으로 만들 자신이 있는 것이다. 천화와 유모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금자 열다섯 냥은 상당한 거금이었지만, 오대세가라 불리는 당문의 재력을 자랑하듯 전낭에서 전표를 꺼내 천화에게 값을 치러주었다. 현대로 따지자면 재벌가나 마찬가지였으니 이 정도야 부담이라 말하기도 어렵겠지.
“쀼웃!”
스르르륵- 천화와의 밀담대로 은룡이가 천화에서 당소련 쪽으로 옮겨갔다. 세주연만큼이나 어리긴 했지만 차후 독중화라 불릴 만큼 빼어낸 외모를 지닌 당소련인지라, 은룡이도 딱히 거부감이 심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영물은 미인을 좋아하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세주연은 귀여운 인상이 강하고, 설영은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가 인상적이라고 할 때, 당소련은 세주연의 체형에 설영 같은 미모를 가진 아이라고나 할까? 물론 귀여움, 미모, 몸매. 어느 한 쪽에서도 둘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꺄핫! 간지러워!”
설영에게 그랬듯, 당소련의 옷 속으로 파고 들어 자리를 잡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투욱 그러나 엄폐물(?)의 부족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바닥에 툭 떨어져내리고 말았다.
“쀼우?”
용무룩.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다. 다행히도 당소련은 은룡이의 의도와 실망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괜히 멋쩍어진 천화와 설영, 유모만이 괜한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크흠. 어쨌든 말이 통하시는 분들이라 다행이군요. 그럼 무운이 있으시길.”
오늘은 재수가 없었으니 향후에라도 운이 있길 바란다는 걸까?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서는 유모의 말이 고깝게만 느껴졌지만,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손해 본 게 없기도 하고.’
실제로는 오히려 이득은 본 만남이었으니 뭘 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천화, 괜찮아?”
“응? 뭐가?”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설영이 조심스레 천화에게 말을 건넸다. 자신이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은룡이를 잃어버린 듯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할 뿐이었다. 실제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주었을 뿐이기도 하고.
“은룡이. 저렇게 넘겨줘도 괜찮은 거야? 아까 둘이 무슨 얘기를 했어? 다시 빠져나온대?”
“아, 그거? 응. 걱정하지 마. 오늘 저녁이면 다시 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설영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천화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문이니까. 독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천하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그들이니, 제 아무리 신수라 하더라도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아니, 그 전에 약물이나 섭혼술 따위에 당해서 이지를 상실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늘 자신의 품 안에 머물던 은룡이기에 설영도 정이 들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서두른다고? 바로 떠날 참이야?”
하지만 오히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천화의 말에, 설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은룡이가 빠져나와 돌아오기 위한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수룡이라지만 바로 출발해버린다면 찾아오지 못하거나, 쫓아오지 못할 확률이 있는 것이다. 은룡이는 아직 어렸고, 물속에서 얼마나 빠른지나 천화나 설영을 찾을 수 있을 만큼의 탐지 능력이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응. 쉬고 싶겠지만 좀 참아줘. 당가 놈들은 꽤나 질기거든. 미리 거리를 벌려두지 않으면 혈안이 돼서 쫓아올 거야.”
“그야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선뜻 수긍하기도 어려운 그 말에, 설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은룡이의 주인인 천화는 부둣가로 나가 이리저리 흥정을 하기 바빴다.
“설영! 여기, 여기!!”
부두에서 한참을 흥정하던 천화가 높이 손을 흔들며 설영을 불렀다. 진짜로 배를 타고 이동할 모양이다. 그것이 이상하고, 못마땅했지만 늘 이상한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을 실현시킨 천화였기에 못이기는 척 배 쪽으로 다가갔다.
“일단 이걸 타면 될 것 같은데? 호북까지는 간다고 하니까.”
단번에 숭산이 있는 하남성까지 가는 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무척이나 먼 길이기 때문에 특별한 표물이나 상품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거기까지 단번에 가려는 상단이나 표국도 없었고 배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몇 번쯤 갈아탄다면 하남 지역까지 들어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보다는 일단 빠르게 사천성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선 과제겠지만.
“언제 출발하는데?”
“술시(19~21시) 초이니까 이르게 저녁을 먹고 타면 될 것 같은데?”
“너 정말로…….”
정말로 오늘, 그것도 몇 시진 뒤에 바로 출발을 하겠다는 천화를 보며 설영이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더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사이 은룡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믿어보는 수밖에. 설영은 조용히 천화를 따라 인근의 주루로 이동했다. 객잔에서 방을 잡고 휴식을 취하면 좋겠지만, 워낙 많은 상단과 표국이 오가는 데다 남은 시간 또한 그리 길지 않아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휴식을 취하다가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간만에 제대로 된 술맛도 좀 볼 겸. [신수 ‘은룡’이 미혼약에 저항합니다.] [신수 ‘은룡’이 섭혼술에 저항합니다.]
‘이것들이…….’
그러나 설영이 생각하는 것처럼 천화의 마음도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시스템 알림이 천화에게 은룡의 상황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미혼약도 모자라 섭혼술까지. 귀하디귀하신 아가씨의 몸에 해를 끼칠까 염려스러웠는지, 일단 은룡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작업부터 치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냥 영물도 아닌 신수, 그것도 정화 능력을 갖춘 은룡에게는 통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런 짓을 시도하고 있다는 자체가 천화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감히 자신의 반려동물을 상대로 이 따위 짓을 벌이다니?
‘어디 너도 당해봐라.’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천화의 속에서 천불이 끓고 있었다. 작업은 이미 마쳐두었다. 은룡의 몸에 마교의 추종향을 묻혀두었으니까. 은룡이가 물을 뿜고 재주를 부리는 동안, 천화가 장비 교체와 소지품 창을 이용해 얼른 은룡이의 몸에 추종향을 묻힌 것이다. 그 상태로 당소련과 살을 부벼댔으니, 그녀에게도 마교의 추종향이 아주 진하게 묻어있겠지. 물론 당문이야 독의 대가들이 모인 곳이니 추종향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추종향의 냄새인지, 아니면 은룡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알 게 무언가? 추종향은 그 배합에 따라 제각각의 향을 내기 때문에 당문의 추종향으로 덮어낼 수도 없을 터였고, 이미 알고 있는 종류가 아닌 이상 냄새만으로 유추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당문조차 마교에서 사용하는 추종향의 존재는 알지 못할 터였다. 가주조차 애지중지하는 그 귀하신 아가씨께서 이제는 마교가 노리는 표적이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하지만 천화는 고작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원래도 그다지 당문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천화였지만, 그래도 이왕 모든 것이 리셋되었기에 새로운 관점에서 모두를 대하려 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가며 자신과 악연을 쌓아주니 그냥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은혜는 똑같이 갚고, 원수는 배로 갚아준다는 당문의 원칙을 그대로 돌려줄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