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장강수로채 (2)2021.06.08.
“어휴. 어쩔 수 없네.”
천화가 튀어나간 뒤, 설영도 어쩔 수 없이 갑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생각처럼 즉시 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류의 무위를 숨기지 않는 천화의 등장에 상대도 살짝 당황하긴 했다. 하지만 당연히 유리하게 흘러 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천화가 뿜어내는 경험해보지 못한 살기에 겁을 먹은 것인지 주춤거리며 물러설 뿐 검을 빼어들지 않은 까닭이다.
“웬 놈들이냐!”
“나오라며?”
코웃음을 치며 한 발 더 천화가 내딛자, 녀석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고작 세 명에 불과했지만, 혹여 이들이 도화선이 되어 다른 이들까지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히 장강수로채와 맞서고 싶은 이들이 있을 리는 없지만 군중 심리라는 것이 있으니까.
“나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강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강제란 말이오?”
예상대로 몇 명의 무인이 더 갑판 위로 올라섰다. 어차피 장강 물길을 이용하지 않는 이상 굳이 마주칠 일이 없는 그들보다 곤륜이라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명망 높은 문파와 연을 맺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듯싶었다. 무공 실력은 잘 쳐줘야 이류쯤밖에 되지 않아 보였지만, 수가 늘어났다는 자체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놈의 인상이 구겨졌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더는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이자들이…….”
아예 몽땅 올라오면 물러나기라도 쉬울 텐데, 이 정도 숫자라면 물러서는 게 꼴이 우스워질 수 있었다. 얼른 갑판 위에 올라 선 이들의 무위를 가늠한 녀석은 노기를 드러내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저 덩치만 커다란 말코 도사 놈과 처음 나섰던 둘만 제압해낸다면 오히려 자신들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뭣?”
정작 천화는 귀를 후비며 놈을 딱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말을 말아먹을 놈이었다면 벌써 꼬리를 말고 도망치거나 다른 협의점을 찾았을 터였다.
“장강에서 우리 수로채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려주마!!”
채앵!! 결국 녀석은 끝끝내 검을 뽑고야 말았다. 콰앙!! 그리고 그 순간, 순식간에 놈의 앞으로 치달은 무진이 일권을 내질렀다.
“컥?!”
분명 검과 권의 격돌이었다. 일격을 회피한 것도, 특수한 수투를 착용한 것도 아니건만 무진의 일권이 놈의 검을 부러뜨렸다. 아예 상대까지 함께 날려버렸다.
태청신권(太淸神拳). 곤륜파의 권법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상승의 무학이 그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무량수불.”
“…….”
짧게 도호를 중얼거리는 무진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검날과 부딪히고도 상대를 아예 배 바깥까지 날려버리는 위력이라니? 상대가 무진을 얕본 것도 아니었다. 아예 검기까지 피워올리며 달려들었건만, 검이 부러지는 수모를 겪으며 날아가버린 것이다. 절정 고수. 그것도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최상승의 무학을 한 몸에 익혀낸 이의 일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일권을 떨쳐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경지를 읽어내지 못했을 뿐.
“이, 이게 무슨……?!”
때문에 경악한 것은 승객들뿐이 아니었다. 한 발 뒤에서 지켜보던 수로채 놈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굳어졌다. 파앙! 그때, 날아가 물속에 처박혔던 자가 다시 뛰어올랐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모두 공격하라! 수로채를 능멸한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무진에게 달려듦과 동시에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실 이는 그가 독단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수로채와 연결시키면서 다른 이들의 참전을 막으려는 수작이었다.
“모두 물러서시오!”
그렇게 동시에 달려드는 그들의 행동은 아직 때 묻지 않은 무진을 흔들어놓은 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이야 충분히 저들을 쓰러뜨릴 능력이 있지만,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자, 이러면 정당방위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천화와 설영이 그 말과 함께 즉시 참전을 했으니까.
“쫄따구들은 맡아주지!”
“고맙소, 소협!”
천화가 손짓하여 다른 무인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동시에 설영과 함께 달려드는 수로채의 무인들을 막아섰다. 무진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잔챙이들은 맡아주겠다는 것이다. 무진 역시 그 둘의 무공 수위를 짐작했기에 믿고 뒤를 맡길 수 있었다. 사실 말이 잔챙이지, 조장급쯤이나 될 법한 녀석과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실력을 지닌 일류와 이류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한들, 두 사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몸 풀기밖에 안 되겠군.”
역혈기공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남해삼십육검이나 다른 무공을 꺼낼 필요도 없이, 딱 한 칼씩만 먹여주면 끝이었으니까. 게다가 마지못해 나서는 듯하던 설영이 절정에 임박한 무공 수위를 뽐내며 그들을 베어갔기에, 정작 천화가 상대한 것은 서넛밖에 되지 않았다.
“회개하시오!”
콰앙!! 그사이 무진은 몸을 휘돌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내의 가슴에 깊은 발자국을 새겨넣고 있었다. 용무선회각(龍舞旋回脚). 곤륜파의 고절한 수법들이 하나하나 풀려나왔다. 하지만 천화는 알고 있었다. 저조차도 많이 봐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 증거로 내상을 입어 비틀거릴지언정 목숨은 붙어있지 않나? 만약 전력으로 걷어찼다면 무공 따위를 쓰지 않더라도 가슴뼈가 함몰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쿨럭!”
“아직도 더할 참입니까? 그대들은 본인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비, 빌어먹을 도사 놈이……!”
도사이기 때문일까, 두들겨 패기는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마지막 아량을 베풀겠다는 듯 타이르는 무진을 보며, 상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간다면 채주에게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때문에 놈의 눈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채주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그러고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그대로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아이고! 이제 나는 망했다!!”
“?”
나머지 수로채의 일원들까지 제압되어버린 상황에서, 선주가 거의 울음을 터트리며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으나, 그 이외에도 많은 상인과 무인들이 두려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선주께서는 왜 그러시는 것이오?”
“도사님,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저는 이제 망했습니다!”
실컷 도움을 주고도 원망만 한아름 떠안게 된 것이 당황스러웠는지, 무진은 천화와 설영에게 감사의 인사조차 표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거리며 당황스러워할 뿐이었다.
“저는 이 장강을 오가며 먹고 사는데, 장강수로채와 이리 척을 지게 된다면 저는 밥줄이 끊기게 됩니다요. 도사님께서는 그냥 떠나시면 그만이지만 이제 저는 어찌합니까!”
무려 장강수로채의 무인들을 가볍게 해치운 이였지만, 선주는 겁도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곤륜의 도사가 그 정도로 해코지를 할 리 없다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상황이 절박한 것이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책임지리다.”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무진이 표정을 굳히며 돌아섰다. 대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일까? 모두가 의아해할 때, 그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이곳의 채주와 담판을 짓겠소. 그럼 문제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문제를 일으킨 수로채의 채주와 담판을 짓겠다는 것이다. 그 말에 모두의 눈에 희망이 떠올랐다 금방 사라졌다. 장강수로채의 총채주도 아니고, 18채 중 하나의 수장이니 어떻게든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쉽지 않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곤륜의 도사라 해도, 측정 할 수 없는 고수라고는 해도 혼자서 그들 모두를 어찌하긴 어려울 테니까. 무진이 아무리 구파일방의 일원인 곤륜파의 고수라고는 하나, 상대 역시 사파로서 중원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깔고 버티는 장강수로채가 아닌가? 설혹 절정 고수쯤 되더라도 채주와 부채주, 간부 등이 모두 절정 고수인 그들을 꺾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장 그들을 어찌하기 위해서는 대문파 두엇이 힘을 합쳐야한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니까. 어찌어찌 말로 잘 해결이 될 수도 있지만 그가 떠나간 이후에 어떻게 태도를 바꿀지도 알 수 없었고.
“같이 가지?”
하지만 무진은 그런 생각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 수로채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런 무진의 옆으로 천화가 섰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이번 일을 이용해먹을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무진과의 인연을 맺어두기 위함이 더 컸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을 테니까.’
사실 이전의 무위,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던 그때의 무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친분이든 세력이든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천화 혼자서도 마교고 무림맹이고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때의 무공을 회복하기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급변하는 정세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대신해 중원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결해줄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하다못해 고인물이 아닌 일반 플레이어들이 몇 명만 함께 하더라도 그들을 가르쳐 자신을 대신할 수 있게끔 만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다른 조력자를 찾고 인연을 맺어둘 필요가 있었다. 바로 무진과 같은 실력자들. 중원은 넓고 몸은 하나이니, 기존의 실력자나 잠재력이 있는 이들을 키워서 대체시켜야 하지 않겠나? 고불도 그중 하나였고, 남만야수궁 역시 그 일환이었다.
“아, 소협. 인사가 늦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협은 무슨. 형이라고 불러.”
무진의 옆에 나란히 선 천화는 빙긋 웃으며 친근하게 굴었다. 무신지로에서도 무진의 순진함이 마음에 들었던 천화였다. 다만 덩치로 보나 외모로 보나 누가 형인지 알기 어려웠기에 설영도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놀랍게도 무진의 나이는 아직 약관이 채 되지 않았다. 18세. 도저히 믿기지 않는 나이이기는 했지만 실제가 그러하니 뭐 어쩌겠나. 이전에는 천화 역시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했기에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그 모습에 무진의 표정도 점차 풀어졌다.
“예? 하지만…….”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왜, 힘 센 놈이 형이다. 뭐 그런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좋습니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역시 자신을 어려워하는 이들 속에서 자라다 보니 이런 친밀한 관계가 내심 부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호구 짓도 많이 했지.’
그 탓에 여기저기 친근함을 표시하다가 이용도 많이 당했다. 그럼에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인상적이었고.
“그럼 됐고. 내 이름은 천화. 이쪽은 설영이야. 누나라고 부르든 누님이라고 부르든 그건 알아서 해.”
“저, 저는 곤륜파의 도사인 무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저도 잘 부탁할게요.”
인피면구를 썼다고는 하나 여성임이 드러나는 터라, 무진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도문인 곤륜파가 있는 산속에서만 지낸 터라 여성을 대하는 것이 영 서툰 것이다.
“쀼우!”
“이 녀석은 은룡. 한 녀석이 더 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주지. 그래서, 진짜 가겠다 이거지?”
“예. 저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입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은룡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표시하자 천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의 의사가 분명하다면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혼자 보내봤자 수로채의 수채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터라, 허탕을 치거나 문제만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야, 일어나.”
“크윽?”
무진의 의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천화는, 제압되어 있던 수로채의 인원들을 툭툭 차서 일으켰다. 이 배를 타고서 수로채에 접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통 장강수로채의 수채는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은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물길을 모르는 이 배의 선원들로는 가까이 다가서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이들이다. 제 집처럼, 아니 실제 제 집인 녀석들이니 적어도 난파를 당할 일은 없지 않겠나? 그들을 모조리 이끌고 배를 옮겨 탄 천화가 선주를 향해 한 가지 약속을 받았다.
“내일 이 시간까지만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때까지 저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냥 가셔도 좋습니다. 그럴 경우 선주께서 피해를 입으실 수도 있으니,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고 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이걸 맡기도록 하죠.”
그들도 일을 끝내고 다시 타고 갈 배가 필요하니 여기에서 하루만 기다려달라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죽거나 도망칠 경우 선주의 피해가 우려되니 약간의 돈을 맡겨 안심을 시켜주었다. 무려 금자 50냥. 평생의 일터를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작은 금액일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보상이 될 터였다. 물론 그것을 그냥 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 천화였지만.
“흠흠, 혹여 제 시간에 못 오더라도 호북성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따라잡겠습니다. 그럼 이 돈을 돌려주시고, 아니면 모두 가지십시오.”
“이렇게 큰 돈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닌데? 줄 생각 없는데? 설마 그냥 먹고 튀는 건 아니겠지? 천화는 살짝 불안해졌다. 하지만 설마하니 장강수로채와도 맞짱 뜨는 고수를 상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배를 완전히 옮겨탔다. 수로채의 무인들을 다그쳐 수채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