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흑점 (3)2021.06.24.
천화가 긴장하며 꺼낸 것은 얇은 시집이었다. 연인에게 바치는 사랑의 시가 담긴 간질간질한 시집이었지만, 그 순서를 뒤섞어 어떤 법칙에 따라 읽으면 그 의미가 전혀 달라졌다. 무공 구결. 그것도 아주 강력한 무공을 전수하는 구결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물에 적실 경우, 텅텅 비어있는 여백으로 그림이 떠오르기 때문에 물 위에 펼쳐놓고 익힌다면 세밀한 동작까지도 확인 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비급이었다.
‘땡 잡았네.’
이것이 여기 있다는 소리는 흑점에서도 그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뜻일 테니, 자신이 비급을 얻었다는 사실조차도 어딘가에 흘러나갈 걱정도 없었다. 씨익 천화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이전에도 종종 등장했던 이 숨겨진 비급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쓸어담을 차례였다. 심지어 무공이 아닌 희귀 도서들은 비싸다고 해봤자 금자 10냥을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현재 천화의 자본력이라면 대략 20권 가까이까지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무공 진화를 사용해 천화만변무상심법을 얻기는 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무공이 부족했던 천화의 약점 아닌 약점을 충분히 보완해줄 수 있을 테니까.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군.’
세상 모든 무공을 알고 있는 천화인지라 사실 다른 무공이 없더라도 동급의 무인들은 충분히 압도할 수 있지만, 더 높은 경지로 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중심이 될 무공이 필요했다. 절정을 넘어 초절정 이상까지 간다면 이미 초식이 의미가 없어지는 무초식의 경지에 오르게 되고, 그때가 되면 예전의 천화처럼 딱히 독문 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누구든 때려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 경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상승의 무공을 익히는 편이 훨씬 수월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흑점의 존재는 무척이나 달가운 것이었다. 이 중에는 익히는 것만으로 은원이 생겨나는 무공들도 있긴 하지만, 그 위력만은 확실하니까. 실제로 무신지로에서는 그런 말이 있었다. 만약 고인물 중 하나가 흑점에서 얻을 수 있는 무공들을 독점할 수 있다면, 그는 최소 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사용하는 내공 심법과 내기의 운용 경로가 다르기 때문에 실현되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정도로 이곳에 감춰진 무공들은 고강한 것들이었고, 잘만 익히면 천하제일을 논하기에 충분한 것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천화는 눈을 반짝이며 몸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서고를 샅샅이 뒤지며 자신이 알고 있는 숨겨진 무공 비급들을 몽땅 쓸어담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 정도인가?’
천화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멈춰선 것은 서고를 뒤지기 시작한 지 약 두 시진이 지나서였다. 서고에는 워낙 많은 서책들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저 확인하고 골라내는 것만으로 그만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렇게 찾아낸 서책의 수는 총 다섯 권. 생각 같아서는 더 많은 서책을 구입하고 싶었지만, 딱히 쓸 만한 것이 더 없었다. 덕분에 무려 흑점에서, 돈을 더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흑점에서 취급하는 물품들은 그때그때 바뀌기에, 이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차후에 다시 흑점이 열렸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방문한다면 몇 개의 무공을 더 건질 수도 있을지 몰랐지만 ,한번 흑점이 자리를 옮기면 언제 또 다시, 그리고 어디에서 열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다음이 있다고는 천화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또 기회가 있겠지.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절정 이상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 자신이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가자.”
“응? 다 샀어?”
천화가 만족하며 서책의 값을 치르자,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보던 설영이 화들짝 놀라 책을 덮었다.
“…….”
천화는 그 표지를 슬쩍 보았지만 황급히 다시 꽂아넣는 설영을 보며 짐짓 모르는 척을 했다. 무신지로에서도 제법 유명했던 연애소설의 이름인 것이다. 그 존재에 대해 구전으로만 떠돌 뿐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전설의 명작으로 불리던 것인데, 여기에도 한 권 있었던 모양이다.
‘수위가 꽤 높았지 아마.’
설영의 사생활을 지켜주기로 마음먹은 천화는 짐짓 모르는 척 앞장서서 밖으로 나섰다.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워낙 큰돈이 오가는 곳이기 때문인지 물품 구입에 신중을 구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1층에 몰려있었고, 천화는 다시 한 번 계단을 올랐다.
“흠흠. 나는 그저 시간을 때우려고 아무 책이나 읽고 있던…….”
“여기에 별게 없으면 약도 살 수 있겠는데?”
그사이 다가온 설영이 뭐라 변명을 했지만, 민망한 것은 천화도 마찬가지였기에 다시 화제를 돌렸다. [잡화. 기물.] 3층은 온갖 잡화들과 기물이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도 뭔가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아낀 돈으로 바로 옆 전각에서 무언가를 살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 전각에 있는 것은 영약. 보관이 무척이나 중요한 놈들이기에 아예 따로 전각을 마련하여 보관 중인 것이다. 그곳에는 아예 연단을 마친 영약도 있었고, 그 자체로 약이 되는 오래된 산삼이나 하수오 따위의 천연 영약들이 즐비할 터였다. 당연히 무인에게 생명과도 같은 내공과 관련된 물품이니 가격은 터무니없을 만큼 비쌀 테지만, 가격만 맞다면 사지 못할 것도 없다. 천화가 그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곳 흑점에서 탕진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문제는 어지간한 영약들은 금자 100냥부터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영약들은 제법 수준이 높았기에, 그 값을 치르고서라도 차지하려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일단 둘러보자.”
“으, 응.”
머쓱해진 설영과 천화가 얼른 아무 문이나 골라 입장했다.
“와! 이거 예쁘다!”
“그거 손대지 마!”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인들의 장신구였다. 온갖 잡화들도 취급하는 것이니 여인의 장신구가 있는 것도 당연했지만, 천화는 얼른 설영의 손목을 낚아챘다. 너무 값비싼 것이라서? 아니다. 그 자체가 너무 위험한 물건들이기 때문이었다. 암기. 그것은 장신구의 형태를 띈 기형 암기인 것이다. 잘못 건드리면 극독이 발라진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와서 화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급히 제지한 것이었다.
“암기야. 제대로 사용법을 모르면 건드리다가 다칠 수도 있어.”
“이게?”
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데 그처럼 위험한 물건이라니. 설영의 안색이 변하는 동안 천화는 빠르게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호신용으로 암기 한두 개쯤 챙기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니까.
“흐음. 살벌하네.”
쭉 둘러보자 익숙한 암기들도 제법 보였다. 암기라면 일회용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 가치가 높은 것들은 상대를 죽인 후 회수하여 두고두고 쓰기도 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독문무기처럼 사용되던 것도 있었다.
‘암왕이 흑점을 제대로 털었나 보네.’
특히 암기술로 이름을 날리던 일명 암왕의 무기들도 더러 보였다. 극독이 묻어있거나 호신강기를 파괴하는 전문적인 암기들이다. 그중 몇몇은 천화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들이니 위력은 검증된 셈이지만, 하나같이 가격이 너무 높았다. 아무래도 암기이다 보니 흑점 역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암기 하나하나가 최소 금자 300냥을 넘어섰으니까. 설영이 첫눈에 반한 것처럼 미적인 가치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그들로서는 손에 넣기 어려운 가격이었다.
“그러니까 먼저 손대지 말고 나나 점원에게 물어봐. 가격이 맞으면 돈이야 꿔줄 수도 있으니까.”
“칫. 그냥 하나 사주면 어디가 덧나냐?”
설영이 투덜거리긴 했지만, 어디 한두 푼이어야지. 따지고 보면 초반에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것은 설영의 도움도 컸으니 저잣거리의 노리개 정도라면야 열 개라도 사줄 수 있다. 하지만 금자 수십 냥을 기본으로 하는 흑점에서라면 글쎄. 설영이 그동안 빌린 돈을 갚는다면 모를까, 어려운 일이었다. 흑점이 아니더라도 돈이 필요한 곳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설영 역시 가격이 너무 비싼 것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기에, 그저 안목을 높인다는 생각으로 둘러볼 뿐 이후로도 딱히 뭔가를 사달라거나 돈을 꿔달라고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어?’
그사이 천화는 물품들을 샅샅이 훑었다. 일부는 만져보는 것이 금지된 상품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물품들이라면 이미 대충 외형 정도는 알고 있는 천화였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다,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칠현금을 발견했다.
‘이게 여기에 있었어?’
겉보기에는 평범했고 직접 연주를 해보아도 튼튼하고 소리가 좋은 악기에 불과했지만, 천화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악마금. 한때 그리 불린 바 있다는, 정사대전 이전부터 존재하던 물건이었다. 금 자체의 성능 따위도 좋았지만 그 주인으로 인해 악명을 떨쳤던 기물 중의 기물이다. 그 주인이 음공으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니까.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광역 즉사기를 썼다고 했던가?’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른 후, 자신의 생일날 습격해온 고수들을 그저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몰살시켜버렸다는 악마 같은 힘의 소유자였다. 어느 순간 작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기에 전설처럼 기록으로만 남은 자이기도 했다.
마지막에 천화가 고금제일인의 칭호를 얻었으니 그보다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기는 했지만, 사실 천화로서도 한번 붙어보고 싶던 인물이기도 했다. 강함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붙어보지 않으면 그저 별호 따위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나중에 플레이어들 중 하나가 저것을 얻은 뒤, 그의 진전을 일부 이어받아 명성을 떨치기는 했으나 경지를 이루기도 전에 사고를 쳐서 무신지로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천화는 기억했다.
‘하지만 확실히 무시무시하긴 했지. 낮은 성취로도 상당한 명성을 쌓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천화가 익힌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사라졌던 이처럼 음공만 집중적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보조적인 수단으로 익힌다면? 그가 실수했던 부분을 알고 피해갈 수 있다면?
‘재미있겠네.’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미 제 스스로의 무공으로 고금제일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던 천화인 만큼 굳이 음공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취미 하나 얻은 셈치더라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더구나 음공은 대부분의 무인들에게 천시 받는 것이지만, 우습게도 악기를 다루는 것은 무인들의 교양처럼 여겨지니까.
“저걸 사죠.”
때문에 천화는 살짝 흥분이 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악마금을 구입했다. 그리고 흑점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설영이 사용할 인피면구와 몇 가지 자잘한 물품들을 추가로 구입하고 전각을 빠져나왔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그 탓에 마지막 전각에는 아예 들르지도 못했지만, 사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내공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임독이맥을 뚫어내고 절정의 무위를 얻어낼 자신이 있는 천화였지만, 그만큼 대단한 영약을 구입하려면 수천 냥이 있어도 부족할 수 있었으니까. 금자 100냥쯤 투자해서 하수오 몇 뿌리를 얻는다 해도 당장 눈에 띄는 무언가를 이루기는 어려웠기에, 잡서로 위장된 비급들과 악마금을 얻은 것에 만족하며 흑점을 빠져나왔다. 멀리 숨을 것도 없다. 그게 더 이상해보일 테니까. 천화는 곧장 주변 객잔에 들러 방을 잡았고, 약간의 준비물들을 챙긴 뒤 일단 구입해온 잡서들부터 꺼내놓았다. 낱장을 뜯어 재조합하거나, 물에 적셔 숨겨진 글자를 찾아내는 등 그것들에게 비급의 형태를 되찾아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