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장문인이 기다리십니다 (4)2021.07.15.
“확인한다던 건 다 한 거야?”
“응. 아마도.”
한참이나 굳은 표정을 유지하던 설영이었기에 천화도 조심스러웠지만, 들려온 대답은 의외로 시원했다. 확신에 가까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뭘 확인한 건지 물어봐도 돼?”
예상이 되는 바는 있었다. 아마 혈마에 대한 그들의 적대심과 혈마를 대적할 방법을 가지고 있느냐 정도겠지. 그렇다면 그들에게 혈마검을 제어할 방법 따위가 없다는 것을 말해줘야 할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설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들의 실력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그들이 혈마의 후예들을 막고, 천하로부터 혈마검을 지켜낼 수 있을지를 봤어.”
예상과 조금 다른 대답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그 속에서 미묘한 표현까지 놓치지 않았다. 혈마의 후예‘들’이라는 표현. 그것은 아마도 나중에 등장하게 될 설영의 사형제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원래대로라면 설영이 죽고 여러 사람의 손을 타며 이동한 혈마검이 다시 그들에게 회수되고 마니까. 그사이 수많은 무림인들의 피를 머금고 힘을 회복한 혈마검과 높은 성취까지 혈마신공을 익힌 혈마의 후예들은, 소수였지만 무림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사라졌다.
‘세 놈뿐이라 다행이었지.’
그들을 쓰러뜨린 것은 천화와 다른 고인물들이었기에 놈들이 가졌던 힘은, 폭주한 혈마검의 위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실격, 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혈마검을 내어준다 해도 지킬 수 없을 거야. 아니, 그 전에 먹혀버리고 말겠지. 당장 그 장문인이라는 자의 눈에 탐욕이 있었거든.”
“눈? 탐욕?”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눈을 통해 그 사람의 감정을 대충 읽을 수 있거든. 현양 도장이 혈마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드러난 감정은 분명 탐욕이었어.”
잠시 망설이던 설영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뭐라 방법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런 특수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감추어왔던 것이다.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혈마의 후예이니까. 남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별것 아니라면 별것 아닌 능력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혈마의 후예가 그 능력을 가졌다면 마치 요괴의 능력처럼 몰릴 수도 있다. 또한 그 능력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있을 터였기에, 일생을 눈칫밥 생활을 해온 설영은 알아서 그것을 감춰 왔다. 그렇기에 천화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천화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혹여 이 능력을 이용하려 들지는 않을 것인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천화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오오오! 나는? 나는?”
“뭐, 뭐야? 저리 치워!”
“에이~, 그러지 말고 나도 좀 봐줘. 난 어떤 거 같애? 응? 응?”
신기함. 그것으로만 가득한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며 천화가 들이대자, 설영은 부담스러웠는지 손으로 얼굴을 밀었다.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섞이지 않은 그 눈이 무척 고맙고 마음에 들었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그 외의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꼴보기 싫어진 것이다.
“시끄러! 안 봐줄 거니까 저리 비켜!”
“거참 비싸게 구네! 이번 달 이자는 안 받을 테니까 좀 봐주라. 응?”
“흥! 나도 이제 돈 있거든?”
“다시 무당파로 갈 것도 아니잖아~. 그러지 말고…….”
“전……. 크흠. 아무튼 안 봐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혹시 모르지. 나한테 잘하면 나중에 봐줄지도.”
“쩝. 거 되게 비싸게 구네.”
“뭐라고?”
“아냐. 아무 말도 안 했어. 헤헤헤헤.”
무언가를 말하려던 설영은 슬쩍 말을 돌리며 투닥거렸다. 사실 무당파가 아니라도 금자 50만 냥에 대한 차용증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아주 큰 전장이라면 무기명으로 만들어진 이 차용증을 오히려 50만 냥 이상의 전표로 바꾸어 줄 테니까. 중원의 기둥이라는 구파일방 중 상위로 꼽히는 무당파에게 큰 빚을 지울 기회이니, 동가가 아니라 더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차지하려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생기지만 천화와의 관계가 조금 바뀔 수 있다. 혈마검을 핑계로 함께 다니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계약은, 돈이 없는 설영을 대신해 숙식 등의 모든 제반 비용을 천화가 내는 대신 호위무사 역할을 해주는 것이니까. 이미 천화 역시 일류 수준의 무위를 갖추고 있는 데다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호위가 필요 없어지는 경지에 이를 것 같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함께 다니고 싶은 설영이었다.
‘그때쯤이면 나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혼자만의 생각을 품은 채,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치이이이이이익-
“으응?”
무당파에 간다고 잔뜩 긴장했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늦잠을 자던 설영은, 코와 귀에 거슬리는 무언가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참.”
눈을 부비며 일어나자 이미 천화가 일어나 식사를 준비중인 것이 보였다.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이 어디있…….”
“무우?”
“쀼?”
한창 돌판에 삼겹살을 굽고 있는 천화에게 핀잔을 주려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흑우와 은룡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이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무당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화식을 삼가는 무당파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고기를 먹지 않거나, 문을 걸어잠그고 숨어서 먹는 탓에 어제는 고기를 먹지 못하기도 했고.
“일어났어? 와서 한 점 들어!”
치이이이이익- 삼겹살이 맛있게 구워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지만, 아침부터 저런 걸 먹었다가는 하루 종일 속이 부대낄 것 같았다. 설영은 자리를 잡고 앉긴 했지만 삼겹살 대신 천화에게 넘겨받은 과일 하나를 베어물었고, 나머지 셋은 자신들의 몫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 즐거운지 기분 좋게 웃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천화. 그러고 보니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말을 했지?”
“처음 만났을 때?”
그 말에 천화가 움찔 몸을 떨었다. 진짜 처음을 따진다면 천화가 설영의 뚝배기를 깨고 기절시킨 때였으니까. 설영은 아직까지도 그때 천화가 자신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이 흐려져 기절한 걸로만 알고 있었지만, 찔리는 것이 있는 천화로서는 뜨끔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응. 혈마검을 쓸 만큼 쓰면 돌려주겠다고 했잖아.”
그러나 다행히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설영이 이야기하는 처음은 기연 동굴에서 그녀가 천화를 찾았을 당시였고, 천화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지?”
“그게 언제까지를 이야기하는 거야?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 아니면 무공 수위를 높였을 때?”
그때는 초천재이니 하는 말에 속아넘어갔지만, 이제는 설영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천화가 혈마신공에 대해 알고 있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익힐 생각은 없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혈마신공을 펼치거나 수련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저 운기조식을 할 때 보다 많은 축기를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말 강호초출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들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을 볼 때, 천화는 그저 무공 수위를 높이기 위해 혹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혈마검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일단은…… 절정까지는 찍어야겠지?”
뭔가 오해가 있음은 분명해보였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천화도 진지하게 그것에 답했다. 실제로 혈마검이 필요한 이유는 초반에 아이템 빨을 이용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삼재심법으로 좀처럼 모으기 어려운 내공을 높이는 용도가 컸으니까. 따라서 천화만변무상심법을 얻은 지금은 그 효용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여전히 도움은 되지만, 혈마검으로부터 얻는 기운보다 운기조식을 통해 얻는 내공의 양이 더 큰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데 점차 성취가 높아진다면 그 비율은 더 격차가 벌어질 것이고, 굳이 혈마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를 터였다. 천화가 예상하는 경지는 절정. 그때가 되면 내공도 내공이지만 무공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 될 것이다. 아무 철검이나 들어도 충분히 무위를 드러낼 수 있을 테고, 여차하면 무명검을 내보여도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준에 이르게 되겠지.
“절정 고수라……. 그래. 너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네.”
만약 다른 이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돌려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터였다. 설령 설영처럼 약간의 깨달음을 얻고 임독이맥을 뚫기만 하면 바로 절정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상태라 할지라도 말이다. 젊었을 때 일류 고수의 경지에 이르고도 벽을 뚫지 못해 절정의 단계를 밟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무인들이 얼마나 많던가? 때문에 다른 이였다면 그냥 이 자리에서 회수해가겠다며 사생결단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천화이기에 수긍할 수 있었다. 삼류 무인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던 첫 만남 때부터, 기연이라 부를 수 있는 영약과 내단의 섭취가 있었다고는 하나 불과 몇 개월 만에 일류 고수가 된 천화가 아닌가? 게다가 이미 자신의 경지보다 월등한 이들을 몇 번이고 꺾어낸 신비한 힘을 지닌 천화였기에, 설영은 그날이 곧 오리라는 것을 믿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빠르게 절정 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 천화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참이야? 무당파에서 추천장이라도 받아올걸 그랬나?”
“에이, 그런 아까운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아마 공짜로 추천장을 얻더라도 그 말코 놈들은 분명 우리가 성적을 올리면 자기들 공으로 만들어버릴걸?”
“흐음. 하긴.”
한정된 인원에게만 부여되는 배첩과 추천 권한이니, 누구의 추천장으로 비무 대회에 참가했는지 역시 중요했다. 그리고 추천한 인물이 높은 성적을 기록하면 추천자의 명성 또한 함께 올라가겠지. 만약 무당파와 연줄을 만들고 싶다면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 굳이 남 좋은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더구나 무당이 얼마나 제 잇속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된 이들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때문에 천화는 정론에 가까운 말을 내놓았다.
“명성을 얻어야지.”
천화가 기름진 입으로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든, 다른 이들의 배첩을 사거나 빼앗든 일단 개인의 명성을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올려두는 것은 필수였다. 물론 그들 수준에서 배첩을 빼앗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남의 배첩을 빼앗는 행위는 수많은 원한을 만드는 일이니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는 것이 좋았으니까.
“우린 아직 별호조차 없는 강호 초출이잖아? 그러니 명성을 얻고, 별호도 챙기고, 그걸 바탕으로 추천장이나 배첩을 손에 넣는 것이 우선이야.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명성을 얻으려고 비무대회에 출전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왜, 넌 별호 있잖아. 호북정협이던가?”
“야!!”
천화의 말에 설영이 놀리기는 했지만 그 뜻에는 동의했다. 일단은 명성을 올린다. 무위가 높다고 비무대회에 출전할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니었으니, 천화의 말대로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시간도 기껏해야 두 달 남짓이라며.”
하지만 어떻게? 명성을 올리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칼춤을 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문파나 쳐들어가서 도장깨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막막할 수밖에 없다. 실력으로만 따진다면 당장 추천장을 얻어낼 자신이 있지만, 명성이 없다면 추천장을 써줄 만한 인물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그래서 무신지로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명성 작업에 골머리를 썩거나 학을 떼었다. 일정 궤도에만 올릴 수 있다면 똥을 싸도 명성이 오를 테지만, 그 이전까지는 꽤나 시간이 드는 작업인 것이다.
“흐흐흐. 다 방법이 있지. 일단 따라오기만 해.”
또 다시 음흉한 미소를 짓는 천화의 모습이 꺼림칙했지만, 동시에 믿음직스러웠다. 천화가 저런 미소를 짓고 나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물론 그 과정이 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