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무공은 됐고요, 꿀이나 빨렵니다 (1)2021.08.24.
디리리링- 두 사람이 급히 운기에 들어가 깨달음을 수습하는 동안, 천화는 호법을 설 겸 곁에 서서 악마금을 연주했다. 심신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음악을 연주하여 그들의 집중을 돕는 것이다. [악마칠음(3성)의 숙련도가 0.3만큼 상승했습니다.] [악마칠음(3성)이 악마칠음(4성)으로 성장했습니다.]
‘꿀이구만.’
그리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연주를 통해 상대의 감정과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은 음공의 기본이었으니까. 사실 이것이 아니라도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숟가락 하나 얹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의 변화가 천화의 연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그 거대한 변화에 일조하는 것만으로도 악마칠음의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스르르륵- 잠시 후,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감겼던 눈꺼풀이 올라갔다. 맑은 정광을 토해내는 두 사람의 기도는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후우…….”
“끝났냐?”
일단 설영의 기도는 확실히 달라졌다. 몸 안에 들끓는 내공이 임독이맥에 막혀 원활히 흐르지 못해 태양혈이 불쑥 솟던 것이 가라앉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듯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은 확실히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절정. 일류를 넘어선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절정 고수라 불러 마땅한 상태가 되었고, 내공뿐만 아니라 혈마신공의 성취마저 달라진 것 같았다.
“잠시만.”
우우우웅- 혈마검을 쥐고 내공을 가득 끌어올렸지만 혈마기 특유의 붉은 기운은 넘실거리지 않는다. 혈마신공 7성의 경지. 처음 만났을 때는 5성에 불과했지만 내공의 증진을 이루며 6성에 도달했고, 절정의 벽을 허물며 7성에 이른 것이다. 혈마기를 감추지 않고 전력으로 발휘한 것이 혈마기를 감출 수 있는 7성 경지의 단초가 되다니, 실로 재미난 일이었다.
‘실패했군.’
하지만 곧이어 시선을 돌린 천화가 도왕에 대해 내린 평가는 냉정했다. 화경에 대한 단서를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방법까지는 찾아내지 못하고 일단 깨달음을 수습한 것이다. 이전보다는 약간, 아주 약간 진보한 느낌이지만 화경의 벽을 넘어섰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자네 덕분에 아른거리던 다음 경지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네. 자네에게는 계속 신세만 지는군.”
그러나 도왕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싶었다. 그 정도의 위치에서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평생을 바쳐도 실마리를 찾을까 말까 한 요원한 일이었으니까. 헌데 지금은 그 방향을 찾아내지 않았나? 이것이 제대로 된 길인지는 계속해서 궁리하고 또 궁리하여 판단해볼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틀린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천화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의 치료부터 깨달음의 단서를 준 것, 그리고 호법을 서준 것까지. 아직 한참의 경지 차이가 나는 둘이었지만, 오히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도왕이었다.
“제가 이긴 겁니다?”
“……뭣?”
스윽 천화는 손가락을 들어 도왕이 다리 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도왕도 그 말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허……. 이거 참.”
가부좌를 틀기 위해 땅에서 다리를 떼었으니 자신이 이겼다는 것이다. 애초에 약속은 도왕이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도왕은 다시 한 번 아이처럼 우겨볼까 하다가, 말을 삼켰다. 천화에게 가르침을 내려주고 싶지만, 본인이 저렇게나 거부하는 데다 천화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치 언젠가 만났던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도인처럼.
“좋아. 인정하지.”
결국 강제로 대련을 펼치는 것을 포기했다.
“일단 들어가시죠. 아주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 같으니. 게다가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요.”
천화는 아예 그가 딴 말을 하지 못하도록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그들이 깨달음을 수습하는 동안 벌써 몇 시진이 지나서 날이 어둑해진 것이다. 물론 어둠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세 사람이었지만, 지금쯤이면 황금잉어탕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도왕의 부인 또한 일어났을 터였기에 식사를 핑계로 마당을 떠난 것이다.
“부인!”
“상공, 잠시만 기다리셔요. 이제 곧 준비가…….”
마당을 돌아 다시 안채 쪽으로 향하자, 놀랍게도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여인이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세 사람의 발소리와 말소리를 듣고 잠시 나온 모양이었다. 와락! 그 모습에 손무양이 얼른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그녀였으니까. 불과 몇 시진 만에 걸어다닐 정도로 몸이 회복한 것이 감격스러웠고, 또 걱정스러웠다. 저러다가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마음을 졸이며 그녀가 들고 있는 소쿠리를 대신 받아들었다.
“상공. 소녀는 괜찮답니다. 상공께서 구해주신 잉어를 먹고 참으로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 남편의 모습에 부여담은 빙긋 웃어보이며 그를 떨어뜨렸다.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났답니다. 찬은 별로 없지만 정성껏 준비해보았으니 시장기만 달래셔요. 더 좋은 걸 대접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원래 아무거나 잘 먹거든요.”
사실 천화는 이미 그녀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미 몸을 어느 정도 회복했고,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두었을 뿐이었다. 괘념치 말라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고, 단촐하지만 정성껏 무친 나물들을 반찬으로 게걸스럽게 배를 채웠다.
“다시 한 번 자네들에게는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당장은 부인의 회복을 도와야 하겠지만 도왕의 이름을 걸고, 앞으로 자네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도왕은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왕 손무양의 호감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아내를 살려준 것만으로도 목숨을 바쳐 그들을 도울 텐데, 생각지도 못한 무공에서까지 역으로 도움을 받았다. 그러니 혈마가 아니라 천마의 후예라 하더라도 그들을 도울 터였다.
“일단 아주머니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나 지내세요. 환자에게는 마음 편한 게 최고입니다.”
“이를 말이겠나.”
허나 천화는 그런 말을 듣고도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손무양은 그런 천화의 태도가 신선했다. 마음에 들었다. 도왕이라는 이름 때문에 모두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조심하며, 무언가를 요구해왔으니까. 물론 자신이 도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접근한 것이니 천화와 설영이 은근히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역으로 먼저 그들에게 물어왔다.
“혹,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겠나?
“도울 일이요? 그다지……. 아!”
“뭔가?”
천화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애가 닳았는지, 손무양이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뭐, 별건 아닌데. 정 그러시면 추천장이나 한 장, 아니 두 장만 써주세요.”
“추천장?”
다름 아닌 추천장의 부탁이었다. 이미 친밀도가 최상까지 치달은 그였으니, 소원권처럼 부탁 한 번을 들어준다든가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이것으로 은혜를 갚았다느니 하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천화도 담담히 그것을 부탁한 것이다. 해줘도 그만, 안 해줘도 그만이기는 하지만 이왕 명성을 얻고 주목을 받기로 마음먹은 참이니, 도왕의 추천장을 가지고 가면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겠지. 갑자기 무슨 추천장을 말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천화가 간략히 무림대회에 대해 설명하자, 그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써주겠네. 두 장이 아니라 열 장, 백 장이라도 써주지.”
본디 추천장은 저명한 인사라 할지라도 그 수가 제한되지만, 도왕쯤 되는 인물이라면 둘이 아니라 열을 추천해도 받아들여질 터였다. 즉시 지필묵을 준비한 그는 그 자리에서 간략하게 천화와 설영의 이름을 담은 기명 추천장을 적었고, 마지막으로 본인을 증명하는 인장을 찍었다.
‘진천도의 자루가 평평하다 싶더니, 저런 용도로도 쓰이는 군.’
자신의 신물인 진천도의 자루 끝에 인주를 묻히더니 낙관처럼 꾹 눌러 인장을 찍은 것이다. 그 형태가 특이하기도 했지만, 감히 도왕의 인장을 거짓으로 흉내낼 미친 작자는 없을 터였으니 가짜라고 오해받을 걱정도 없었다.
“아참. 혹시 여기 말고 달리 가실 곳이 있을까요? 아마 며칠 내로 좀 어수선해질 것 같은데.”
“이곳을 떠나라는 말인가?”
추천장을 받아든 천화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하자 도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인이 어수선해진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하나였으니까. 곧 싸움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어떤 정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름 사람도 아닌 도왕, 천하십대고수 중 하나인 그에게 하는 말이었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 누가 있어 자신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니 소란을 피우는 중에라도 자신과 마주친다면 당장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이 뻔했다. 헌데 천화는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강호를 떠나있었다고 하지만, 얕보이기라도 한 것일까?
“아주머니도 생각하셔야죠.”
“흐음…….”
하지만 곧 이어진 천화의 걱정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내를 지키면서도 충분히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실력을 지닌 그였지만, 그건 아내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차도를 보였다고는 하나, 지금처럼 쇠약해진 상태로는 격한 움직임을 보이다 다시 몸이 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렇군. 무슨 뜻인지 잘 알겠네. 헌데 궁금하기는 하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겐가? 이곳 무한은 관부에서도 깊이 관여하는 곳인데, 누가 그만한 소란을 벌인다는 것이지?”
“흠. 그게…….”
잠시 뜸을 들인 천화는 마지못하는 척 그에게 대략의 전말을 전했다. 마교의 인물로 추정되는 이들의 등장. 그들의 회합 장소에 변장을 한 천화가 잠입했던 일. 그리고 그들이 무한에서 어떤 일을 벌일 것이라 했던 말들을 전하며, 아마도 이틀 후 이곳 무한에서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짐작을 털어놓은 것이다. 물론 예상되는 방식은 있었다. 과거 무신지로에서 마교도들이 사용했던 방식이 몇 가지 있으니 그중 하나이겠지. 게다가 무림대회를 앞둔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후보는 좀 더 압축된다.
“마교라니……! 그놈들이 다시 중원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그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도왕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대부분의 정파 무인들이 그렇듯, 도왕 역시도 마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증오심이 있는 것이다. 소위 마공이라 불리는 특수한 무공들 중 인간을 죽이거나 괴롭히며 연성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허면, 정말 자네들만으로 괜찮겠나? 마음 같아서는 나 역시 한 팔 거들고 싶지만…….”
아내가 들을까 염려스러웠는지 기막을 펼쳐 소리가 퍼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손무양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설령 지부라 할지라도 마교의 고수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두 사람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을 테니까. 설영이 절정의 무위를 얻게 되었다지만 그들 역시 절정 고수일 터였고, 무엇보다 혈마검법을 제대로 쏟아내지는 못할 테니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나서는 것이 최선이었다. 도왕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만 돌아도 어쩌면 저들은 애초의 계획을 취소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은 그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이 알아서 물러난다면 다행이겠지만, 도왕을 상대해보겠다고 그의 아내를 노리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질 테니까. 무한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에게는 그들 모두보다 아내의 안전이 중요했다.
“그래도 아주머니를 지키는 게 우선이죠. 그리고 이곳 무한에 저희만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든 될 겁니다.”
“흐음…….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
잠시 고민하던 손무양은 한 가지 해법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