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무한 혈사를 막아라! (1)2021.08.29.
천화가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비검이었다. 손잡이가 없는 형태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검. 쥐고 찌르거나 휘두를 수도 있지만, 암기처럼 던지는 용도로 쓰기에 적합한 크기의 그것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은 실로 놀라웠다. [????][패왕]
“어……?”
비검을 받아든 천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패왕. 무려 패왕 등급이었으니까. 얇게 펴내기는 했지만 앞선 세 가지 장비들이 모두 그보다 낮은 유일 등급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흠흠. 내가 특별히 자네를 위해 힘을 좀 써봤네. 마침 가지고 있던 만년한철이 조금 있어 그것도 섞어보았지. 그랬더니 꽤나 그럴싸한 놈이 나왔더군.”
“만년한철을요?”
천화가 다시 한 번 제 손에 들린 무기를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일반 운철로 만든 것과는 무게나 질감, 온도가 다르다. 그의 말처럼 만년한철이 섞였기 때문인지,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운철도 분명 귀한 금속이지만, 만년한철은 또 그것대로 귀하디귀한 금속이니까. 아니, 쓰임에 따라서는 운철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것을 섞어서 이것을 만들었다고? 의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천화는 재깍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럼 재료가 많이 남으셨겠네요.”
바로 운철을 남기기 위함인 것이다. 천화가 넘긴 운철 덩어리는 능히 한 자루의 검을 뽑아내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비갑과 각반, 족형판을 만들고 나면 정말 한 자루를 벼려내기도 빠듯할 수준이 남는다. 그렇기에 천화가 부탁한 이 물건들을 만들고도 검 한 자루 분의 운철을 남기기 위해 다른 것들은 최대한 얇게 펴내고, 비검에는 다른 금속을 섞은 것이다. 천화가 딴 소리를 하지 않도록 귀한 만년한철까지 섞어가며!
“흠흠. 어쩌다보니 딱 검 한 자루를 만들어낼 만큼이 남더군. 나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만들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겠어.”
아니나 다를까, 천화의 물음에 영감이 짐짓 의뭉을 떨었다. 운철을 이용해 검을 만들게 해달라는 뜻이다.
“뭐, 그러시죠.”
속이 뻔히 보이는 일이었지만 천화는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다. 사실 당장 이것들을 만들고 나면 운철은 쓸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휘둘러 패기만 해도 마기가 바사삭 부서져 나갈 테지만, 일단 그 쓰임이 노출되고 나면 제대로 써먹기는 어려울 테니까.
“재료가 빠듯한 만큼 이건 시간을 갖고 공을 들여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좋습니다. 천천히 만들어주세요. 그건 나중에 찾으러 오죠.”
“정말인가?”
천화가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이자 영감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춘절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신이 나서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흐흐흐! 내 최고의 검을 만들어주지. 아, 그 녀석의 이름은 자네가 짓게.”
[비검 ‘????’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패왕 등급 이상의 장비에는 고유의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다시 관심이 만년한철을 섞은 비검으로 옮겨갔다. 패왕 등급 이상의 장비에는 최초 획득자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여기에는 그저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이름을 짓느냐에 따라 물품의 정보와 효과가 달라지기도 했다.
“이름은 이미 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천화는 그것이 패왕 등급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이름을 정해두었다.
“비영검.”
[비도 ‘????’이 새 이름 ‘비영검’을 얻었습니다.] [비영검의 새로운 정보가 나타납니다.] 비영사, 비영투. 그리고 비영검. 천화는 처음 이것의 제작을 부탁할 때부터 용도를 명확히 정해둔 것이다. 때문에 비영사에 비영검을 연결하고 이름을 확정하자 추가적인 알림창이 나타났다. [비영검이 조합 효과를 얻었습니다.] 비영검에 조합 효과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일반 판타지 게임에서는 세트 효과라 불리는 것. 무신지로에서도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있거나, 하나로 연결하여 사용하는 물품들의 경우 상승효과가 붙었다. 애초에 비영사와 비영투를 결합하여 사용하던 인영비주 박허는 이 두 가지 무구만을 사용했지만, 차후 이것을 얻은 고인물이 비검을 달아 효율성을 높이면서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유일 등급 이상의 비검을 달아놓으면 조합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천화가 이용하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기존에도 크기가 비슷한 것을 달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이왕이면 크기와 무게 중심, 위력 따위가 딱 맞는 것을 사용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덕분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조합 효과가 생겨나며 비영검뿐 아니라 비영사와 비영투의 효과도 강화되었으니까.
“비영검이라, 괜찮은 이름이군.”
“후후. 영감님. 운철검은 시간 넉넉하게 드릴 테니까 제대로만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이것.”
“이게 뭔가?”
“일을 부탁했으면 값을 치러야죠.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작업 하실 동안 생활비로 쓰십시오.”
“흠흠. 그럼 성의를 생각해서 받겠네.”
만족스레 미소를 지은 천화는 전낭을 꺼내 그에게 쥐여주었다. 부탁한 물건들을 빠르게 만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자 생활비였다. 물론 이곳에 걸린 무구 중 하나만 팔아도 몇 년은 너끈히 먹고 살 수 있을 테지만, 처음 그들이 이곳에 왔을 때처럼 굶으면 굶었지 아무에게나 자신의 제작물을 판매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성격인 탓에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판매가 아니라 자잘한 무구의 수리가 주된 수입원이었으니까. 추가로 오늘 밖에서 무슨 소란이 생기든 절대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포함해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천화와 설영은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당장 급한 일이 따로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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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일 거란 말이지?”
간밤에 놈들의 회합 장소를 찾아내지 못한 까닭에 천화와 설영도 정보가 부족했다. 무한이 그리 작은 땅이 아니었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믿을 것은 천화의 예감과 예상뿐이었다.
“아마도? 적어도 확률은 가장 높겠지.”
그리고 그곳은 무한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설영의 눈초리가 미심쩍어진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마교가 소란을 일으킬 거라고? 당장 발호하여 중원을 쳐들어올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수 있겠나? 천화의 말이니 수긍은 하면서도, 설영의 눈에는 불안과 불신이 가득했다. 자신들이 이러는 사이, 놈들이 다른 곳에서 혈겁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허나 정작 천화는 내심 확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교가 가장 잘하던 짓 중 하나였으니까. 예전의 마교였다면 무작정 힘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을 하다가 일거에 휩쓸고 내려왔겠지만, 당대 천마는 꽤나 영악한 자였다. 무공도 훌륭하지만 뒤에서 수작을 부릴 줄 아는 것이다. 게다가 무신지로에서는 플레이어들 중 상당수가 마교에 투신을 하며 지낭 역할을 하기도 했기에, 그들이 발호했을 때 정파 무림은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로 탈탈 털렸지. 그나마 각 파의 전대고수들이 나서고 은거기인들이 나타나면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지만, 그 이전까지 보여준 심계는 그 어떤 고인물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결국 천화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말았지만. 천화가 중요 분기 임무를 마치기 위해 일부러 방치하지 않았다면, 정파의 편을 들지 않고 정사지간에 위치해있지 않았다면 중원 무림이 마교의 손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당장 벌써부터 중원무림 곳곳에 포섭된 자들이 나타나고, 관부에까지 손을 뻗힌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천화의 입장에서는 더 예상하기 편했다.
‘가장 쉽게 소란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 돌고 있으니까.’
천화와 설영은 대로에서도 가장 크고 높은 주루의 상층에 자리를 잡고 소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배첩.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비무대회에 등록하기 위한 배첩 쟁탈전이 슬슬 일어날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빌미로 수많은 혈투가 일어났으니, 놈들이 이용하려는 것도 그것일 확률이 높았다. 당장 회합에서 배첩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도 하고.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도 없고.’
그렇다면 당연히 배첩을 가진 이들에게 시비를 거는 방법을 택할 터였다. 그럼 배첩을 가진 후기지수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어디일까?
“오오오, 정말 철 대협께서 배첩을 주셨단 말입니까?”
“하하. 운이 좋게 눈에 든 것일 뿐일세.”
“에이, 어디 철 대협께서 허투루 배첩을 내어주실 분입니까? 다 형님께서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겠지요.”
다름 아닌 주루였다. 추천장을 가질 만큼의 배경이나 무위를 갖춘 이들이라면 무한까지 온 김에 가장 좋은 주루에 들러 회포를 풀려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 딴에는 추천장을 가진 다른 무인들과 교류도 나누고 인맥도 쌓으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남을 통해 제 얼굴에 금칠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 중에는 돈을 주고 배첩을 구입한 이도 있을 테고 인맥으로 얻어낸 이들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한자락 무공은 지니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힘을 가졌으면 드러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보니, 멍청하게도 이런 식으로 자신이 배첩을 지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세상 참 좋아졌군. 돈이면 사람도 살 수 있는 시대이니 말이야.”
“응?”
“하물며 배첩 따위야 구하지 못할까. 별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배첩을 가지고 다니니, 이거 돈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리고 자연스레 시비가 붙었다. 실력은 있으나 배첩을 지니지 못한 이들이 마치 들으라는 듯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배첩을 돈으로 샀다는 말이오? 당신이 봤소? 내가 배첩을 돈으로 사는 걸 봤냐고!”
“그거야 뻔한 일이지. 고작 그 따위 실력으로 배첩을 지니고 있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아, 돈이 아닐 수도 있겠군. 그놈 참 엉덩이가 토실토실해 보이네.”
“뭣이?!”
채앵!!! 이런 모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면 무인이 아니다. 상대의 격장지계는 제대로 먹혀들었고, 순식간에 주루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놀고들 있네.’
하지만 여기까지는 늘상 있는 수준의 일이었다. 주루 곳곳에서 이와 같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천화는 무시한 채 주변을 살폈다. 고작 배첩을 빼앗으려 든다고 마교인이라 확신할 순 없으니까. 그들이 나서지 않더라도 이런 일 쯤이야 중원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어때, 감지되는 게 좀 있어?’
[그때 너무 멀리 있어서 정확히는……. 어? 1층에 비슷한 기운을 가진 자가 들어왔습니다!]
혈마검의 탐지에 천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주변 거리의 상황까지 둘러보기 위해 상층에 자리를 잡은 까닭에 1층의 상황은 살피기 어려웠지만, 얼른 계단 쪽으로 이동하며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감각은 예리하게, 그러나 티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계단에서 1층을 내려다보자, 이미 얼굴이 벌게진 채 맞붙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 보였다.
‘누구지?’
저들 중 누군가일까? 아니면 일반 손님처럼 위장한 누군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이지? 혈마검이 좀 더 범위를 좁혀줄 때까지 기감을 넓게 퍼트리며 상황을 주시하던 천화의 눈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한쪽에서 눈치를 보며 웅크리고 있는 자. 가까이서 본다면 주변에서 일어난 싸움에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일 터였다. 하지만 천화는 알 수 있었다. 놈의 웅크린 자세나 기이하게 꺾인 손의 각도 등은 언제라도 튀어나가 출수를 하기 위한 준비 동작이라는 것을.
‘저놈인가?’
이런 소란통을 틈타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 대부분은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부상을 입게 만드는 것에서 싸움이 그치지만, 딱 한 명만 목숨을 빼앗은 뒤 선동을 하면 주루는 아군도 적군도 없는 전쟁터가 되고 말 터였다.
‘가루?’
때마침, 미세한 가루가 흩날리는 것이 빛에 반사되어 보였다. [미량의 흥분제를 흡입하셨습니다.]
[작은 일에도 더 쉽게 흥분하게 됩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흥분제였다. 조금 들이키는 것으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격한 감정을 더욱 쉽게 촉발시키는 일종의 보조 장치일 터였다. 지금 이곳에서 무언가 일어나려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