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무한 혈사를 막아라! (2)2021.08.31.
“젠장.”
흥분제를 들이마셨기 때문일까? 점점 각 층의 무인들이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병장기를 빼어드는 소리가 났고, 벌써 부딪히며 피를 보는 자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아직 천화가 주시하던 인물이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무공 수위가 충분하다면 자신을 숨기고 사방에서 소리가 들리도록 만드는 육합전성 따위를 이용해 불을 지르는 것도 가능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어쩔 수 없이 천화가 나섰다. 제 아무리 천화와 설영이라 할지라도 그들 모두를 제압하는 것은 무리였다. 무공의 수위를 떠나서 수가 너무 많았으니까.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무인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고, 천화는 그들 모두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내공을 실어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내! 음악을! 들어!”
지이잉!!!! 난간 위에 악마금을 걸터놓고 크게 내공을 주입하자 귀를 울리는 소음이 일어났다. 설영과 도왕의 곁에서 숙련도를 차곡차곡 올린 악마칠음이 벌써 5성을 목전에 둔 상태였고, 악마금을 이용해 힘을 증폭시켰기에 그 한 번의 울림으로 모두의 시선을 잡아 끌 수 있었다.
“응?”
“뭐야, 저건?”
주루가 울릴 만큼 커다랗지는 않지만, 악마칠음의 효과로 혼령까지 사로잡는 마성을 지닌 울림에 모두의 시선이 천화에게 쏠렸다. 대부분이 목표를 바꾸어 천화에게 달려들 만큼 불쾌한 시선을 보냈지만, 천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다라라랑- 소란스레 시선을 잡아끈 것과 달리 무척이나 평온한 연주였다. 잔잔하다 못해 마음이 평온해지는 부드러운 연주에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들끓던 내기가 가라앉고 화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멋진 연주로군.”
“저런 음악을 들으며 칼부림을 할 수는 없지.”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평온을 되찾고 붉어진 얼굴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무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병장기를 집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에는 그렇더라도 배첩을 탐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괜히 지금 무리해서 칼부림을 하다가 명성이 추락하고 주변의 질타를 받을 것 같은 분위기를 읽어내고선, ‘운 좋은 줄 알아라’ 등의 중2병 같은 말들을 멋쩍게 내뱉으며 물러서고 있었다.
“이상한 사술을 부리는구나!”
쐐애애액-!! 그런 와중에, 무리를 해서 천화의 연주를 폄하하고 나아가 암수를 펼치는 자가 있었다.
‘저놈이군.’
천화가 주시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서 구경꾼 같은 모습으로 관전 중이던 인물 중 하나가 3층 난간에 기대고 있는 천화를 향해 비도를 날린 것이다. 따앙!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내력이 실린 놈의 비도는 거침없이 천화를 꿰뚫으려 들었지만, 천화는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그것을 무력화 시켰다. 난간 사이로 발을 차올리는가 싶더니 발바닥으로 비도의 끝을 차내며 방어한 것이다. 타닷! 운철을 얇게 펴낸 족형판이 비도와 부딪히며 쇳소리를 냈고, 설영이 난간 아래로 떨어져내린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누가 마교의 인물인지 명확했으니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천화가 넘겨준 혈마검을 휘두르며 놈의 머리통을 쪼개놓으려 들었다.
“제길.”
콰앙!!! 그렇게 되자 상대도 일반인 흉내를 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계속하다가는 머리통이 두 쪽이 날 테니까. 설영이 끌어올린 것은 무려 검강이었지만, 상대 역시 검강을 끌어올리며 부딪혀갔다. 거대한 힘의 충돌과 함께 주변이 터져나가고, 안정을 찾아가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튕겨나갔다.
‘쉽지 않겠는데.’
연주를 이어가며 그 모습을 지켜본 천화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혈마신공의 성취가 7성에 이르며 혈마기를 감출 수 있게 된 설영의 검강이었다. 흔한 절정 고수의 검강보다도 위력 면에서는 더 확실할 텐데, 상대는 마공을 드러내지 않고도 그것을 막아낸 것이다. 이미 본신의 성취가 절정에 달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아직 다른 조력자가 있는지는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고, 주변에 무기를 든 자들은 수없이 많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들어 빈틈을 노린다면 오히려 설영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자리를 유지하는 게 낫겠군.’
때문에 천화는 함께 1층으로 내려가는 대신, 현 위치를 고수했다. 악마칠음의 성취가 제법 올라와준 덕분에, 이제 연주를 통해 감정을 일으키는 것 이외에도 조금은 공격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여차하면 음공으로 원거리에서 설영을 지원하고, 전체적인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숨어있는 상대도 마수를 드러내겠지. 직접 검을 들고 싸움을 벌이는 것은 그때가 되어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저놈?’
그때였다. 모두가 전투를 멈추고 설영과 괴인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혈마검이 감지해낸, 그날 회합 장소에 나타났던 괴인은 놈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혼자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조력자의 존재. 살수의 그것처럼 놈의 움직임은 은밀했지만,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천화였기에 대처는 빨랐다. 투웅 내공을 실러 현을 튕기자 대기가 일렁거렸다. 허공을 격한 내기의 탄환이 놈의 가슴팍을 때렸다.
“컥?!”
우당탕 누군가의 뒤로 접근하던 놈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덕분에 설영과 괴인에게 쏠렸던 시선의 일부가 놈에게 분산되었지만, 놈은 놀랍게도 그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했다.
“이자! 이자가 내 배첩을 훔치려 했습니다!!!”
“뭐?”
“도둑질을 하려는 놈이 있다고?”
“나, 난 아니야!!”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배첩을 누군가의 발치로 떨어뜨리며 선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 소란을 틈타 배첩을 노린다고. 그러니 너희도 조심해야 한다고.
‘이 새끼가?’
황당했지만 그 작은 수작으로 인해 다시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적당히 싸움이 마무리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 틈을 타서 누군가 배첩을 훔치거나, 심지어 공격해 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싹 튼 것이다. 자연스레 패가 갈리고 다시 병장기를 꺼내드는 이들이 늘어났다.
“하, 역시 이런 평화적인 방법은 나랑 안 맞아.”
기껏 연주를 해가며 달래놓은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다시 연주를 통해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할 터였다. 연주를 통해 심리 변화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섭혼술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생각과 감정을 조종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 움직이지 마!”
“멈춰!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다가오면…….”
“이 작자가 누굴 도둑놈 취급하는 거야?!”
씨익 자신을 올려다보며 얄밉게 승자의 미소를 짓는 놈의 모습도 열이 받았지만, 흥분제를 흡입했다 해도 고작 저 따위 선동에 넘어가는 다른 무인들에게도 화가 났다.
“역혈기공.”
순간 천화의 눈빛이 달라졌다. 내공을 역혈로 돌려 순간적인 내공 상승을 이루어냈다. 콰라라랑-!! 그 모든 내공을 담아 거칠게 악마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주루 전체를 흔들었다.
“모두 동작 그만!!!”
동시에 천화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헉?!”
살기의 폭풍.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생활하는 무인들이라지만, 이같은 살기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어설픈 살기였다면 설령 강한 내기를 품고 있더라도 적대하고 경계하는 선에서 그쳤겠지만, 천화가 내뿜는 살기와 기세는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본능적인 공포. 그것이 모두의 안에 자리잡았다. 그들 중에는 무공 경지만 보자면 천화와 같은 일류급의 무인들도 다수 있었지만, 역혈기공으로 내공을 뻥튀기한 데다 특유의 살기, 그리고 악마칠음을 이용해 공포감을 증폭시켰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선동을 벌인 놈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모두 무기를 집어넣어라. 뒈지기 싫으면.”
찰캉 찰캉 찰캉 서슬 퍼런 천화의 한마디에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눈치 따위를 볼 새도 없이,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서둘러 각자의 병기를 검집 따위에 집어넣은 것이다. 물론 절정급의 무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테지만, 절정 고수라는 것이 그리 흔하게 널려있을 턱이 없다. 그동안 가는 곳마다 절정 급의 고수들을 만났던 천화가 특이한 것이지, 절정 고수는 드넓은 중원에서도 이름을 대면 대부분 알 만큼 희소한 존재였으니까.
“치잇!”
콰과광!!! 단 한마디를 던지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해버리자, 놈들도 실패를 직감했는지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다. 설영을 밀어내고, 마구잡이로 검기를 뽑아 날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크악!!”
“피해라!!!”
설영이 빠르게 움직여 대신 방어를 해보지만 그 또한 놈이 의도한 바였다. 자신의 검기 난무를 설영이 막아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뒤로 몸을 튕기며 도주를 시작한 것이다.
“거기 서……?!”
콰과과광!!!! 설영이 놈을 추적하려 했지만, 곧이어 들려온 폭음에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들린 폭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으니까.
“동시에 일을 벌인 건가?”
멈칫거린 사이 놈들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다. 아직 잡으려면 잡을 수 있지만, 선택을 해야 했다. 저들을 잡을 것인가, 다른 곳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쫓지 마!”
그 해답은 천화가 대신 내려주었다. 아마 놈들을 잡는다 해도 마교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히기는 어려울 터였다. 놈들도 꼬리자르기를 할 테니, 개인의 일탈이라든지 하는 정도로 상황이 정리될 확률이 높겠지. 어쩌면 증거를 찾아낸다 해도 오히려 구파일방 등의 대문파가 나서서 무마하려 들 수도 있었다. 마교의 발호를 알린다 하더라도 그 발표 주체가 자신들이 되어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 이번 무림대회를 여는 것이니, 천화와 설영의 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차라리, 놈들의 계획을 망치는 편이 더 나았다. 이곳과 비슷한 상황이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는 중이라면, 수많은 무인들의 희생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냥 놔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만…….’
허나 단지 희생될 무인들이 불쌍해서만은 아니다. 정사대전을 제 손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마교의 발호를 이끌어내야 하는 천화 입장에서 보자면, 마교의 행사가 성공하도록 두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천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자잘한 실패를 좀 했다고 쥐새끼처럼 숨어버리는 놈들이 아니니까.’
마교는 마교다. 권토중래를 꿈꾸며 피땀 흘려 힘을 길러온 그들이고, 그만큼 무공에 대한 자신과 중원 정벌에 대한 의지가 강한 자들이었다. 제 아무리 당대 천마가 심계 깊은 인물이라 해도, 고작 작은 작전 몇 번 실패했다고 좀 더 시간을 갖고 무림을 지켜보겠다 이야기한다면 아마 교 내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지금도 천마가 아니었으면 당장 중원에 튀어나와 살육을 벌였을 이들이었고, 강자가 있다면 기꺼이 웃으며 덤벼올 인간들의 집합이 바로 마교이니까.
“천화!”
결국 놈들을 놓쳐버린 설영이 천화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이곳 이외의 다른 장소들에서 비슷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파악한 상태였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천화의 결정을 기다렸고, 천화가 곧 답을 주었다.
“너희들. 여기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들리면 다 뒈질 줄 알아. 알겠어?”
끄덕 끄덕 싸늘하게 시선을 돌리며 엄포를 놓는 천화의 모습에 모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이다. 이렇게 해놓아도 만약 이 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교의 인물이 있다면 또 다시 난리가 날 수 있겠지만,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대충 장내를 정리한 천화는 설영과 함께 몸을 돌려 주루를 빠져나갔다.
“흩어지자!”
“응!”
인근의 다른 주루와 객잔 등 소란이 일고 있는 곳들을 향해 각기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