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너, 나랑 사업 하나 같이하자 (1)2021.09.09.
천화는 즉시 암호문을 해독했다. 사실 지금의 암호문이 천화에게는 더 해독하기 쉬웠다. 무신지로에서 마교의 꼬리가 드러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기에, 하나의 암호문 형식을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했으니까. 더구나 처음 마교의 암호문을 접했을 때, 그것을 해독해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기에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3개월 뒤라고?’
덕분에 읽자마자 암호를 해독한 천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암호문에 적힌 내용은 간단하다. 시간과 장소. 오직 그것만이 적혀있을 뿐이었으니까. 아마도 납치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한곳으로 모이는 것이 좋을 테니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해둔 것이겠지. 그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후. 그 정도면 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도 슬슬 납치사건에 대해 잊어갈 때일 테니, 이목을 속이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인 듯싶었다.
‘일단 밤사이 마을은 떠난 것 같군.’
지하실 같은 곳에 아이들을 숨긴 것은 아닌 듯했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 불안감을 느낀 것인지, 아이의 부모들이 백방으로 뒤지고 다닐 것을 염려해서인지 이미 납치한 아이들은 빼돌린 듯싶었다. 아이들이 잠시 이곳에 머물렀던 흔적이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작지만은 않은 장원에 인원이 둘뿐인 것만 보더라도, 최소 한 사람이 한 명씩을 끼고 야음을 틈타 달아난 것이 확실해보였다.
“뭔가 찾았나?”
“사람은 없고 이런 암호가 남겨져 있네요. 하오문과 다시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군. 일단 더 수색해보세나.”
도왕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아 화목하게 지내고 싶던 그였기에 진심으로 이 상황을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설영과 함께 하오문의 인원들이 장원에 들이닥쳤다.
“이곳입니까?”
“남은 건 이 두 놈뿐이더군. 제압해놓았으니 데려가고, 다른 흔적이 있는지 좀 찾아보도록.”
“예. 흩어져라!”
중요한 증거가 될 마인들의 시신을 옮기느라 많은 인원이 달려오지는 못했지만, 하오문의 무인들이 도착하자 도왕은 마치 제 수하인 양 능숙하게 지휘했다. 하오문 역시도 일방적인 그의 지휘에 기분 나빠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힘이 곧 권력인 무림에서, 도왕의 힘은 황제와도 비견될 만한 것이었으니까.
“여기서부터는 이들에게 맡기도록 하지. 뭔가를 찾거나 쫓는 것에는 이들이 더 나을 테니.”
그들이 본격적으로 투입되어 장원을 뒤지고, 추가로 수색과 발견에 특화된 요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하자 도왕은 슬쩍 발을 뺄 것을 제안했다. 마교와 얽히기 싫어서? 아니다. 도왕은 아내 이외의 그 누구도 겁내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단지 홀로 밤을 보냈을 아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안전한 곳에 숨겨두었다지만 얼마 전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그녀였기에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고, 천화는 그 생각을 바로 읽었다.
“예. 저희는 조금 더 둘러보다가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자네들이 위험에 처했다면 내 십만대산이라도 오를 것일세. 나야말로 다시 한 번 자네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군.”
계속했다가는 끝도 없이 인사만 주고받을 판이었기에 천화는 적당히 자리를 파했다. 도왕에게 먼저 돌아가도록 이야기하고, 자신은 수색을 지휘하는 이를 찾아 말을 건넸다.
“지부장이십니까?”
“아, 악마음……. 흠흠. 소협이시군요. 예. 제가 이곳 무한을 맡고 있습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별호 : 악마음협을 획득하셨습니다.] 천화가 말을 걸어오자 흠칫 놀라며 대꾸하는 지부장. 그도 그럴 것이 천화에게 새로 붙여진 악마음협이라는 별호가 그리 좋은 어감은 아니기 때문이다. 혈사를 막기 위해 살기를 내뿜은 것이 악마 같은 음을 연주하여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기억으로만 남아 그 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다만 그 이유가 싸움을 멈추고 무의미한 살생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기에 협이라는 말을 붙여 사파인으로 오해 받는 것을 피하기는 했다.
‘그래도 호구검보다는 낫겠지.’
이 또한 몇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단점을 지닌 별호였지만, 천화의 생각에 그래도 호구검보다는 나았다. 악마음협은 그나마 강한 인상이라도 주니까. 어색한 미소를 지은 천호는 그에게 도왕이 떠났음을 알려주며 추가연에 대해 물었다. 이왕이면 그녀에게 공을 몰아주는 편이 나중을 위해 좋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공을 세우며 고속 승진을 한 그녀였기에, 너무 빠른 성장을 보이면 암중에서 견제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천화는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 장애물은 가뿐히 뚫고 나갈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추가연? 새로운 위려현의 지부장을 말씀하시는 건가 보군요. 무정검희의 말을 듣고 이미 연락을 취해두었습니다만, 아마 직접 오기는 힘들 겁니다. 이곳뿐 아니라 호북성 전역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저희도 나름대로 조사 중이었는데, 이걸 보니 확실히 뭔가 배후가 있는 것 같군요. 어차피 그녀와는 공조를 해야 하니 말씀하실 것이 있다면 제게 하셔도 됩니다.”
벌써 지부장이라고? 천화가 준 정보들을 아주 제대로 이용해먹은 모양이었다. 아주 작은 지역의 지부장이라지만 정보 이상으로 그것을 정리하고 이용하는 능력이 출중했기에 이런 파격 인사가 가능한 것이었겠지. 하오문이 그리 허술한 집단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죠. 사실 놈들을 제압하고 수색하는 과정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놈들이 사용하는 암호인 것 같은데, 해독만 할 수 있다면 단서가 될 것 같군요.”
“이건……. 확실히 그렇군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해독을 한 뒤, 두 분께도 공유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그를 제치고 추가연에게 암호문을 건네기도 뭐했다. 이자가 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자라면 괜히 적을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암호문이니까. 암호문을 가졌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천화는 암호문을 그에게 넘겼다. 공조할 것을 약속 받았고, 자신의 뒤에 도왕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감히 허튼 짓을 하지는 못하겠지. 그 증거로 무한씩이나 되는 큰 지부의 지부장인 그가 이제 막 별호를 얻기 시작한 강호초출 천화에게 깍듯이 대하며 경과를 보고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천화는 설영과 함께 장원을 빠져나왔다. 하오문이 정보력이라면 자신이 어디에 있든 접촉을 해올 수 있을 테니, 따로 행보를 알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일단 무한을 벗어나 천천히 숭산 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가는 길에 추가연에게 슬쩍 전서구를 날려 암호문의 해독법과 간단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3개월 후 집결이라면 그 이전부터 어떤 움직임이 보일 테니, 기다리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습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나? 물론 하오문의 전력만으로 그것을 할 필요는 없다. 이제 한 달여 앞으로 남은 무림대회에서 무림맹이나 그에 준하는 어떤 집단의 힘을 빌릴 수도 있고, 구파일방쯤 되는 곳이라면 명예욕에 눈이 뒤집어서 뛰어들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아이들을 구출 확률은 크게 상승할 터였다.
“천화, 괜찮을까?”
무한을 벗어나면서도,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쉬움이 남았는지 설영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도왕의 개입이 있기도 해서겠지만 하오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니, 자신들이 날뛰는 것보다 낫기야 하겠지만 그들 역시 뭔가를 발견해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그나마 수소문 끝에 밤사이 어떤 인영들이 지붕을 넘어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무게 때문에 지붕이 짓눌린 자국이 있다는 것까지 확인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과 아이들의 행방은 찾을 수 없던 것이다.
“괜찮을 거야. 아마도.”
물론 3개월 후,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을 되찾았을 때 정상적이지 않을 확률은 있었다. 그들이라고 3개월 동안 그냥 놀고먹게 아이들을 두지 않았을 테니 기초 단련과 함께 지속적인 세뇌를 하겠지. 하지만 주술적인 힘을 사용한다거나, 고독을 먹여 명령에 불복할 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제약을 걸기는 어려울 터였다. 개별적으로 그런 것을 시행할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에 야금야금 중원을 먹어 들어왔을 테니까. 그러니 아이들이 잘 버텨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마침 3개월이면 무림대회가 끝나고도 여유가 있는 시점이니, 천화도 상황을 봐서 구출 작전에 합류해볼 생각이었다. 더불어 마교가 반응할 수 있도록 약간의 약을 쳐두기도 하고. 일단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명성을 얻고, 무림에서의 영향력을 획득한다면 아이들을 구하는 일이나 이후 행보가 훨씬 쉽고 자유로워질 테니까. 천화와 설영은 굳은 얼굴로 무한을 빠져나갔다. 숭산이, 소림이 위치한 하남을 향해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 천화와 설영은 숭산을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그간에는 명성을 얻기 위해 산적을 소탕하고 기행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꽤 평온한 이동이 계속되었다. 명성도 얻고 별호도 얻은 데다 무려 도왕의 추천장을 얻었으니까. 무림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기에, 굳이 흑우를 전력으로 몰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흑우가 확실히 빠르기는 했지만 승차감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굳이 엉덩이를 혹사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장바닥이 따로 없군.”
그렇게 각 마을에 들어가서도 크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은 덕분에 천화와 설영은 시비 한 번 붙지 않고 호북의 끝자락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이틀만 느긋하게 이동하면 하남성에 들어설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비교적 안전해진다. 하남은 소림의 영역이니까. 물론 숭산에서 먼 곳에서는 일부 소란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숭산에 가까워질수록 자잘한 싸움박질 같은 것은 사라질 터였다. 괜히 허튼 짓을 했다가 소림에게 밉보이기라도 했다가는 정파 무림에 발을 붙이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한창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는 호북에 무당이 있음을 생각하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림에서 무림대회가 열리니 그들이 더욱 신경을 써서 단속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당이 좀 더 속세물을 많이 먹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소림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소림이라고 늘 평화가 있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
배첩이라는 방식은 비교적 확실하게 실력자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한 방식이기도 했다. 돈으로 매수하거나 인맥, 관계 등을 통해 전해지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실력이 있는 자에게 배첩이 돌아가는 것을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것이다. 일단 영역 내로 들어온다면 보호를 해주어야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분위기는 제법 흉흉했다. 일반인들과 상인들은 활발히 돌아다니며 밝은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무림인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럴 걱정은 없겠네.”
며칠 전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그 흉악한 분위기가 더 강화된 탓인지 객잔의 자리를 예상과 달리 전부 차있지도 않았다. 방 역시 마찬가지. 이전처럼 칼부림이 일어나면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문제가 생길까 염려한 이들이 객잔에서 묵지 않고 노숙을 하거나, 민간인들의 집 또는 지역 유지들의 장원에 의탁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객잔은 그저 특수를 누린다고 이야기하기 애매할 정도로 한산했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 점을 악용하여 일부 무인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다.
“아니, 아무리 무림대회가 있다지만 네 배는 너무한 것 아니오! 남는 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응?”
천화와 설영이 점소이를 불러 막 방을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는 난처한 표정의 점소이가 무인으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분명…….’
천화가 항의 중인 사내의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무신지로에서도 꽤 유명하던 인물이니까. 황산일검 임봉곤. 황산일검이란 별호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훈장님이라고 더 많이 불렸던 꼬장꼬장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의 무공 실력은 확실히 좋았다. 후기지수 비무대회에 참여한다면 능히 이변을 일으키며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허나 의와 협을 부르짖고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이런 비무대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지 못하고 매번 중도 포기라는 고배를 마시곤 했었다. 다른 무림인들의 행사에 끼어들다가 낭패를 겪거나, 배첩을 도둑맞거나, 심지어 사기를 당해 목적지까지 향할 노잣돈이 없어 포기하는 경우까지 참으로 다양하게도 일을 겪었기에,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를 장수생이라 부르며 멱살 잡고 목적지까지 끌고 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 꼬장꼬장한 성격에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시대에 마지막 양심이 남았다면, 협객이 남았다면 아마 그일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멋있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그가 고작 점소이와 실랑이를 벌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요. 예상보다 너무 손님이 없는 데다, 일부 방이 무상으로 나가야 해서…….”
“허? 그럼 누구에게는 공짜로 방을 주고, 누구에게는 네 배나 올려받는단 말이오? 세상에 그런 법도가 어디…….”
가격이 평소보다 네 배나 오른 데다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점소이가 말실수를 했다. 누구는 공짜로, 누구는 평소의 네 배를 내라면 그 누가 좋아하겠나? 사실 그들도 억울했다. 대문파나 이름난 무인들이 자신의 방을 공짜로 제공해주면 객잔에서 소란이나 칼부림이 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탓에, 울며 겨자먹기로 방을 내어 준 것이니까. 무림인들의 다툼이나 소란이야 늘상 있는 일이니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있었던 큰 사건 때문에 객잔 주인이 겁을 먹고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방값뿐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까지 공짜로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늑대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안방에 들여놓았으니 제 뜻대로 나가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에게라도 그 값을 받을 수밖에. 그렇다보니 방값이 네 배까지 상승한 상태였다. 아니, 그렇게 해도 크게 이득을 본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이!”
“……?”
“돈 없으면 그냥 나가지? 이곳은 우리 광산파가 묵고 있는 곳이다. 소란을 피우는 건 허락하지 않아. 알겠어?”
그때, 객잔의 위층에서 누군가의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부도 아니고 광산파라니. 처참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들먹거리며 항의하는 사내에게 엄포를 놓는 것이다.
“흠. 쉬는데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이 후안무치한 이들의 행태 때문에 내 잠시 흥분했구려.”
그 말에 임봉곤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른 손님들에게 불편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점소이에게 따질 것도 아니기는 했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잠시 흥분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대에게도 사과하겠소. 이런 결정을 일개 점소이가 할 수 있을 것이 아닐 텐데 그대에게 언성을 높였구려. 허면 마지막으로 묻겠소. 정말 이 금액으로 묵을 수 있는 방이 없소?”
“죄송합니다. 그 돈으로는…….”
“그, 그럼 이 정도는 어떻소?”
쩔렁 쩔렁 우습게도 임봉곤이 다시 구리문 한 꾸러미를 꺼낸 것은 전낭 안이 아니었다. 무겁게 짊어진 등짐에서 그것을 꺼낸 것이다.
“무슨 구리문을 저렇게 많이…….”
그러면서 슬쩍 보인 등짐 안에는 그와 같은 구리문이 가득했다. 본의 아니게 그것을 보게 된 설영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부피도 부피지만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굳이 은자로 바꾸지 않고 저만큼이나 많은 구리문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바꿀 만한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거겠지.’
하지만 천화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궁벽한 산골에서 수련을 해왔고, 이번이 첫 무림 출도이자 지역을 벗어난 첫 번째 여정인 것이다. 황산파라 하면 흔히 저 안휘성에 있는 황산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 임봉곤의 사문인 황산파가 위치한 곳은 안휘가 아닌 광동성이었다. 이름만 황산파인 것이 아니라 동명의 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아주 구석에 있어서 대부분은 그런 산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명의 문파였다. 아직 강호에 고수 한 명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했기에 돈도 명예도 모두 부족했고, 심지어 임봉곤은 산에서 내려와 본 적이 거의 없는 탓에 어리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 탓에 임봉곤은 대충 화폐의 개념은 알지만 그 가치조차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덕분에 은자로 따져도 수십 냥은 족히 될 법한 저 돈을 모조리 도둑맞았다고 했었지. 시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첫 출행 때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하니,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견물생심이라고 저리 아무렇지 않게 커다란 돈 주머니를 끌러보이니 누군가 노리는 이가 생겼을 테니까.
‘임봉곤이라……. 써먹을 수 있겠는데?’
그 모습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은 천화는 재미난 생각을 떠올렸다. 잔소리쟁이이기는 하지만, 그를 이용한다면 이번 무림대회에서 꽤 재미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