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별호 수집 (2)2021.09.28.
뭐? 세주연이 가출을 했다고?
‘하긴, 그러고도 남을 애이긴 하지.’
솔직히 그리 놀랍지만은 않은 얘기였다. 세주연의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고, 실제 무신지로에서도 있던 일이니까.
“아우를 만나러 가겠다는 서찰만 남겼더군.”
그 이유가 꽤 난감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무신지로에서는 꽤 오랫동안 남만에서 활동하면서 교류가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세주연과 함께 보낸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던가? 처음으로 만난 중원인이라는 단서가 붙었다지만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가출까지 감행했다니, 놀랍고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래. 아우라면 이 행사에 참석할 것 같아서 온 것이지. 어쩌면 여기 어디에 연이가 있을지도 모르네. 롱롱이를 함께 데리고 간 모양이라, 나타난다면 금방 티가 나긴 하겠네만…….”
확실히 롱롱이와 함께라면 티가 날 확률이 높았다. 공룡처럼 생긴 외형부터가 확연히 눈에 띌 테니까. 때문에 여기에 왔다면 금방 들통이 나고, 시선을 끌 수도 있었지만 무조건 그렇지도 않을 터였다. 꼬리를 감추는 것이 좀 어렵기는 해도 옷만 잘 입히면 적당히 사람처럼 꾸밀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은 롱롱이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중원에 대한 경험이 없을 텐데, 잘 왔는지 모르겠군요. 차라리 여기 있다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 아이가 어디 좀 귀엽고 예쁜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걱정일세.”
팔불출 같은 말이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충분히 미인이라 부를 수 있는 외모였다. 그렇다는 것은, 외모만 보고도 수작을 부릴 놈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롱롱이가 함께라면 그나마 안심이지만, 힘이 전부는 아니니까.’
물론 세주안을 닮아 엄청난 괴력을 지녔고, 무공 또한 범상한 수준이 아닌 데다 롱롱이까지 함께하고 있다지만, 중원 무림은 위험한 곳이다. 무공의 고하와 상관없이 약이나 독 따위를 사용해 무림초출을 낚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세주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만약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들과 관련된 모든 인물, 문파를 초토화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 꼴을 당하기 싫다면 중원 무림이 나서서 세주연을 찾아내야 할 터였다. 관련자들을 엄중히 처벌, 아니 몰살을 시켜서라도.
“큰일이네요. 저도 최대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체는 밝히지 않는 편이 좋겠죠?”
“고맙네. 그래주면 좋겠군. 정체가 알려지면 허튼 짓거리를 하려는 놈들이 더 늘어날지도 모르니.”
천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세주연을 찾는 데 일조할 것을 약속했다. 다만 세주연의 정체가, 배경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 롱롱이를 의심하거나 예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체가 실제로 확인된다면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주연을 꼬시든, 납치하든 자신들이 데리고 있을 수 있다면 딸을 애지중지하는 남만야수궁주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날 테니까.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럼 무림대회가 끝나면 남만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일단은 그래야겠지. 직접 찾아나서면 좋겠지만 자리를 오래 비워두기도 그렇고, 내가 중원을 돌아다니면 눈치를 채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몇 가지 이유를 붙여 궁도들을 남겨두겠지만, 그 수가 많을 것 같지는 않군.”
마지막으로 천화는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만약 세주안이 무림대회 이후에도 세주연을 찾아 돌아다닐 것이라면, 굳이 천화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예상대로 세주안은 이번 무림대회 기간 중에 세주연을 찾지 못하면 일단 남만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고, 궁도 몇을 남기기는 하겠지만 그들만으로 이 드넓은 중원 땅을 뒤지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렇기에 천화에게 부탁을 한 것이겠지. 천화를 만나기 위해 가출을 한 세주연이니, 가장 만날 확률이 높은 것도 천화일 테니까. 물론 만난다고 해서 세주연을 설득해 돌려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전은 담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만약 찾게 되면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만약 아우가 상대하기 버거운 자가 있다면 무리하지 말고 내게 알려만 주어도 되네. 누구든 그 아이에게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내 직접 다시 중원에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값을 치르게 만들어 줄 테니까.”
순간 세주안의 눈빛에 살광이 흘렀다. 순수 무력으로 따지더라도 천하십대고수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듣는 그이니, 어지간한 상대는 그가 나서 해결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천화도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곧 기막이 해제되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한 이야기가 오갔고,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무림대회의 막이 열렸다.
“……무림대회의 개막을 선언합니다. 이곳에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모든 분들은 부디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소림 방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무림대회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것이다. 후기지수 비무대회가 가장 큰 행사이기는 했지만, 명색이 무림대회라 이름 붙여진 만큼 이곳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말로써 비무를 행하는 논무가 진행되었고, 내공을 배제한 채 초식만을 겨루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물론 뛰어난 무공은 초식만이 아니라 내공과 심법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초식에서 승리한다고 동일한 내공을 가졌을 때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비교적 심법이 약한 무가나 문파에게는 큰 기회가 되는 자리였다. 그뿐 아니라 무공을 시연하고 제자들을 모집하거나 후원자를 모집하는 자리 역시도 있었다. 상인처럼 무공을 선보이고 무공을 판매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무인들도 사람이니까.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문파와 무공을 알리고 돈을 벌어들이려는 것이다.
“잠시 후 후기지수 비무대회가 시작됩니다!”
허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후기지수 비무대회였다. 어린 제자들을 강하게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자파의 무공과 교육 체계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으니까.
“그럼 다녀올게.”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비무를 치르는 것은 다름 아닌 천화였다.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을 앞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 자리가 그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님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파 무림의 힘이 구파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주인공은 나중에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도 있겠지만.’
물론 거기에는 자신들이 주역이라는 심리 또한 숨겨져 있을 터였다. 천화를 비롯해 예선을 거쳐 올라온 후기지수들은 그저 밑밥 같은 것이랄까? 그들의 비무를 통해 흥을 돋운 뒤, 격이 다른 강함을 보여줌으로써 기존 강호들의 수준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천화가 그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만.
“악마음협 천화 소협! 그리고 풍벽장의 참풍도 풍유한 소협! 두 분은 비무대 위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비무 진행자의 소개를 받은 천화가 가뿐하게 비무대 위로 올랐다. 다만 특이한 점은, 그의 손에 검이 아닌 다른 것이 들려있다는 것이었다. 악마금.
이왕 악마음협이라는 별호로 소개를 받은 마당이니 음공으로 상대해보겠다는 것일까? 지난 몇 가지 사건 이후로 악마칠음의 성취가 많이 올랐다고는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까지 그의 음공은 그저 탄주를 통해 약간의 경력을 일으키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방심한 상대에게야 충분히 통하겠지만, 작정하고 덤비는 이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음공을 쓰는 건가?”
“비무대회에서 음공이라니, 금방 떨어지겠군.”
“어떻게 저런 자가 미리 자리를 배정 받은 거지? 뒷배에 누가 있는 건가?”
천화가 악마금을 들고 비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음공에 대한 무림의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천화가 익힌 악마칠음으로 강호를 평정했던 이가 있긴 했지만 그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강함일 뿐이었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 또 다른 음공의 절대 고수가 나타난 적이 없기에, 음공을 익힌 이들은 천대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뭐 꼭 방심을 유도하려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방심해준다면 나야 좋지.’
그래서일까? 비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천화를 무시하거나 승부를 점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고작 음공 따위를 익힌 이가 예선도 치르지 않고 이미 128강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 화가 났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비무대 위에 오르고 있었다.
‘그만큼 배당이 높아질 테니까.’
하지만 천화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설영이 자신이 말한 대로 잘하고 있는지를 살폈다. 안목품평회. 그런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비무의 승패를 예측하는 내기판이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성한 소림에서 노름 따위를 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소림도 인정을 하는 것이었다. 무림대회의 흥행을 위해서는 무림인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참여와 관심도 필요하니까.
‘소림도 얻는 것이 있으니까 놔두는 거지.’
때문에 안목품평회라 이름 붙은 노름판을 주관하는 것은 천하상단이었고, 그 수익금 중 일부는 무림대회가 끝난 후 소림에게 돌아갈 터였다. 명색이 소림이라 뒷돈을 받을 수는 없을 테니, 시주라는 형식으로 말이다.
‘쩝. 저걸 주관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아쉽구만.’
당연히 천화가 그 노름판에 빠질 수 없었다. 이왕이면 만금상단 등을 통해 아예 대리를 하여 운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배당금이라도 챙기는 수밖에. 설영을 통해 자신에게 돈을 걸어둔 상태였고, 아마 지금쯤 배당금이 어마어마하게 치솟고 있을 터였다. 미리 128강에 자리를 배정 받은 탓에, 또 야수궁주와 친분이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건 이들도 있겠지만 정말 음공을 사용할 듯한 모습을 보고서 반대쪽에 급히 돈을 거는 이들이 꽤 많아보였으니까.
“준비 되셨습니까?”
“예.”
“네. 뭐. 시작하시죠.”
때문에 은근히 시간을 끌던 천화는 대충 다 돈을 건 것으로 보이자 경기를 속행시켰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힐끔힐끔 그쪽을 향해 있었다. 정리가 되는 대로 배당률을 크게 적어 붙여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시작하십시오!”
타닷!!! 그 모습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 것일까? 화가 난 모습의 풍유한이 시작 신호와 동시에 천화에게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천화를 반으로 갈라 죽일 듯한 맹렬한 기세. 일류의 경지에 든 인물답게 따가운 살기를 뿌리자, 천화도 그제야 놈에게 시선을 돌렸다. 투웅 투웅 퉁 퉁! 악마금을 튕겨 경력을 쏘아보냈다.
“음공 따위가 통할 것 같소!”
파앙 팡 팡 팡 허나 기감이 꽤 좋은 편인지, 상대는 검기를 일으켜 그것들을 모조리 갈라버렸다. 힘껏 베어낼 필요도 없다. 천화가 쏘아낸 경력은 검기에 한참 못 미치는 힘일 뿐이니, 검기를 가져다대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터져나갔다. 그렇게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고, 놈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역시 음공 따위가 그러면 그렇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
“풍벽……!”
빠악!! 쿠웅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바람마저 갈라낼 듯한 맹렬한 일격이었으나, 그보다 빠르게 천화가 악마금을 휘두른 것이다. 검기로도 상처를 내기 어려운 악마금에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녀석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스, 승자는 악마음협 천화 소협입니다.”
“…….”
“…….”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 진행자가 천화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관중들은 한동안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천화가 툭툭 악마금을 털어내고 비무대를 내려간 이후에야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공이 아니라 기형병기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격타금……. 악마음협이 아니라 격타금이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별호 : 격타금을 획득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새로운 별호가 즉시 생성되었다. 별호라는 것이 많은 이들이 부르기 시작함에 따라 생겨나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천화가 굳이 악마금을 들고 비무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무림대회 씩이나 되는 곳에서 진행되는 비무대회라면 한 경기 한 경기가 크게 회자되니까. 즉, 그만큼 새로운 별호를 얻기 쉽다는 뜻이었다.
‘잘만하면 비무를 할 때마다 새로운 별호를 얻을 수도 있지.’
천화가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매일 새로운 별호를 얻는 것. 그리하여 별호에 딸려오는 추가 능력치와 특수 효과를 수집하는 것. 평소에 새로운 별호 하나를 얻으려면 온갖 기행을 벌이거나 보는 이가 많은 곳에서 매번 특별한 방법으로 적을 격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같은 비무대회는 별호 생성을 위한 최고의 무대였다. 그렇기에 천화는 128강부터 우승까지, 7번의 비무에서 최소 3개 이상의 별호를 생성할 계획이었다.
“배당, 배당금을 보자!”
하지만 일단은 배당금이 우선이었다. 미처 배당률이 공개되기도 전에 비무를 끝내버린 천화였기에, 비무대를 내려오자마자 살짝 눈이 돌아간 모습으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힛! 우히힛!!”
8.3배.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배당률이지만, 천화는 만족했다. 이번 비무로 인해 오히려 자신에 대한 기대가 낮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악마금을 진짜 악기가 아닌 기형병기라 인식하더라도, 일단 음공을 사용한다는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실망감을 주었을 테니까. 그리고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경기만이 아니었다. 천화가 살짝 맛이 간 모습으로 다음 경기에, 또 그 다음 경기에 돈을 걸었다. 무신지로에서의 경험과 누구보다 뛰어난 무공을 보는 눈으로 완벽하게 승자를 예측하며 돈을 걸고 불려나갔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알 게 무언가? 소림도 돈벌이에 나서는 마당에.
“너네 방심하다 지기만 해봐. 그땐 내가 아주 깡패가 되는 거야. 엉?”
비무에 나서는 임봉곤과 설영에게 엄포까지 놓으며, 천화는 불어나는 돈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