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별호 수집 (3)2021.09.30.
본격적인 무림대회가 시작된 첫날, 후기지수 비무대회는 딱 한 경기씩만 치러졌다. 하지만 이변이라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 천화를 비롯해 구파일방 등에서 미리 자리를 배정 받은 후기지수들은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승리했으니까. 임봉곤은 운이 좋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선을 치르고 올라온 이를 만나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아니지. 그놈들이 운이 좋다고 해야지.’
모두의 평가와 달리 천화는 생각이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당장 구파일방의 후기지수 중 몇 명을 제외하면 임봉곤을 제압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상승의 무학을 익혔으나 그것에 취해 기본기 수련을 등한시한 자들이 겪는 한계였다. 나중이 되어서는 다시 기본기를 수련하든, 아예 압도적인 내공과 초식으로 찍어누르든 할 수 있겠지만, 일류 수준 내에서라면 임봉곤을 제압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쨌든 64번이나 되는 비무가 치러지다 보니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기에, 64강은 다음날로 미루어졌다. 개중에는 천화에 자극 받았는지 최대한 빠르게 상대를 제압하며 비무를 끝낸 이들도 있지만, 실력에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제법 시간을 잡아먹은 이도 있었고, 비무를 준비하고 뒷정리를 하는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64강이 펼쳐진 다음 날도 마찬가지. 32번의 비무도 충분히 많았기에 하루의 시간이 배정된 것이다. 또한 128강과 달리 이제는 진짜 실력이 뛰어난 이들만 남았기에 전날처럼 빠르게 승부를 짓기 어렵기도 했고.
“승자는 격타금…… 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군요. 천화 소협입니다!”
“와아아아!!!!”
물론 천화는 예외였다. 이번에도 예선부터 올라온 상대를 만난 천화는 악마금 대신 비영검만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말이다. 비영검을 날리자 상대가 검을 들어 막았지만, 내기를 불어넣자 비영검이 회수되며 상대의 검 또한 함께 딸려온 것이다. 검을 잃은 검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나? 어설프게 권기를 일으켜 보았지만, 천화가 사용하는 것은 무려 패왕 등급을 가진 비영사였다. 어설프게 쳐내려다가 손에 큰 상처만 입었기에 상대는 분해하면서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별호 : 비검탈혼을 획득하셨습니다.] 덕분에 꽤 그럴싸한 이름의 새로운 별호를 얻을 수 있었다. 상대가 검을 빼앗겼을 때 거의 혼이 나간 표정을 지어준 덕분이었다. [임봉곤이 별호 : 황산검호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별호를 얻은 것은 임봉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초출이라 아직까지 제대로 된 별호 하나 없던 그였지만, 64강에서도 같은 예선전 출신 상대를 만나 깔끔하게 승리를 거둔 그를 무림 명숙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자 평범하지만 꽤 그럴싸한 별호가 생겨난 것이다. 이전까지 영 이상한 별호만 얻어오던 천화의 입이 튀어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축하해!”
“이제 어엿한 무림 고수가 되었구만! 하하!”
설영과 금무성의 칭찬에 쑥스러운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임봉곤도 그 별호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흥.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어두시지.”
그런 그들을 스치듯 지나가며 남궁훈이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32강에 오른 이상, 천화도 설영도 임봉곤도 이제 거대문파의 후기지수들과 겨루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좀 웃지 그래? 내일도 못 웃고 떨어지면 속 쓰리잖아.”
“야수궁주만 믿고 기고만장하구나……!”
피식 그러나 천화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받아쳤다. 내일 치러지는 32강에서 붙게 될 상대가 바로 남궁훈이었으니까. 그리고 천화가 보기에 남궁훈은 아직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당신룡이나 설산빙화 정도일까, 남궁훈 따위는 애초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그 대꾸에 남궁훈이 다시 발끈했지만 함부로 검을 뽑는 일은 없었다. 비무대가 아닌 곳에서 검을 들고 설쳤다간 소림의 제재를 받을 테고, 그의 성정을 알고 있는 가문의 어르신들이 절대 천화와 비무대 밖에서 부딪히지 말 것을 당부했으니까. 아니, 가급적 그와 인연을 맺을 것을 요구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천화 때문에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니까. 또한 대(大) 남궁세가가 야수궁 따위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고보자…….”
결국 남궁훈은 악당 같은 뻔한 대사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계속 천화를 상대하다가는 자신도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대신 내일 비무대 위에서 본때를 보여주리라 이를 갈았다.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흠, 그러고 보니 둘 다 내일 상대가 오대세가지? 흐흐흐. 내일이 놈들의 제삿날이 되겠구만. 대회 전까지 이름도 모르던 놈들한테 털리고 돌아오면 가문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제갈세가라지만…….”
“걱정 마, 걱정 마. 네 실력이면 그놈 정도야 낙승이지!”
자신을 걱정해주는 금무성을 보며 천화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보니 내일 임봉곤의 상대는 제갈무기, 설영의 상대는 팽무혁인 것이다. 둘 다 오룡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인물들이면서 오대세가의 일원이기도 했다. 개중 제갈세가는 지략을 높이 쳐주는 대신 무공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가 되는 곳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오대세가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무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지만, 천화가 보기에 임봉곤의 실력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당장은 살짝 무리가 있지만, 지금부터 자신이 그게 가능하도록 만들 테니까.
‘우르르 떨어지고 나면 얼굴이 볼 만하겠네!’
사천당문과 진주언가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들마저 탈락하고 나면 오대세가의 절반 이상이 탈락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놈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구파일방에도 구린 놈들이 많았지만, 친목질하기를 좋아하는 오대세가는 무신지로에서도 유독 천화의 눈에 거슬리던 놈들이니까.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자기들 쪽에 돈을 크게 걸겠지. 낄낄낄!’
그리고 무엇보다 신나는 것은 큰돈을 딸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직접 나서지야 않겠지만 다른 이를 시켜 소가주들에게 큰돈을 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두가 그들의 승리를 점칠 테니 배당률이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가 가문의 위상과 직결될 테니, 이득이 적더라도 몰래 큰돈을 걸어두겠지.
‘그게 다 내 것이 될 테고 말이야.’
천화는 그 돈을 홀랑 털어먹을 작정이었다. 일행을 데리고 다시 숙소로 향한 천화는 따로 설영과 임봉곤을 불러 맞춤형 특훈을 시켜주었다. 제갈세가와 하북팽가의 무공을 낱낱이 해부하여 씹고 뜯고 맛볼 수 있게끔 가르쳐두었다. 과하게 긴장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만큼. 물론 무공 수위가 한 단계 높은 설영에게는 필요 없는 조언이었을지 모르지만 혈마검을 쓰지도, 혈마신공을 드러내지도 못한다는 제약이 있으니 굳이 어렵게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 들으면 입으로 비무하고 있다고, 어디 비무라는 게 생각대로 이상적으로만 흘러갈 것 같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천화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게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일 두고 보면 알겠지. 그래도 불안했는지 밤이 깊도록 서로 상대의 역할이 되어주며 연습하는 설영과 임봉곤을 두고, 천화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우히힛! 묻고 더블로 가!”
남들은 알 수 없는 잠꼬대를 해가면서 말이다. @ 무림대회의 개회를 알린지 삼 일차. 드디어 후기지수 비무대회가 32강으로 좁혀졌다. 그중 절반가량이 예선을 거치지 않은 인물들이고, 예선을 거친 인물 중에서도 절반가량은 이미 이름 높은 가문이나 문파의 후기지수였기에 뻔하다 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나머지 몇 명만으로도 충분히 이변이라 말할 수 있었다. 명문이라는 것은 본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수많은 세월 동안의 경험과 발전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무공과 수련방식으로 성장시킨 이들이기에, 일찍 탈락하는 것이 되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임봉곤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 천화와 설영이야 세주안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사실 남만에서 키워낸 고수라든가, 야수왕과 의형제를 맺을 만큼 배분이 높은 전대고수의 제자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직까지 소림이 도왕에 대한 정보를 밝히지 않았기에 발생한 오해였다. 만약 천화와 설영의 무공이 생각보다 형편없어서 조기에 탈락할 것을 우려한 것이겠지. 그렇게 된다면 도왕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는 격이 될 테니 말이다. 때문에 오늘의 첫 경기로 배정된 임봉곤과 제갈무기의 비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황산파라는 이름조차 대부분 알지 못하던 약소방파에서 키워낸 후기지수가 과연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소가주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정확히는 그를 상대로 어느 정도 활약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황산파의 황산검호 임봉곤 소협! 제갈세가의 천뇌지룡 제갈무기 소협은 비무대 위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와아아아아아!!!”
“힘내라, 임봉곤!!”
“황산검호!!”
“제갈무기 님, 믿고 있습니다!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덕분에 임봉곤을 응원하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본디 관중들은 약자를 응원하기 마련이니까. 오대세가 중 무공과 관련해서는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제갈세가였지만,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그보다는 임봉곤의 활약을 기대했다. 그렇다 해도 아직 누구도 그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 수 배우겠습니다.”
“그러시오.”
제갈무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명문 정파의 후예로서 임봉곤 같은 무명소졸이 자신과 겨루는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 고까운 것이다. 때문에 포권을 취하는 임봉곤과 달리 활짝 펼친 부채를 펄럭거리며 대충 인사를 받은 녀석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지모가 뛰어나지만 무공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제갈세가의 역린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하십시오!”
“검은 뽑지 않으시는 겁니까?”
“뽑을 만하면 뽑게 되겠지.”
경기가 시작되고, 여전히 부채질만 하고 있는 제갈무기를 향해 임봉곤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제갈세가에서도 역시 가장 강한 무공은 대천성검법(大天星劍法)이라는 이름의 검법이었지만, 그는 부채를 이용한 선법을 고집했다.
‘진짜네.’
그 모습에 임봉곤이 자존심 상해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화가 이야기한 그대로였으니까.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얼마든지.”
자신감을 내비치는 제갈무기를 향해 임봉곤이 침착하게 달려들었다. 이미 자신이 더 하수라는 도전자의 마음가짐을 가진 그였기에 방심 따위는 할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천화가 일러준 대로 거리를 좁히며 검을 떨쳐나갔다.
“선풍.”
펄럭! 허나 임봉곤의 몸이 그에게 닿기 전, 제갈무기가 먼저 부채를 휘저었다. 천절선법(天絶扇法)이라 불리는 고절한 선법의 일초로, 물리력을 가진 바람을 일으켜 상대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는 수법이다.
“나려타곤!”
하지만 임봉곤은 아주 간단하게 그것을 해소했다. 바람의 범위가 미치지 않는 하단으로 몸을 굴려 이동했다.
“무인이 수치를 모르고……!”
나려타곤은 무인의 수치라고도 여겨지는 방법. 제갈무기처럼 명문의 자제라면 아예 생각의 범주에 없는 방식의 회피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즉각적인 대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바닥을 굴러 거리를 좁혀왔음에도 인상만 찌푸릴 뿐 재차 공격을 가하지는 못한 것이다.
“횡소천군!”
이어 펼쳐진 초식은 더 심했다. 삼재검법에 속한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횡베기로 그를 공격해간 것이다.
“내가 우습게 보이더냐!”
콰앙!! 부채를 접어 선기를 일으킨 제갈무기가 호통을 치듯 검과 부딪혀갔다. 나려타곤에 횡소천군이라니.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 따위 것을 무공이라고 사용한단 말인가? 이대로는, 놈을 박살내지 않고서는 체면이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부채를 말아쥔 손에 힘을 더했다.
“흥!”
나름대로 검기를 뽑아낸 임봉곤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영약을 간식으로 먹고 자란 제갈무기를 내력으로 이기기는 어려웠다. 횡으로 휘둘러지던 검이 부러질 듯 휘청거리며 튕겨나갔고, 제갈무기는 선기를 유지한 채 그대로 임봉곤의 어깨를 내리쳤다. 생각 같아서는 머리통을 박살내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에 한쪽 팔을 망가뜨리는 정도로 끝내려는 것이다.
“크흑!”
“저런!”
“아이고! 저거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털썩 다행히 임봉곤이 검을 들어올리며 막아냈지만,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부르르르- 검과 부채가 서로 힘을 겨루는 것이 멈추지 않았으니까. 팔뚝만 한 부채가 검을 찍어누르는 기묘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잘게 떨리며 점점 밀려나는 것은 검 쪽이었다. 그뿐 아니라 임봉곤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얼굴이 붉어졌고, 한쪽 무릎마저 땅에 닿았다.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내공 내결로 이어진 것이다. 어릴 적 작은 기연이 있어 일류급의 내공을 갖게 된 임봉곤이지만, 제갈무기의 내공은 그보다 최소 5할은 더 많았다.
“무릎을 꿇은 모습이 보기 좋구나. 딱 네놈과 나의 위치가 그 정도이니라.”
때문에 내공 대결을 이어가면서도 제갈무기는 여유를 부리며 조용히 임봉곤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주변에는 들리지 않고 오직 임봉곤에게만 들리도록. 그런 주제에 만약 승리한다면 겸양을 떨며 군자인 척하겠지.
‘호승심 때문에 쉽게 갈 걸 어렵게 가는구만. 쯧!’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화의 이맛살도 함께 찌푸려졌다. 본래 천화가 알려준 필승법은 이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공 대결로 간다면 무조건 불리해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며, 철저히 기본공과 나려타곤을 이용해 놈을 낚아내는 방식을 가르친 것이다. 일단 한 칼이라도 먹인다면, 놈은 고작 기본공에 자신이 당했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평정심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그때 초식의 허점을 파고들어 확실한 일격을 먹여야 했다. 그것이 기본기 숙련도에서 유일한 강점을 가지는 임봉곤이 제갈무기에게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헌데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 순간 호승심이 발동한 것인지 임봉곤이 놈과 무기를 맞대며 틀어져버렸다. 이대로 내상이라도 입는다면 이후로는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뭔가 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천화가 전음이나 귓속말을 보내 임봉곤을 닦달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무언가를 노리는 그의 눈빛. 아직 투지가 식지 않았다는 것은 예비한 한 수가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강……하구려.”
왈칵 피를 토하며 임봉곤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내공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내력 대결 중 입을 연다는 것은 제 살을 깎아먹는 일이지만, 포기한 것인지 임봉곤이 말을 내뱉은 것이다.
“잡스러운 피를 묻히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이만……?!”
그때, 임봉곤의 팔에 힘이 풀렸다. 스르륵 검이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둘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임봉곤이 아예 검에 힘을 풀어버린 것이다. 그 대가로 상당한 내상을 입을 것임에도 말이다.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컥!?”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소!!”
퍼억!!! 그와 동시에 몸이 솟구쳤다. 검을 완전히 놓아버린 임봉곤이 무릎을 튕겨 제갈무기의 가슴팍을 들이받은 것이다. 철두공. 모두가 무시하는 기본 외공이었지만, 내공까지 더해지자 무시 못할 충격으로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은 제갈무기는 숨이 턱 막히고 하늘이 노래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해보았던 싸움은 고상한 비무밖에 없었으니까. 어찌 대처를 할지 모르는 놈의 몸에 임봉곤의 주먹이 꽂혀들어갔다. 명치, 명치, 명치. 내상이 제법 깊어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천화가 가르쳐준 필승의 격타법을 사용해 제갈무기의 몸을 두들겼다. 마지막은 고자……!!
“멈추어라!!!”
차마 아들이 딸이 되는 광경을 지켜볼 수 없었는지, 제갈세가의 가주가 직접 일갈을 내지르며 비무대 위로 뛰어들었다. 임봉곤의 가슴팍을 후려쳐 날려보내며 비무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