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별호 수집 (5)2021.10.05.
소림이 주최하는 비무대회에서 32강, 아니 16강까지 진출을 해놓고 기권을 선언하는 것은 무척이나 무례한 일이었다. 임봉곤처럼 이후 비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기권을 한다는 것은 여러 오해의 소지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수준은 잘 알겠다. 더 이상 비무를 치를 이유가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일반 무림인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지만 설영은 단호했다. 더구나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공표한 것이기에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만약 오늘의 비무가 모두 끝나고 난 뒤라면 어떻게든 핑계를 갖다붙이며 부득이한 사정이 있음을 알렸겠지. 그러나 비무가 끝나자마자 대놓고 이야기를 했기에 여러 추측들이 난무했다.
‘최대한 체면을 지킬 수 있는 쪽으로 소문을 흘리겠지.’
남아있는 후기지수들과 그들의 사문이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몇몇은 천화의 예상대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차피 16강에서 떨어질 테니 미리 기권을 한 것이다. 다음 상대로 유력한 이는 설산빙화 나예린이고, 거기서 승리한다 해도 곤륜의 무진 도장이 올라올 테니 진짜 실력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팽무혁을 압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절정 경지에 오른 후기지수들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구파일방의 위상이 깎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후기지수들이 패배하고, 자기들끼리의 잔치라고 여겨졌던 판이 천화 일행에게 엎어진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고, 설영이 도왕과 얽혀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라도 심기 불편함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일단은 다음 경기를 이어가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승자는 설산빙화 나예린 소협입니다!”
“와아아아!!!”
그리고 다음 경기에서 무림이화 중 하나로 불리는 나예린은 제 역할을 다해주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는 아니지만 제법 이름을 알린 설산파의 후기지수인 그녀가 검기로 눈꽃을 그려내며 최대한 화려하게 상대를 몰아쳤으니까. 그녀는 경지에 이르면 화산파에서 검기로 매화를 그려내듯, 눈꽃을 그려낼 수 있다는 설산검법을 사용하는 고수였고, 절정급에 오른 인물이었기에 이 같은 연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 역시 어설프지만 매화를 피워내며 맞섰기에 두 사람의 대결은 화려함의 극치라 할 수 있었다. 상대는 매화선녀 이소란으로, 같은 무림이화로 불리는 여인이었기에 조금 더 무리를 한 감도 없지 않았다. 압도적인 승리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화산파가 얹짢아 할 테니까.
‘져 줄 수는 없어도 최대한 맞춰줄 수는 있겠지.’
그 이유를 천화는 잘 알고 있었다. 설산파는 무림에서 꽤나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적인 부분에서부터 중원과 세외의 경계쯤에 위치한 데다, 강함만으로 따진다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북해빙궁에 못 미쳤다. 좋게 말하면 양쪽 모두의 장점을 취한 무공을 사용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이도저도 아닌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배세력인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할 테니까.’
척박한 땅에 위치한 설산파에 매달 일정한 금액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었다.
“다음으로…….”
이후로도 몇 번이나 경기가 계속되었다. 이제는 대부분 별호를 대면 알 만한 이들이 나왔기에 경기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즉, 천화의 돈벌이가 영 시원찮아졌다는 뜻이다. 모두가 알 만한 승부였고, 한쪽으로 돈이 몰리니 승자를 맞추더라도 배당되는 돈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처음에 임봉곤과 설영에게 걸어 이득을 보아둔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군.’
“비검탈혼 천화 소협! 남궁세가의 남궁창룡 남궁훈 소협! 비무대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나 스스로를 믿는 수밖에.’
결국 역시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나 자신을 믿는 것뿐이었다. 믿었던 일행들이 모조리 조기에 탈락을 해버린 바람에, 돈을 걸 대상이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패배에 돈을 건다면 승부조작이 되겠지만, 어차피 우승을 노리고 있기에 상관없다. 천화는 자신의 돈을 지키기 위해, 더욱 불리기 위해 가진 돈을 몽땅 걸고 비무대 위로 올랐다.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쳐 독기를 품은 남궁훈을 마주했다.
“같잖은 배경을 믿고 까부는 것도 여기까지다. 잡술 따위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지.”
“그러시든가.”
비무대에 오르자마자 녀석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짖었지만, 천화에게 위협이 될 리는 만무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의 남궁훈을 보니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나름대로 비검과 은사를 이용한 상대에 대응할 준비를 해온 것이겠지. 남궁세가 정도 된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비검을 사용하는 고수를 초빙해 연습을 시킬 여력이 충분할 터였다.
“근데 형이 지금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말이지.”
하지만 문제는 천화가 지난 설영의 비무를 보며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설영이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설영이 느꼈던 감정처럼,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혹은 이익에 벗어난다고 무림공적으로 낙인찍는 중원무림에 대한 분노였다. 그 역시 겪어봤으니까. 무신지로에서 천화 역시 무림공적으로 낙인이 찍혀본 적이 있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강하니까. 굳이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으니까. 결국 천화는 압도적인 강함으로 오히려 정파무림을 박살내었기에 괜찮았지만, 잔챙이들이 수없이 들러붙으며 귀찮게 굴던 그때의 기억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천화가 정파 소속이 아닌 정사지간의 존재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남궁훈은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다. 하다못해 어제만 되었더라도 비영검을 이용해 상대를 해주었겠지만, 천화가 검을 뽑아든 것이다. 무명검도 아니고 혈마검도 아니다. 대장장이 영감에게서 뜯어낸 유일 등급의 장검이었다. 그 둘은 너무 눈에 띄는 데다, 굳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이유가 없으니까. 그 모습에 남궁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득의양양해졌다.
“감히 대남궁세가의 앞에서 검을 뽑아들다니.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게 해주지.”
“시작하십시오!”
우우웅!!! 시작과 동시에 검기를 뽑아내며 단칼에 베어낼 기세로 천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으로 하늘을 가리키듯 높이 쳐든 특이한 자세.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창궁무애검법.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무공이자 정체성을 나타내는 검법이다. 검에 하늘을 담아내고자하는 광오한 의지가 담긴 그것이 놈의 손에서 펼쳐졌다.
“시끄럽고. 빨리 끝내자.”
무형보를 펼친 천화가 순식간에 놈의 사정권으로 짓쳐들었다. 남궁훈의 검이 문자 그대로 벼락같이 떨어져내렸다. 단지 하늘뿐 아니라 그 안의 구름, 벼락 따위를 모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창궁무애검법의 특징이니까. 타앗! 허나 천화는 그보다 먼저 몸을 회전시키며 날아올랐다. 거짓말처럼 제자리에 멈춰서는가 싶더니, 그대로 땅을 차고 뒷발부터 회전해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놈의 키보다, 치켜든 검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서 다시 몸을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운룡대팔식쯤 되는 절세의 경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면 이런 행동은 스스로 피할 곳을 없애는 바보 같은 행동이 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검을 쳐들고 있던 탓에, 물리적으로 다시 올려치는 형태의 공격이 불가능했으니까. 거기다 천화가 변화를 섞어 뛰어오르기 직전까지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동작을 취했으니, 남궁훈의 검은 신나게 맨 땅을 때렸고 천화는 그대로 발을 내리찍으며 놈의 얼굴을 밟았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 놈의 머리를 땅에 박아넣었다. 쿠웅!
“에이, 검은 괜히 뽑았네.”
사실 초식 자체를 파훼하는 것도 천화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창궁무애검법의 본질적인 멍청함을 천하에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설령 빠르게 알아차리고 검을 내렸다 다시 올려친다 해도, 대비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상대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경지에 올라 굳이 검을 쳐들고 시작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모르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무공의 오의를 깨달으라는 의미에서 저런 특이한 기수식을 가르치는 남궁세가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을 터였다. 조금 더 쉽게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 되레 무공의 약점이 되어 돌아왔으니까. 그것이 천하에 알려지는 순간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과감한 행동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충분한 능력을 갖춘 고수와 맞닥뜨린다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바닥에서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남궁훈이 그 증거였고, 무신지로에서도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으며 남궁세가에서 이 기수식을 익히는 것을 금지한 바 있었다.
“끝났죠?”
“…….”
“스, 승자는 비검탈혼 천화 소협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진행자가 천화의 승리를 선언하고, 남궁세가의 인물들이 서둘러 남궁훈을 살폈다. 머리를 부딪혔으니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녀석이 실려나가자 사람들은 더 환호했다. 무려 오룡이라 불리던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를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박살을 낸 것이니까. 물론 앞서 제갈무기와 팽무혁도 패배하긴 했지만, 남궁훈의 패배는 그들과는 무게감이 달랐다. 절정급에 오른 무당신룡과 설산빙화를 오룡이화 중 최고수로 꼽긴 하지만, 머지않아 그 역시 절정급에 오를 것이라 여겨지던 와중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설산파 따위에서 키워낸 나예린은 가볍게 꺾을 테고 무당신룡과 자웅을 겨룰 유일한 인물이 될 것이라 이야기되던 그가 고작 발길질 한 번에 쓰러졌으니, 사람들의 놀라움을 클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는 무위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던 천화에 대해 재조명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한바탕 파란을 일으킨 천화는 자신에게 걸린 배당금을 챙기고, 임봉곤이 치료를 받고 있을 의약당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비무 따위는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비무대에 오른 인물이 이를 갈며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이제 열여섯 명뿐인가?”
“아니, 너희 둘이 빠졌으니 열넷이지. 뭐, 그게 그거지만.”
“형님. 힘내십시오.”
“에이, 형님이 남궁창룡을 그냥 밟아버리는 거 못 봤어? 무진 도장이나 무당신룡, 설산빙화면 모를까 사천독룡쯤이야 낙승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하하!!”
의약당에서 확인한 결과, 다행히 비무자들 중 심각한 육체적 손상을 입은 이는 없었다. 천화가 의약당에 도착하자마자 실려온 남궁훈이 정신을 차리고도 한동안 멍해있긴 했지만 패배에 대한 정신적 충격일 뿐, 뇌에 손상이 온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듣자하니 이후의 경기는 뻔하게 흘러갔고, 예상했던 인물들이 16강에 올라왔다고 했다. 비무 참가자가 아니라서 의약당 출입이 불허된 금무성이 천화를 대신해 그들에게 돈을 걸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제 일행 중에는 천화만이 16강에 남았고, 남은 상대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이들뿐이었다. 아직 오룡이화 중 셋이 남아있었고, 그들 못지않은 실력임이 분명한 무진 도장도 있었으며, 그밖에 구파일방에서 은밀히 키워낸 후기지수들도 활약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조심해. 피독주가 있더라도 상대는 당문이니까.”
“괜찮아. 내가 소싯적에는 말이야. 독을 물처럼…….”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너 강호 초출이잖아!”
흠. 경력있는 신입이라고나 할까?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는 설영에게 천화는 그저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다음 천화의 상대는 사천독룡 당문악. 무해를 빠져나올 때 한번 마주친 적 있는 인물이었고 당가의 자식답게 끈질기고 독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천화에게도 피독주가 몇 개나 있어서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을 테지만, 사천당문이라면 모른다. 독이라면 중원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그들이니, 천화가 가진 피독주가 통하지 않는 독을 사용할 수도 있다. 소가주씩이나 된다면 그런 흉악한 독을 다룰 줄 알 것이 분명하고. 이런 비무대회에서 그 정도 독을 사용할까 싶기도 하지만, 당문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는 것이다. 당문은 독뿐 아니라 암기로도 유명하기도 했고.
“아무튼 그런 독쟁이들은 독만 제대로 못 쓰게 만들면……. 어?”
“왜 그래? 무섭게.”
그때 문득 천화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위험한 시도일 수 있지만, 생각처럼만 된다면 아주 간단하게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흐흐흐흐!”
아무것도 아니라기엔 다소 위험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천화는 비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