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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세 가지 기연 (1) (391/481)

<147화> 세 가지 기연 (1)2021.10.12.

16586683279176.jpg“누구십니까?”

그러나 아직은 아는 척을 할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때문에 천화는 모르는 척 그에게 말을 건넸고, 상대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16586683279181.jpg“고놈 연기력이 제법이구나.”

16586683279176.jpg“?”

16586683279181.jpg“아니지. 잘하고 있는 것이지. 자, 일단 이것부터 받거라.”

상대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천화를 향해 한 권의 책을 던져주었다. 역근경(易筋經). 바로 천화가 찾고 있던 그것이었다. 소림의 시조인 달마대사가 직접 저술했다고 알려진 저서 중 하나이자, 제대로 익힌 이가 없어 방치되고 잊혀진 비운의 비급이었다.

16586683279176.jpg“이걸 어찌?”

16586683279181.jpg“그걸 찾고 있던 게 아니었던 게냐? 다른 것도 찾아주랴?”

뭔가 알고 있다는 말투. 정말 이자는 천화의 의중을 알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순간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건가? 그럼 혹시 다시 돌아갈 방법도?

16586683279181.jpg“그렇게 보지 마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니.”

그런 천화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느꼈는지, 노스님은 가볍게 손을 저으며 천화의 기대를 부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분위기는 여전히 팍팍 풍기고 있었다.

16586683279181.jpg“시간을 아껴주었으니 늙은이 이야기를 잠깐 들어줄 수 있겠나?”

16586683279176.jpg“……예. 얼마든지요.”

보통이라면 제한 시간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상대하지 않았겠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천화도 긴장하며 예를 취했다.

16586683279181.jpg“다른 건 아니고, 그냥 늙은이의 노파심 정도라고 해두지.”

16586683279176.jpg“예. 어차피 듣기만 할 겁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소림신승이라 하나 그가 하는 말을 다 들어줄 필요는 없었기에 천화는 선을 긋고 경청했다. 무례하다 말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미 무신지로에서 여러 번 만나본 상대이기에 이 정도로 토라지지 않을 성격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신승은 그런 천화를 보며 피식 웃은 뒤, 옛날이야기를 하듯 말을 꺼냈다.

16586683279181.jpg“조금 더 서둘러 강해지는 것이 좋을 걸세. 자네가 이것저것 일을 벌려둔 탓에 천기 역시 빠르게 변하고 있더군.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세상이 붉게 물들 것이니, 그 또한 자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네. 자네가 더 바삐 움직일수록 고통 받는 양민들이 줄어들겠지.”

16586683279176.jpg‘봤네, 봤어.’

푸근하게 웃다가 돌연 묵직한 말을 던지는 신승을 보며, 천화가 대략의 상황을 짐작했다. 천기를 읽은 것이다. 상단전을 연 이들 중에서도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천기 읽기’를 그가 사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천화도 보고 듣기만 했지, 직접 그 능력을 가져보지는 못했기에 거기에 자신의 존재까지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황상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해보였다.

16586683279176.jpg‘이 정도로도 부족하다고?’

그렇다면 저 말의 토씨 하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정도의 성장 속도인데도 부족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천화가 이리저리 불을 질러놓긴 했지만, 꽁무니에 불이 붙은 마교 놈들이 튀어나오기까지는 아직 제법 시간이 있을 터였다. 당장 내일 무림맹이 결성되고 마교의 발호를 천하에 알려도 마찬가지. 아니, 그러면 오히려 잠잠해지고 무림맹의 이름이 무색해질 때까지 버티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무림맹의 결성이 마교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 강화를 위함이라는 소리가 돌 테니까 말이다. 반대로 마교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으샤으샤만 하다가 끝이 나도 마찬가지다. 이미 몇 차례의 작전이 실패했다고 에라 모르겠다 하며 꼬라박는 짓은 예전의 마교라면 가능했겠지만, 현재의 천마가 할 만한 방식은 아니니까.

16586683279176.jpg‘뭔가 내가 놓친 게 있는 건가?’

16586683279181.jpg“물론 그대로만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그만큼 많은 양민들이 고통을 받겠지.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적게 피를 흘리는 것이네. ……를 대비할 필요도 있고.”

16586683279176.jpg“뭐라고요?”

중간에 신승이 말을 흐린 것인지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이 있어 되물었지만, 그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것까지 말하면 천기누설이라는 것일까? 무신지로였다면 필터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뭔가 당장 말해주기 곤란하거나, 말할 수 없는 듯싶었다.

16586683279176.jpg“저한테 그걸 왜 말해주시는 겁니까? 영감님도 꽤 강하잖아요? 천기를 읽으실 수 있으면 직접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소림신승이라지만, 그 정도까지 천기를 읽어낼 수 있다면 스스로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닌가? 천화는 꽤 강하다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소림신승쯤 된다면 천하십대고수와 겨루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강자였다. 오히려 따져본다면 상위에 속하는 수준의 무력이라 할 수 있겠지. 괜히 소림의 수호신이라는 말이 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무공의 상성상, 그가 익힌 반야대능력은 마기를 가진 이들에게 쥐약과도 같았다. 제 아무리 천마라 할지라도, 비등하게 겨루어볼 수 있다는 말이다.

16586683279176.jpg‘결국 털리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이왕 천기를 읽고 누설도 하는 김에 스스로 슥삭 해치워버릴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자신을 돕고 이야기를 나누는 쪽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장 소림신승이 전면에 나선다면 방장은 물론이고 중원 내에 정파란 정파는 모조리 뒤따를 텐데, 저들이 수작을 부리기도 전에 먼저 마교의 본거지를 칠 수도 있지 않을까? 십만대산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그곳에 숨은 마교의 본거지를 찾기가 어렵다지만 그 또한 천기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16586683279176.jpg‘혹시 거기까지 읽은 건가?’

물론 무신지로에서는 패배했다. 오히려 천마가 직접 정예들을 이끌고 소림사를 공격해서 이곳저곳을 불바다로 만들고 무승들의 씨를 말려버리지. 소림이 봉문을 하고, 무림맹주로 소림방장이나 신승이 아닌 청성파의 장문인이 추대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십대고수가 대부분 죽어나가고, 그가 가장 강한 인물로 남았으니까. 설마 거기까지 읽은 것일까?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패배하는지까지 읽어낸 뒤, 역으로 이용해 천마의 목을 따버렸을 텐데. 이해는 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16586683279181.jpg“흘흘. 늙은이를 고생시킬 참인가? 그거 참 너무하는구만. 어차피 나로는 어렵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그를 넘어설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네. 나 또한 목숨을 걸어야겠지.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를 해결할 수 없네.”

또였다. 분명 입술을 달싹거리고는 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독순술로 입술 모양을 읽어보려 했지만 그 또한 불가능했다. 분명 보기는 했는데,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읽었으나 떠오르지 않는 기묘한 현상에 천화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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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6683279181.jpg“아직은 때가 아니네. 나중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게야. 그러니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게. 단, 나중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피를 덜 흘려야 할 걸세.”

그 생각을 읽었는지 신승이 천화를 달랬다. 어쩐지 그 짧은 순간에 더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천기를 읽으면 수명이 줄어든다던데, 그 때문일까? 그렇기에 더 냉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16586683279176.jpg‘이 바닥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니까.’

이 무림에서 호의와 아낌없는 지원은 있을 수 있지만, 이유 없는 호의와 지원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 제 아무리 소림신승이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믿을 수 없었다.

16586683279181.jpg“슬슬 이야기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그럼 늙은이의 푸념을 들어주었으니 상을 주어야 할 텐데……. 그 왼쪽 건너편의 서고로 가보게. 자네가 찾고 있는 다른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게야.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마음껏 찾아서 가지고 가게.”

16586683279176.jpg“예? 가지고 나가라고요?”

16586683279181.jpg“어차피 그럴 참이지 않았나? 이 넓은 서고에서,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서책 몇 권 사라졌다고 알아볼 이도 없겠지. 걸리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흘흘.”

사실 그랬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몸 검사를 해서 서책의 유출을 막긴 하지만 천화에게는 소지품창이 있었으니까. 몇 권이 아니라 몇십 권을 가지고 나가도 걸릴 리가 없으니, 하지 않으면 바보인 것이다. 무신지로에서는 시스템이 개입해서, 장경각 안에서는 소지품창을 열 수 없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도 그럴까? 천화는 아니라는 쪽에 한 표를 던졌다.

16586683279176.jpg‘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신승이 소지품창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다는 소리였기에, 마지막으로 다시 물었다.

16586683279176.jpg“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천기누설은 반작용도 상당하다고 들었는데요.”

소림신승이 외인에게 장경각의 비급을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지를 않나, 천기를 누설하지 않나. 제 아무리 소림신승이라 할지라도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행하며 자신에게 조언을 하는 이유를 말이다.

16586683279181.jpg“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나. 이렇게라도 세상이 자네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을 뿐이네.”

16586683279176.jpg“…….”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천화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신승은 빙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16586683279181.jpg“지금의 인연들을 소중히 하게나. 그리고, 지금 함께하지 않는 이들도 나중에 큰 힘이 될 테니 너무 미워하거나 배척하지는 말게.”

16586683279176.jpg“예?”

천천히 걸어가는 듯 보였으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신승의 등 뒤로 천화가 짧은 의문을 남겼다. 첫 번째 말이야 그렇다 치지만, 뒷말은 좀……. 신승 역시 그래도 정파라는 것일까? 다른 구파일방이나 대문파들은 사실 그다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천화였기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16586683279176.jpg“뭐, 듣기만 할 거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 말은 들어주기는 어렵겠지만, 다른 말이라면 얼마든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 천화는 즉시 그가 일러준 서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16586683279176.jpg“진짜 있네?”

그리고 이곳에서 얻으려던 가장 중요한 비급 중 두 번째 것을 얻을 수 있었다.

16586683279176.jpg“아직 시간이 좀 남았군.”

다른 이들이라면 한 권의 비급을 찾아 외우기도 바쁘겠지만 천화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천화는 즉시 자리를 깔고 앉아 비급을 익히기보다 다른 쓸 만한 무언가가 없는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고, 또 그때 발견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을지를 살핀 뒤 몇 권을 더 소지품창에 챙겨넣었다.

16586683291305.jpg“시간에 맞춰나오셨군요. 잠시 확인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진에 딱 맞춰서 장경각을 빠져나왔다. 몸수색이 있었지만 당연히 걸릴 리가 없다. 간혹 옷 속에 비급의 내용을 옮겨적어 나오는 이들도 있었기에 꽤나 샅샅이 검사를 했지만, 천화는 가볍게 통과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슬슬 밤이 깊어가고, 내일 두 번의 비무를 치르려면 일찍 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천화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16586683279176.jpg“후우. 둘 다 익힐 수 있으려나.”

장경각에서 가지고 나온 서책 중 가장 원하던 두 가지 비급을 지금부터 익힐 생각이었으니까. 먼저 역근경. 그것은 무서라고 보기 애매한 것이었다. 스스로 근골을 바꾸어내는 방법이 담겨진 것이니까. 근골을 바꾼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새로운 몸을 얻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꿈에 바라던 환골탈태까지는 아니지만, 보다 무공을 익히기 적합한 근골과 체질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언뜻 듣기에도 꽤 좋아보이는 능력이지만, 역근경을 통해 실제 근골을 바꿔낸 이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적어도 현 무림에는 없을 터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읽어보면 평범한 신체 단련법일 뿐이니까. 그러나 이것을 따뜻한 물에 적시면 다른 글이 나타났다. 특수한 약초의 즙을 짜내 적어넣은 것이기에, 따뜻한 물로 적셔야만 진짜 내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천화는 즉시 소지품창에 준비해두었던 따뜻한 물과 대야를 꺼냈고, 그 안에 역근경을 집어넣었다. 필사본은 많고 많았지만 그 안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오직 진품이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근경을 습득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역근경을 습득할 수 있었다. 딱히 성취를 올리는 방식이 아니었지만 사용자의 지식과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성과를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더불어 무공의 성취가 오르면 다른 이들의 근골까지 바꿔줄 수 있기에, 이것을 가지고 상당한 돈벌이를 한 이도 있었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근골을 개조할 수 있고, 아예 경지가 높아져 환골탈태를 해버린다면 필요 없어지긴 하지만.

16586683279176.jpg“후우, 그러면 이번엔…….”

일단은 습득까지. 다음으로 대야의 물을 비우고 다시 찬 물을 채워넣은 천화가 또 한권의 비급을 꺼내들었다. 같은 방식으로 물에 적셨다. 세수경(洗髓经). 이 역시 달마대사가 남긴 글 중 하나로, 역근경이 근골을 개조해주는 것이라면 세수경은 혈도와 기맥을 씻어내는 수법이 담긴 비급이었다. 근골과 혈맥의 개조. 당장 무공을 익혀봤자 그다지 쓸 곳도 없는 천화에게는 이 두 가지가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뤄내는 순간 그의 능력치는 물론 모든 외공과 내공 초식이 함께 강화될 테고, 더불어 무공을 펼칠 때 몸에 가해지는 부담 또한 크게 줄어들 테니까.

16586683279176.jpg‘소환단 하나만 가불로 땡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받을 거, 일찍 좀 땡겨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욕심까지 생겨났지만, 오늘밤 동안 그 두 가지만 이루어도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몸과 기가 뜻대로 움직여주기만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 테니 말이다. 내일이 기다려지고, 상대들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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