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세 가지 기연 (2)2021.10.14.
“으갸갸갸갸갸! 어우, 죽겠다.”
날이 밝아오도록 방에 틀어박혀있던 천화가 찌뿌둥한 몸을 쭉 펴며 앓는 소리를 냈다. 같은 자세로 밤을 꼴딱 새운 탓에 피로도 쌓이고 몸이 삐걱거리는 것이다. 똑똑 때마침, 밖에서 천화를 찾는 기척이 들렸다. 미리 자신이 나갈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두었지만, 식사 때가 지나자 걱정되어 찾아온 모양이었다.
“일어났……. 어?”
“왜? 날 샌 사람 처음봐?”
“아, 아니. 묘하게 뭔가 달라진 것 같아서…….”
방문이 열리고, 천화를 마주한 설영이 어딘지 어색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근골이 바뀌고, 기맥을 씻어내며 외형도 조금 바뀌었으니까. 외모가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일단 피부가 좋아졌고, 몸의 노폐물들이 빠져나가며 조금 살이 빠지는 효과도 있던 것이다. 저절로 풍겨나오는 기도도 달라졌을 테고. 설영이 어색해하는 것도 그 미묘한 차이 때문일 터였지만, 굳이 역근경과 세수경을 익혀낸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기에 천화는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며 밖으로 나왔다. 대충 확인해보니 다음 비무까지는 어느덧 반 시진 가량이 남은 상황이었다. 오늘 하루에 준결승인 4강전과 결승 비무를 모두 치러내야 하니 오전에 두 번, 오후에 한 번의 비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없었지? 대단한 고수가 나타났다거나…….”
“고수? 글쎄? 이제 올 사람은 거의 다 오지 않았을까? 오히려 제자나 가솔들을 먼저 돌려보낸 곳은 있는 것 같던데.”
혹여나 밤과 아침 사이, 소림신승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을까 싶어 넌지시 떠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물론 소림신승이라는 자체가 워낙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보니 마지막에 등장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쯧쯧. 누가 속 좁은 놈들 아니랄까 봐.”
제자와 가솔들을 돌려보낸 것은 아마 비무대회에서 패배한 문파들일 터였다. 그중에서도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해당하는 이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들쯤 되지 않는다면 사실 비무대회에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좀 더 무공을 견식하고 교분을 나누며 최대한 알찬 시간을 보내려 할 테니까. 때문에 굳이 신경 쓸 것은 없었다. 그들이 아닌, 일반 문파나 관중들이 쫙 빠진다고 한다면 뭔가 의심을 해봐야겠지만 이 정도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에 먹칠을 한 것도 열이 받는데, 다른 문파가 우승을 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가는 화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 무림대회의 끝에 있는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아마 장문인이나 가주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일단 배부터 채워보실까?”
근골을 개조하고, 기맥을 씻어내는 일은 상당한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보통은 비무 전에 식단을 조절하지만,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은 천화는 식당으로 이동하는 대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소지품창에서 음식을 꺼냈다. 소림이다 보니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들은 온통 풀떼기뿐이었으니까. 잔뜩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넣으며 다음 비무가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천화, 조심해.”
“형님, 무리하지 마십시오.”
“믿습니다. 형님!!”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결승 진출자를 가려내기 위한 비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진룡무쌍 천화 소협! 무당파의 무당신룡 청수 도장! 두 분은 비무대 위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는 무당신룡 청수 도장. 기존에 후기지수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던 오룡이화 중 유일하게 4강에 진출한 인물이자, 나이답지 않게 절정의 무공 수위를 갖춘 강자였다. 때문에 모두가 천화를 걱정하며 비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잘 버텨왔지만, 아니 놀랍게도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승리를 거둬왔지만 이번 상대는 절정 고수였으니까. 검기가 아닌 검강을 뽑아내는 상대와 겨루어야 하는 것이다.
“걱정 마. 그럼 다녀올게. 나한테 돈 거는 거 잊지 말고!”
물론 이전에도 절정급의 고수는 몇 번이고 상대했던 천화였지만 지금은 혈마검도, 무명검도 사용할 수 없었다. 무한에서 새로 얻은 검은 유일 등급으로, 검기를 뽑아내면 검강과도 몇 수 겨룰 수 있을 만큼 훌륭한 놈이었다. 하지만 다른 두 검에 비하면 손색이 큰 게 사실이었기에, 설영조차 천화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혈마검이나 무명검을 사용한다면 걱정하지 않겠지만, 검강을 이겨낼 수단이 없어보였으니까. 하지만 천화는 자신있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가장 중요한, 자신에게 돈을 걸라는 말도 잊지 않고서. 아마 지금까지 번 돈보다 이번 비무에서 승리하면 얻을 수 있는 돈이 더 크지 않을까? 판돈 자체도 커졌지만 상대가 상대이니 말이다. 진룡무쌍이라는, 거의 무명에 가깝던 천화에게는 과분하게 여겨질 만한 별호를 얻었다지만 절정과 일류의 차이는 대단히 컸다. 그것을 알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화의 행보도 여기까지라도 판단하고 있었다. 천화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비무대 위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비무대에 오르자 꾸벅 인사를 하는 청수 도장. 사실 그는 어째서 오룡이화 따위의 집단에 속해 함께 어울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진중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제법 의와 협을 따질 줄도 알아서, 무해에서 빠져나올 때도 천화와 설영이 피해를 입을까 스스로 나서 마인들을 상대해주기도 했고.
‘굳이 따지자면 사문 때문이겠지.’
오룡이화라는 것은 아무래도 후기지수 개인들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각 사문을 대변하여 친목을 쌓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설령 오룡이화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고 있더라도 사문이 별로면 한데 묶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상대적으로 실력이 부족하면서 외모와 배경으로 자리를 꿰찬 매화선녀 이소란이었고.
“시작하십시오!”
때문에 천화 역시도 청수 도장을 그리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일단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사문에서 영약을 퍼먹인 것도 있겠지만 본인의 재능과 노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니까.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훈이 과연 영약이나 재능이 부족해서 아직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익힌 무공의 등급이 부족해서? 아니다. 밑바탕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다만 그 재능과 지원에 비해 노력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반면 청수 도장은 노력하는 천재랄까? 성격이 좀 재미가 없는 것만 빼면 괜찮은 녀석이기에 이전의 녀석들처럼 굴욕을 줄 생각까지는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무당의 검은 부드럽지만 날카롭습니다.”
짧은 경고와 함께 청수 도장이 먼저 짓쳐들었다. 구름을 밟은 듯 상체가 흔들리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 무당이 자랑하는 제운종이다. 그런 안정적인 하체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검법이야말로 무당을 대표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 경지에 도달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때문에 무당의 검법은 어설프게 익히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 있지만, 경지에 이르면 마치 바람과 싸우는 기분이 들게 된다. 처음 겪어보는 이들은 마치 스스로와 싸우듯 허공에 마음껏 칼질을 하다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게 공격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제법.”
허나, 그것에 당하기에는 천화의 경험이 너무 많았다. 상대가 바람이 된다면 나는 바위가 된다. 섣불리 보법을 펼치며 마주치는 대신, 우직하게 서서 청수 도장의 검이 먼저 공격해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으흠……!”
그러자 청수 도장도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그냥 바위가 아니라 칼날이 잔뜩 꽂힌 바위 같았으니까. 빈틈이 없는 것은 물론, 잘못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간 역으로 자신이 베일 것 같은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또한, 걸음을 놀려 뒤를 잡아보려 해도 마치 천화가 자신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소림의 금강부동신법이 이러할까? 아무리 돌고 돌아도 준비하고 있는 상대의 정면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 도저히 선공을 취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명 가만히 멈춰있는데, 함께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드루와, 드루와.”
그렇게 청수 도장이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자 천화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감이 좋은 녀석이군.’
지금 자신의 자세는 상대의 수준에 따라 극과 극으로 보일 만한 것이니까. 자연체. 하수가 보기에는 엉거주춤하게 선 빈틈투성이 같지만 언제 어떻게든 움직일 준비가 마쳐진, 공방일체의 자세였다. 만약 가볍게 들어왔다면, 환골탈태하듯 몸 안의 모든 것을 바꾸어낸 천화의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을 당했을 터였다.
“우우우우!”
“뭐하는 거냐! 싸워라!”
“눈싸움만 하는 걸 보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고!!”
“안 오면 내가 간다?”
그런 무의미한 탐색이 계속되자 먼저 움직인 것은 천화였다. 사실 이대로 시간을 끌더라도 천화가 무조건 유리한 싸움이었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그에 비해 청수 도장은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중이었고, 무엇보다 비무대 밖에서 들려오는 야유소리가 상당한 압박이 될 테니까. 당연히 거뜬하게 제압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좀처럼 공격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하니 야유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재미도 없었을 뿐더러 혹여나 무당신룡이 패배를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당연하게도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무당신룡에게 돈을 걸었으니까!
“헛.”
한순간 천화의 몸이 쑥 밀려나며 앞을 가로막자 천수 도장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할 수 있지? 그저 땅을 박찼다고 보기 어려웠다.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튕겨져 나가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지면에는 크게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극소량의 힘으로 이만한 도약을 이루어냈다는 것인데, 이런 식의 보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어딜 봐? 날 봐!”
채앵!! 잠시 천화가 도약한 지점을 바라보던 청수 도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리하게 찔러오는 천화의 검을 막아내기 위해 검기를 피워올렸다.
“큭.”
긴장으로 몸이 굳으니 특유의 유연함이 약해진다. 평상심은 무당 무공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지만, 예측 불가의 움직임을 펼치는 천화 앞에서는 아무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깨 펴. 겨드랑이 붙이고.”
까앙 까앙 까앙 천화 역시 유효타를 못 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조금 달랐다. 청수 도장의 몸이 굳으며 드러나는 허점에 검을 툭 가져다대며 방어할 수 있게끔 여유를 두고 있는 것이다.
“어허, 턱은 내려야지! 눈은 상대방을 응시하고!”
지도 대련. 설마하니 비무대회에서, 그것도 준결승전에서 상대를 지도하는 지도 대련을 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천화가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무공의 경지가 낮다 하나, 부족한 것은 내공의 총량뿐이었으니까. 어제까지라면 천화로서도 조금의 위태로움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새벽 사이 이루어낸 진보는 고작 후기지수 따위가 따라잡기 어려운 것이었다. 몸과 기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기존보다 훨씬 적은 힘으로 강한 위력을, 세밀한 조종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천화 같은 고인물에게 있어서 무공의 경지를 넘은 것만큼이나 커다란 변화였다. 또한 새로 경지를 넘어설 때마다 그 효과가 함께 높아질 테고.
“……뭘 하는 겁니까.”
그래서일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청수 도장이 이를 꽉 깨물며 말을 건넸다.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냐는 뜻이었다. 이런 지도 비무가 가능하다면 단박에 몰아붙여 승리를 따내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왜? 뭐 문제 있나? 너도 헛짓거리 하고 있잖아?”
하지만 천화의 대답은 싸늘했다.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은 너도 똑같지 않냐는 것이다. 나름대로 제운종과 유운검법을 사용하며 천화와 맞서고 있는 듯 보이지만,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검강을 뽑아내지 않는 것부터, 그리고 놈이 익힌 무공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것은 유운검과 제운종만이 아니라는 것을 천화는 알고 있는 것이다.
“장문인이 시키드나?”
“…….”
“적당히 싸우는 척하다가 져주래? 그래서 알았다고 했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천화도 꽤나 화가 난 상태였다. 새로운 힘도 얻었겠다, 간만에 제대로 붙어볼까 싶었더니 상대가 애초에 이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승산이 높지 않을 텐데, 고작 그 따위 마음가짐으로 비무에 임한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같잖을 짓을 한단 말인가? 쿠웅 그 순간, 천화의 몸이 쭉 늘어나듯 청수 도장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어떤 초식도 펼치지 않은 채, 가슴팍이 울리도록 주먹을 때려넣은 뒤 다시 물러섰다.
“까불지 마, 임마. 전력을 다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네가 이기면 너희 장문인이 그렇게 원하는 남만 교역권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 대신 내가 이기면…… 너도 내 뜻대로 움직여줘야겠다.”
“저에게는 그만한 권한이…….”
“권한은 무슨. 무당이 움직일 필요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내 뜻대로 하는 거다. 그게 무엇이든지. 뭐, 공평하게 한 번으로 하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후우. 사문을 위해서라면, 알겠습니다.”
가만히 천화를 노려보던 청수 도장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뭘 생각하는 거야?!”
뭔가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되었다. 야. 근데, 그런 생각을 했으면 거절해야 하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