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방해꾼들 (1)2021.10.21.
무림인들에게 최고의 영약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소림의 대환단이라고. 무려 60년 공력, 즉 1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데다 벌모세수를 받은 것처럼 체질개선까지 이루어낼 수 있으니, 그보다 뛰어난 영약이 또 어디 있겠나. 자하신단 등 두 번째로 꼽히는 영약들이 40년 공력을 얻는 것을 생각할 때, 2등과의 격차가 어마어마할 만큼 독보적인 영약이 바로 대환단이었다. 하지만 대환단은 만들기가 극히 까다롭다. 연단술에 조예가 깊은 대가급의 연달술사조차도 실패할 확률이 제법 있을 만큼, 제조법을 알고 있어도 만들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재료가 되는 영초들이 무척이나 희귀해서 수십 년에 몇 알이 겨우 만들어질까 말까할 정도이다. 그렇기에 대환단이 거의 전설의 영약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환단을 제외하고 나면, 소림을 대표하는 영약은 그보다 아래 등급의 소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환단 역시 재료가 귀하고 만들기는 까다로웠지만 그래도 한 해에 한 알 꼴로는 만들어지니까. 그리고 소환단을 섭취하더라도 약 30년 공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 귀중한 영약이 천화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영약 ‘소환단(패왕)’을 섭취하셨습니다.] 뱃속이 뜨끈해지는 느낌. 소모품임에도 무려 패왕 등급이 붙은 영약답게, 전신에 충만하게 퍼지는 기운을 느끼며 천화가 즉시 천화만변무상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캬, 효과 좋고!’
그러자 바로 약효가 느껴졌다. 전신 세맥을 휘돌던 기운들이 천화의 의지에 따라 단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길을 잘 닦아놓은 덕을 톡톡히 보겠군.’
다만 모여드는 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영약을 섭취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최대 공력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본인의 내공 운용 능력이 미숙하여 꽉 붙들고 있지 못해 유실되거나, 영약의 기운이 체내에 휘도는 동안 탁기와 부딪혀 소실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영약이 줄 수 있는 최대 효율의 절반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공 운용 능력이 최상입니다.] [영약의 흡수 효율이 증가합니다.] [근골 : 천무지체를 확인했습니다.] [영약의 흡수 효율이 증가합니다.] [혈맥에 노폐물이 극히 적습니다.] [영약의 흡수 효율이 증가합니다.] [전신 세맥이 한계까지 강화되었습니다.] [영약의 흡수 효율이…….] 하지만 천화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내공의 운용 능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압도적이었고, 역근경을 통해 [근골 : 천무지체]까지 획득해둔 터였다. 어디 그뿐인가? 세수경을 통해 혈맥을 씻어두었고, 그간 소수민족의 비전 등을 얻어 단련해둔 전신세맥의 강화 역시 소환단을 흡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소환단과 대환단의 특징 중 하나는,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 기운을 나누어 몸을 함께 만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몸이 완벽히 만들어져 있는 상태라면? 그 기운들은 고스란히 단전에 쌓인다. 소환단의 순수한 기운들이 모조리 천화의 내공으로 변해 쌓이고 있었다. [내공 수치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내공을 쌓을 수 없습니다.] 불과 반시진도 지나지 않아 천화는 한 가지 알림을 맞이했다. 내공 수치가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은 천화가 진정한 일류의 끝자락에 들었음을 의미했다. 더불어 절정의 벽을 넘을 최소한의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대로 뚫는다.’
아직 소환단의 약효가 몸에 남아있었다. 이대로 운기를 멈추면, 아니 유지를 하더라도 소환단의 기운은 결국 세맥 속에 깃들거나 몸 밖으로 빠져나가버릴 터였다. 그런 아까운 짓을 할 수는 없지. 그렇기에 천화는 즉시 절정의 벽을 허무는 것에 도전했다. 내공을 일단 단전으로 모두 끌어모은 뒤, 응축시켰다. 천천히,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묵직하게 내공을 눌러담은 뒤, 임독이맥을 공략하기 위해 움직여나갔다.
‘지금이라면 가능해.’
육중한 기운이 덩어리는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천천히 움직였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혈맥을 타고 움직이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약간이지만 속도를 붙여가기 시작했다.
‘힘을 끌어 모아서…….’
고오오오오오오오- 처음에는 느렸지만 한번 붙기 시작한 속도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힘은 질량 × 가속도라고 했던가? 응축된 기운이 속도까지 붙자 정말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머금었고, 이미 뚫린 기맥을 따라 몇 바퀴 돌리며 힘을 끌어모은 천화가 단번에 몰아쳤다. 임독이맥의 타동! 강력한 기운과 기세를 몰아 그것을 이루어내려는 것이다. 설영이 절정에 오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과는 달랐다. 그때는 이미 미세하게 열려있는 구멍을 열기 위해 바늘을 찌르듯, 비집고 들어가듯 조심스레 기운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천화는 무지막지한 기운을 한번에 몰아침으로써, 막힌 혈도를 곧바로 뚫어버리려는 것이다.
‘한 번에 간다.’
퍼엉! 천화가 마음먹은 순간,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직 내면을 관조하고 있는 천화에게만 들리는 소리였기에 밖에서 누군가 뛰쳐들어올 일 따위는 없었다. 막혀있던 혈맥을 강제로 뚫어낸 충격에 엄청난 고통이 따라와야 했지만, 지금 천화는 벅찬 희열에 휩싸여있었다. 뚫지 못하고 막혀버렸다면 그 반작용이 엄청났을 터였다. 하다못해 뚫어냈더라도 그 충격을 버텨낼 만큼 혈맥이 튼튼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찢겨져 기운이 유실되었을 테고, 충격으로 인해 심하면 불구가 되거나 백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뚫어낸 이상, 버텨낸 이상 그에게 남은 것은 혈도가 타동되며 대해처럼 흐르는 내기의 물결뿐이었다. 오히려 천천히 밀어냈을 때보다 빠르게 남아있는 찌꺼기들까지 모조리 쓸어내며 흐르고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가 퇴적물들을 쓸어내기는 훨씬 쉬우니까. [임독이맥을 타동하셨습니다.] [별호 : 절정 고수를 획득하셨습니다.] 임독이맥이 타동되며 절정의 경지를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좁쌀만 한 구멍을 열어 간신히 맛만 본 정도가 아니라, 혈도를 활짝 열어젖힌 완전한 절정 고수가 되었다.
“후우!”
천화가 가부좌를 풀고 천천히 눈을 뜬 것은 임독이맥을 타동하고 나서도 무려 이각여가 흐른 뒤였다.
막힘없이 흐르는 내기를 진정시키는 것은 천화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조금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기 위해 모조리 쓸어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아직 남아있는 소환단의 기운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다시 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수많은 반가운 알림을 맞이할 수 있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 몇 번인지도 모를 레벨 업이 일어나며 그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0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200레벨을 넘긴 것이다. 사실 무공 수위에 비하면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성장했을 때, 200레벨은 절정 고수가 아니라 일류고수의 중후반쯤 되었을 때 달성하니까. 허나 천화가 워낙 굵직한 일들을 벌이며 성장하다 보니, 레벨보다 무위가 더 빠르게 성장을 한 까닭이었다. 당연히 그것이 허물이 될 수 없었고, 천화 역시 만족했다. [200레벨 특전이 부여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증가한 것도 마음에 들지만, 고대하던 특전이 부여됐으니까. 100레벨을 달성했을 때 겪었던 것과 같이 무공을 진화시킬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된 것이다. [보유하고 있는 무공 중 하나를 선택하여 진화시킬 수 있습니다.] [단, 진화시킬 무공의 숙련도가 10성 이상이어야 합니다.]
“무공 진화.”
무엇을 진화시킬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원래는 100레벨 때 진화를 시켰어야 했지만, 상황이 바뀌며 순서가 조금 미뤄진 것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천화만변무상심법을 일찍 얻어 제대로 뽑아먹었으니 아쉬움은 없다. 당장 소환단을 완벽히 흡수하며 절정의 반열에 오를 수 있던 것도 심법의 도움이 컸고.
“무형보를 진화시킨다.”
때문에 천화는 기분 좋게 진화시킬 무공을 선택했다. 무형보. 특정한 형식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도 언제든 어떤 자세로든 보법을 펼칠 수 있는 데다, 단거리용과 장거리용으로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보법과 신법에서 가장 중요한 속도라는 측면은, 다른 것들에 비해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치명적 약점을 지닌 그것을 진화시켰다. [무형보가 무형신보로 진화에 성공했습니다.] 그와 함께 머릿속으로 울려퍼지는 구결. 그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진화가 아니었다. 본 모습을 찾은 것이었다.
‘이거지.’
무형보가 맛보기였다면 무형신보는 완전판이라고나 할까. 무형보의 구결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이 채워지며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보법을 완성한 것이다. 기존의 장점에 속도와 내공 소모 감소라는 효율성까지 더한 최고의 경공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천화라는 고인물이 있게 만든, 그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조각이 채워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이제 어지간한 상대들은 모조리 씹어먹을 수 있을 터였다. 무신지로의 마지막에서 천화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
“쯧쯧. 그러게 소환단을 일찍 줬으면 좋았을 것을.”
눈앞으로 일어난 수없이 많은 알림창들을 모조리 정리한 천화는 혀를 차며 방을 빠져나왔다. 만약 소림이 좀 더 일찍 소환단을 내어주었다면 무진과 꽤 멋들어진 비무를 펼쳐줬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승을 차지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림대회, 비무대회의 위상을 높여줄 수준 높은 경기까지는 보여줄 수도 있었을 터였다. 이전의 힘을 아주 일부 되찾았을 뿐이지만 간만에 몸을 풀고 싶어졌을 테니까. 더불어 무공들의 숙련도 작업도 했을 테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니라며 가뿐하게 걸어나온 천화는, 내공을 갈무리해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도록 하고 설영을 찾았다. 금무성과 임봉곤은 각자의 일들로 바빠 만나지 못했다. 금무성은 만금상단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인맥을 쌓기 바빴고, 임봉곤은 주목받는 후기지수로 떠오른 탓에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있었다. 천화와 설영이야 사문도 없으니 상관없지만,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사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지무단에서 나서기로 했단 말이지. 잘 됐네.”
자신이 잠시 소환단을 흡수하는 동안 설영이 수집한 정보들을 전해들었다. 그중 가장 귀에 들어온 정보는 단연 천화가 하오문에 전달했던 마교의 암호문에 대한 것이었다. 하오문의 한 지부장이 암호문을 해독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추가연이 성공했나 보군.’
누구라도 굳이 밝히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추가연일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암호문에 적힌 기일에 약속된 장소로 납치범과 납치된 아이들이 나타날 테니, 사전에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의심되는 이들을 수색하고 잡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사실 백연이 인룡단에 맡길 일이 있다길래 그것을 맡기는 게 아닐까도 생각했는데, 지무단이 단독으로 맡는 모양이었다. 후기지수들에게 맡기에는 너무 위험하니까.
‘일종의 부탁이자 경고라고 봐야겠지.’
당연히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극비로 다뤄져야 할 정보였지만, 세주안이 장문인 급의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슬쩍 전해주고 간 것이다. 혹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자신의 딸인 세주연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는 뜻에서 전했거나, 만약의 경우 그녀를 구해달라는 의미도 있을 터였다. 아직까지 세주연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세주연이 어디 가서 납치나 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마교다. 당장 천화와 설영이 마주했던 녀석들만 하더라도 절정 고수가 다수였고, 최절정에 이른 강자 또한 존재했다. 그런 이들이 나섰다면 세주연 역시도 납치되었을 확률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세주안이 남겼다는 야수궁의 궁도들 중 다수가 지무단과 함께 그들을 습격하겠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만약 어떤 식으로든 세주연에게 위해가 가해졌다면, 마교는 무서운 적을 만들게 될 터였다.
“일단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네.”
하지만 당장 천화가 끼어들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제 천화의 무위는 지무단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 되었지만, 그들이 공동으로 작전을 펼치는 것을 다른 이들이 허락하거나 수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인룡단의 이름으로 첫 임무를 맡기겠다 했으니 무엇을 맡길지도 지켜봐야겠지. 아직 마교가 움직일 때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좀 더 지켜보고 단독 행동을 하든 어쩌든 결정해도 될 것 같았다. 각 단의 편성이 끝나고, 다시 그들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갖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정확히 삼 일 후, 소림 방장 백연이 대표 자격으로 인룡단의 인원들을 불러모았다. 수가 적은 것이 인룡단 전원은 아니고, 이번 임무에 필요한 인물들만 남기거나 다시 불러들인 것 같았다. 다만,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한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기존에 오룡이라 불리던 이들. 비무대회에서 형편없이 깨진 탓인지 그들 중 일부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비무대회에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나, 인룡단의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명예롭게 생각하여 욕심을 낼 텐데 말이다.
“……북해로 가라고요?”
하지만 잠시 후, 어쩌면 그들이 이곳에 없는 이유가 자존심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연이 그들에게 내린 첫 번째 임무는 다름 아닌 북해로 떠나라는 것이었으니까. 북해. 순백의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설국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더불어 세외사궁 중 하나인 북해빙궁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남만 땅을 야수궁이 지배하고 있듯이.
‘북해라니……. 잔머리를 썼군.’
그리고 북해빙궁은 이번 무림대회에 초청을 했으나 오지 않은 이들이기도 했다. 사실 오란다고 진짜 온 남만야수궁이 이상한 편이기는 했다. 세주연의 가출이라는 변수가 있었기에 나온 것이지, 세외사궁은 중원의 정파무림과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지만 딱히 좋지도 않았기에, 평소였다면 오지 않았을 테니까. 거리도 거리지만 기후조건이 세외와 중원은 너무도 달랐기에 굳이 그 불편함을 무릅쓰고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에게 사절단이 되어 다녀오라는 백연의 말은 꽤나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시간을 벌겠다는 건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천화는 그것이 자신을 중원에서 떠나보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북해까지는 먼 길이니까. 아무리 좋은 길잡이가 있더라도 왕복하면 두어 달은 금방 지나갈 터였다. 아마도 그 시간 동안 천화가 중원에서 활약하지 못하게 해서 잊혀지게 만들기 위함이겠지.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많이 희석될 테니까.’
이번에 큰 명성을 얻은 천화였지만, 그 명성과 주목도 이후 별다른 행보 없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천하십대고수쯤 된다면 도왕처럼 잠적한 채 몇 년이 지나도 그 이름이 회자되고 명성이 하락하지 않겠지만, 천화 정도의 아직 어설픈 명성을 가진 이들은 생각보다 금방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그사이 오룡이나 다른 후기지수들이 절치부심 수련을 쌓고 명성을 날린다면 오히려 천화를 앞선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그러기엔 두어 달의 시간도 짧은 감이 있지만, 어느 정도는 목적을 이룰 수도 있겠지.
‘대외적인 이유는 따로 있겠지만.’
물론 타당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교가 정말 발호한다면 중원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가능하더라도 피해가 너무 클 테니, 미리 세외사궁의 조력을 얻을 수 있도록 관계를 돈독히 해놓는 것이 좋았다. 마교의 발호는 중원뿐 아니라 세외에도 위협이 되니까. 늘 마교가 중원을 노리기 위해 움직일 때는 세외사궁이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했고, 혹여나 그들이 마교와 손이라도 잡는다면 중원은 큰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을 터였기에 단속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남만야수궁과도 교분을 다진 자네라면 가능할 것이라 믿네.”
게다가 천화는 이미 남만야수궁주와 호형호제를 할 만큼 놀라운 친화력을 보여준 바 있지 않은가? 남만과 북해는 그 성향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천화가 남만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번 기대를 걸어보아도 좋을 터였다.
“어떤가, 할 수 있겠나?”
“북해라……. 차라리 대막은 어떻습니까? 세외사궁과의 교분을 다지려는 거면 그쪽도 상관없지 않나요?”
이미 뱉어놓은 말도 있으니 무작정 싫다고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천화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보기를 원했다. 북해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제법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좀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쪽이 낫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북해보다는 대막 쪽이 천화에게는 나았다.
‘대막에 만년화초가 있었지.’
대막에서만 얻을 수 있는 만년화초라는 영초를 손에 넣으면 아껴두었던 공청석유를 먹어치울 수 있을 테니까. 극음의 성질을 지닌 공청석유는 제아무리 절정의 내공을 갖춘 천화라도 단독으로 먹었다간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골수까지 한기가 퍼져 내공증진은커녕 한 방울의 피까지 얼어붙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극양의 성질을 가진 만년화초와 함께 복용한다면 한기와 열기가 서로 중화되어 영약으로서의 효과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또 한 번의 경지 상승도 기대해볼 수 있곘지.
“대막? 흐음. 그건 어렵겠군. 최근 대막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군. 정확한 사유는 아직 이야기해줄 수 없네만, 지금은 위험해. 하여 조금은 더 상황이 안정되고 정보가 모이면 그때 사람을 보내볼 참이네.”
‘심상치 않은 일? 이맘때면…… 마적떼던가, 혈궁이던가? 쳇. 그럼 당장 찾아가는 건 무리겠군.’
그러나 천화의 그런 시도는 간단히 가로막히고 말았다. 대막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이다. 대충 예상가는 일은 몇 가지 있었기에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죠. 물건만 전달하고 오면 되는 거죠?”
“그렇네. 서신과 선물을 전달하고 답장을 받아와주면 되지. 마침 설산파가 길목에 있으니,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결국 천화가 그 제안을, 임무를 받아들였다. 달랑 서신과 선물만 전달할 거라면 거창하게 인룡단을 운용하기보다 천화 혼자 다녀오는 편이 훨씬 빠르고 편했지만, 격식을 갖춰 인사를 하고 정파 연합을 알리는 의미라니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중원과 북해의 길목에 위치한 설산파 출신인 나예린이 있으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겠지. 대신 천화는 인룡단장으로서 이번 사절단 인솔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는 것으로 합의하고 임무를 수락했다. 더불어 처음에 약속했던 활동비 역시 듬뿍 받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