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설산파 (1)2021.11.09.
북해로 넘어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꼭 설산파를 거치지 않더라도 북해에 진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사절단이 이쪽으로 방향을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설산빙화 나예린. 그녀가 꼭 사문에 들를 수 있도록 부탁을 한 것이다. 정파 연합의 수장을 맡고 있는 백연 대사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그 배경에는 나예린의 부탁과 그녀와 관련된 정파 무림의 약조가 있었다.
“정말 늦지 않게 오셨군요.”
슬슬 추위가 느껴졌기에 두툼한 털옷으로 갈아입던 사절단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온 천화와 설영, 세주연을 맞이했다. 한편으로는 아예 그들이 설산파를 떠난 뒤에나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따로 방문했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예린은 다시 사절단의 지휘권을 천화에게 넘기고 조용히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설산파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서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나예린은 천화에게 부탁한다는 정중한 표현까지 써가며 머리를 숙였다.
“으흠. 알겠습니다. 노력해보죠.”
그렇기에 천화도 대충 넘길 수는 없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바가 아니기도 했고. 잠시 사절단이 정비를 하는 동안 천화와 설영, 세주연도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고강한 무위를 갖춘 그들이기에 어지간한 추위 따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서불침의 경지에 달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어 여분의 옷들까지 꺼내 그들을 뒤따르는 야수궁의 무인들에게 전해준 뒤 설산파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설산이 꽤 높았던 탓에 보이는 것과 달리 다시 이틀 남짓을 걸어야 했지만, 어떻게든 초원의 경계를 넘어 북해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에 성공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저예요. 정파 연합에서 빙궁으로 향하는 사절단과 함께 왔습니다.”
눈으로 뒤덮인 산을 오르고, 그다지 크다고 말할 수 없는 문파의 영역으로 들어서자 일단의 무인들이 먼저 그들을 마중나왔다.
“그렇군. 들어와라.”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의 그들 앞으로 나서는 나예린. 허나 마중 나온 무인들은 그녀를 보고도 그리 달가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거야? 사형제쯤 될 것 같은데 전혀 반가워하지 않잖아?”
그러고는 홱 하니 몸을 돌려 문파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모습에 설영이 당황하여 천화에게 물었다. 이건 대체 무슨 반응일까? 먼 중원에 나갔던 사형제가 오랜만에 돌아왔다면 반가워해야 정상이 아닐까? 설혹 사이가 안 좋았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반응이 나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세주연 역시 마찬가지. 허나 천화는 당장 그것을 설명해주는 대신, 일단 사절단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와, 겉에서 보기랑은 딴 판인데?”
설산의 찬바람을 막기 위함인지 설산파의 담은 제법 높았다.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높은 담에 가려져 있던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에 설영은 또 한 번 놀랐다. 설산 중턱에 덩그러니 홀로 위치한 설산파이기에 허름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실상 내부는 꽤나 화려했다. 전각도 높이 세워져 있었고, 치장도 잘 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고급 자재를 이용해 지은 것 같았고, 설산파의 무인들이 입고 다니는 무복 또한 결코 질이 낮지 않았다. 이 정도면 중원에서도 꽤 부유한 문파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정파 연합에서 나오셨다고요? 전서구를 통해 미리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는 설산파의 장문인인 포태주라고 합니다. 어느 분께서 사절단을 이끄시는지…….”
그렇게 살짝 놀란 눈으로 모두가 설산파를 구경하는 사이, 장문인이라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좀 전의 차가웠던 제자들의 모습과 달리 푸근한 인상으로 포권을 취하며 정중히 사절단을 이끄는 이를 찾았다.
“제가 이번 사절단을 인솔하고 있습니다. 천화라고 합니다.”
“혹, 별호가…….”
그에 천화가 나서자 표정이 묘해졌다. 딱히 복색을 통해 사문을 유추할 수 없기 때문인지, 조심스레 별호를 물어 그를 파악하려 들었다.
“진룡무쌍이십니다. 금번 비무대회에서…….”
“아, 진룡무쌍. 그러셨군요.”
나예린이 먼저 나서 천화의 별호를 이야기했지만 포태주는 안색을 굳히며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무리 배분의 차이가 난다 한들 공식적인 자리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일상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나예린 또한 꾹 입술을 깨물며 입을 다물었고.
“흐음. 그럼 혹시 다른 분들은…….”
하지만 그 또한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무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인 고수이기는 해도 배경이 없기 때문인지 포태주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다른 일행들을 훑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에 나예린이 마지못해 그나마 이름난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소개했다.
“아! 언가에 밝은 별이 떠올랐다더니 소협을 말하는 것이었군요. 일견하기에도 태산 같은 기백이 느껴집니다.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리고 언중걸을 소개했을 때는 아주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은 약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성향을 알 수 있었다. 강약약강. 소위 대문파라 불리는 곳에 소속된 인물에게는 약하지만 그 외의 군소방파나 개인의 재능 따위로 이름을 높인 인물에게는 강자의 행세를 하는 인물인 것이다.
‘정확히는 돈과 영향력에 꼬리를 흔드는 거지.’
천화 역시 그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설산파가 세외로 분류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위치에 있는 까닭에 중원과의 교류가 적고, 딱히 교역품으로 삼을 만한 특산물 따위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제자들을 중원에 보내 돈을 벌어오게끔 하는 것이다. 아예 계약을 맺고 제자를 파견하는 대신 매월 일정한 금액을 전달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중원에 나가있는 설산파의 제자만 벌써 수십이었다. 대표적인 예이자 가장 강한 무인이 나예린이었고, 식객 노릇을 하거나 검술 선생 노릇을 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자파의 무공이 유출되는 한이 있어도 돈을 매달 부쳐야 한다. 그것이 포태주가 강조하는 바였다.
“남만야수궁주님의 따님이시라고요?”
그렇다보니 세주연의 소개 차례가 되자 표정이 미묘해졌다. 남만야수궁이라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 비교해도 결코 아래라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진 곳이지만, 이곳과는 너무 멀었으니까. 대우를 해주기야 하겠지만 과연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럼 숙소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편하신 만큼 쉬고 이동하시죠!”
한참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포태주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러갔다. 제자들에게 시켜 그들에게 숙소를 마련해주었지만, 뭐라고 한참을 속닥거리는 것이 다른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 이쪽 분들은 이쪽으로…….”
그것이 무슨 수작인지는 곧 드러났다. 나예린에게 소개를 받은 대로, 사절단의 인원들을 두 분류로 구분하여 숙소를 배정한 것이다. 돈과 영향력이 있는 사문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전각이 좁다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그것이 배경에 따른 구분이라는 것은 누구든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분하고 의중을 드러낸다는 것이 놀라울 만큼 극명한 분류법에 일부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우를 받는 이들은 오히려 그것에 어깨를 으쓱이는 중이었다. 사문의 힘 때문에 대우를 받는 것에 불과했지만, 저 때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힘이고 권력인양 행동하기 마련이니까.
“천화. 이건 좀…….”
“알아. 하지만 나예린이 부탁했잖아? 그러니 이번만 참아.”
그렇게 따지면 천화와 설영도 저급한 숙소를 배정 받는 것이 옳았지만, 사절단장이자 인룡단장의 직을 맡고 있기 때문인지 특별히 좋은 숙소가 주어졌다. 설영은 그런 분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천화가 그녀를 제지했다. 나예린의 특별한 당부가 있었으니까. 그들이라도 다른 숙소로 옮기면서 압박을 주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래봤자 포태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써야지.’
때문에 천화는 이것을 넘어가주는 대신 다른 것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천화 님. 잠시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예. 오랜만에 사문에 온 걸 텐데, 그러세요.”
그렇게 숙소의 분류가 끝났지만 나예린의 숙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좋은 숙소와 허름한 숙소. 그 두 곳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녀의 사문이기도 하기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보다 못한 숙소에 머물겠지.’
하지만 천화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어디에 머물지를. 그리고 그곳의 환경은 군소방파의 후기지수들이 묵는 곳보다도 열악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녀의 청을 받아주었고, 모두가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예린은 잠시 밖으로 나섰다.
“그럼 나도 슬슬 나가 볼…….”
“천화! 이제 이야기해줘.”
“응? 뭘?”
“여기 사람들이 설산빙화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한 거나 여기 분위기가 이상한 거.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공자님, 저도 궁금해요!”
그녀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천화도 모종의 작업을 위해 이동하려는 찰나, 설영이 그를 붙잡았다. 아까 약속했던 설산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란 것이다.
“흐음. 짧게, 길게?”
“짧게!”
슬쩍 주변을 돌아본 천화는 듣는 귀가 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간략하게 압축하여 설산파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들이 제자들을 중원에 파견하여 돈을 벌어들이고, 그것을 이용해 부유한 환경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가만, 그럼 더 잘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덕에 자기들이 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먹고 잘사는 거잖아?”
“원래대로라면 그렇지.”
“그럼……?”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거든.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훨씬 더 부유하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구파일방조차 저 정도 나이 대에 절정 수준에 오른 후기지수를 고작 서넛 정도밖에 키워내지 못했어. 그런데 그보다 무학이든 역사든 한참이나 떨어지는 설산파에서 최고를 다툴 만한 여고수가 나왔지. 그게 무슨 뜻이겠어?”
“어……. 재능이 뛰어나다?”
“저요! 제가 알 것 같아요! 영약을 먹은 거죠? 아빠도 어릴 때 영약을 먹고 엄청 세졌다고 했어요.”
‘역시 그 미친 괴력과 내공은 영약빨이었구만.’
답은 세주연에게서 나왔다. 영약. 그것도 어린 소녀를 절정 고수로 탈바꿈시킬 만큼 엄청난 영약을 먹어치운 것이다. 물론 그 영약을 흡수해 낼만큼의 체질과 재능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나예린이 해낸 것이다.
“영약? 설산파 비전의 영약 같은 걸 먹었으니까 당연하게 부려먹는다는 거야?”
“비슷해. 그걸 팔아치웠으면 훨씬 잘 살았을 텐데! 라는 거지. 애초에 설산파가 가지고 있던 영약도 아니었거든. 그녀의 아버지가 구하기는 했지만.”
“그럼 상관없는 거 아니야? 아무리 설산파 소속이라지만, 개인이 구한 건데…….”
“뭐, 사람 욕심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아무튼 그 탓에 전혀 고마워하지도 않는 거지. 오히려 더 많이 벌어오지 못했다고 불만을 품고 있을걸?”
“와……. 나 같으면 사문이고 뭐고 박차고 나가겠다. 그럼 대체 왜 설산빙화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사문에 돈을 보내는 거야? 이미 사문의 명예야 높여줬고, 다른 사람들도 돈을 벌고 있다며. 그냥 모르는 척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거 아니야? 딱히 고수가 있어서 해코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설영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들이 사절단을 평가했듯, 그녀 역시 설산파의 무인들을 가늠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 절정 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제자들이 벌어서 보내주는 돈으로 안주하며 사는 까닭인지, 치열하게 무공을 익히는 이가 없는 탓이었다.
“뭐, 그렇지. 오히려 반대라고 해야 하나? 다른 설산파의 제자들이 딴 생각을 품거나 숨어버리지 못하는 게 다 나예린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러면 대체 왜……!”
“사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이 경우는 인질이라고 해야겠군.”
“인질?”
“동생이 이곳에 있어. 병을 앓고 있어서 데리고 나갈 수도 없지. 호전까지는 아니어도,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설산의 한기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천화는 뒷말을 삼키었다. 아직 진맥 한번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무리 천화라 해도 의심을 받을 일이었다. 또 당장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 그러면 은룡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음, 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닌데, 아마 무리겠지. 독 같은 것에 당한 게 아니라 체질이니까.”
역근경이나 세수경을 익힐 수 있다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천화가 알기로 나예린의 동생은 그녀처럼 제대로 무공을 익힐 만한 몸이 아니었다. 자질도 부족했고. 하물며 난해하기 짝이 없는 역근경이나 세수경을 익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천화가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올라 강제로 체질을 바꿔주면 모르겠지만, 지금 앓고 있는 병이 천화가 알고 있는 그것이 맞다면 그조차 어려울 수 있었다.
“그런…….”
“너무 불쌍해요!”
“어쨌든 함부로 아는 척을 하거나 나설 생각은 말아. 아, 그리고 나는 잠깐만 나갔다올게.”
“어딜 또…….”
“금방 올 테니까 걱정 마. 어딜 가는 게 아니라 잠시 장문인을 만나고 올 거거든.”
설명을 마친 천화는 그들에게 함부로 아는 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어차피 그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나예린 역시 몰래 병을 낫게 만들 수 있을 만한 영약을 수소문하고 있었지만, 설령 그것을 가졌다 해도 쉽지 않을 터였다. 영약을 제대로 흡수하기도 전에 혈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르니까. 영약을 가졌더라도 치료를 위해서는 절정 고수보다 윗줄에 놓인 고수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설영과 세주연도 침묵했고, 천화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장문인을 만나기 위해서. 그는 사문이 없는 자신을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걸 보면 어떨까? 천화는 소지품창을 열어 전낭 가득 담겨진 금자와 전표들을 세어보며 장문인의 처소로 이동했다. 그 같은 자에게 거금을 내어놓는 것은 조금 아까웠지만, 이곳에서 챙겨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장문인과의 독대를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