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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이무기와 용 (1) (405/481)

<161화> 이무기와 용 (1)2021.11.14.

16586684206729.jpg“예술…… 말인가?”

천화의 말에 그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예술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였기에 놀랍고도 설레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되물었다.

16586684206729.jpg“예술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겐가?”

1658668420674.jpg“글쎄요.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도 좋고 음에 대해 논해도 좋지요. 이럴 게 아니라 일단 한 곡조 뽑아 보겠습니다.”

씨익 미끼를 단단히 물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천화가 악마금을 꺼내들었다. 악마칠음을 익히며 그간 갈고 닦은 연주 솜씨를 드러낼 시간이었다. 음공을 발휘할 생각은 없다. 그와 같은 고수에게 어설픈 수작질을 부렸다가는 박살이 나고 말 테니까. 디리링~. 대신 악마금에 내공을 불어넣어 소리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데 사용했다. 이 또한 엄밀히 따지면 음공의 일종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기술은 아니니 그보다는 기예쯤으로 보아야겠지. 대가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기가 인정할 만큼 수준급의 연주 실력을 지닌 천화였기에, 북해빙궁주의 표정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16586684206729.jpg“훌륭하군. 북해에서 이런 연주를 듣게 될 줄이야. 자네, 그림이나 조각에 대해서도 좀 안다고 했나?”

좀 전까지의 무료함이나 시큰둥함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적극적으로 천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의 담소는 그로부터 약 한 시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나예린과 언중걸은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일인 것을 어쩌겠나. 그 정도 참을성도 없다면 이 짓을 때려치우시든가.

16586684206729.jpg“자네의 식견이 실로 놀랍군. 참으로 대단해!”

재미있게도 천화가 북해빙궁주와 나눈 대화에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중원에서 높게 쳐주는 시나 서예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에서 알고 있던 미술에 대한 곁다리 지식들이었다. 아무래도 중원에서는 조각 따위보다는 그림을 더 높게 치고, 그마저도 제한적인 취향에 국한되기에 북해빙궁주가 관심 있는 조각이나 그림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천화도 그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잠시 공부해둔 것이 있었기에 대화를 나눌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1658668420674.jpg“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제가 따로, 개.인.적.으.로. 선물을 좀 준비해봤습니다만.”

16586684206729.jpg“선물?”

꽤나 분위기가 훈훈하게 달아오르자 천화가 슬쩍 본론을 꺼냈다. 일단은 선물 공세부터. 그러나 막상 선물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북해빙궁주의 표정이 굳어갔다. 정파 연합처럼 쓸데없는 물건을 꺼내놓을 것 같았으니까.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모습이지만, 그가 우려하는 부분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천화였다.

1658668420674.jpg“공간이 좀 좁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군요.”

16586684206729.jpg“……?”

방 안을 슥 둘러본 천화는 구석으로 이동했다. 궁주의 방인 만큼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었지만, 수레 수십 대 분량의 물품을 늘어놓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기도 했으니까. 어떻게든 쌓아놓으면 수하들을 시켜 어떻게든 가져가겠지. 한쪽부터 차곡차곡 물건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16586684206729.jpg“허어?”

1658668420674.jpg“좀 많이 나올 거니까 놀라지 마세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건들이 나와 쌓이는 광경은 북해빙궁주라 할지라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대충 술법 같은 것이라고 둘러대니 이해하는 눈치였지만, 사실 이런 술법 같은 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법칙을 비틀어 이적을 일으키는 술법이야 제법 있지만, 이처럼 아공간을 만드는 건 천화로서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술법이라는 것이 본디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괴이한 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렇게 천화가 꺼내놓은 물품들은 크게 세 가지 종류였다. 첫 번째는 미술품들. 북해빙궁주가 좋아할 만한 크고 작은 섬세한 조각상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림도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대체로 독학 중인 그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두 번째는 식재료들. 대체로 고기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소지품창에 일단 들어가면 신선도가 유지되기에 신선한 고기들이 수없이 쌓였다. 북해빙궁의 모든 이들이 며칠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양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환경의 특성상 목축 따위를 하기 어려워서 고기가 귀한 북해인들에게는 눈이 돌아갈 만한 것들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땔감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북해인들이라고 추위를 전혀 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좀 더 내성이 있을 뿐이다. 북해의 혹한은 한서불침에 이르더라도 서늘함이 느껴질 만큼 매서운 것이었기에, 무공이 약한 이들이 견디기 어려운 추위가 자주 찾아왔고 북해빙궁주는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으니까.

16586684206729.jpg“정말…… 이걸 모두 선물하겠다는 겐가?”

1658668420674.jpg“예. 당장 가져올 수 있는 분량에 한계가 있어서 이 정도뿐이지만, 성의를 봐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양이 상당했기에 북해빙궁주도 제법 놀라는 눈치였다. 중원에서도 상당한 값이 나갈 만한 양이었고, 질 또한 나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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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부족하여 질보다는 양으로 맞춘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저급한 수준도 아니었다. 만금상단의 저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었지만, 그것까지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여겼다. 조금 더 친해진 후에, 그들이 이 물자들에 대해 보다 강한 욕구를 느낄 때쯤이 되면 만금상단의 이야기를 꺼내도 좋겠지.

1658668420674.jpg‘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될 테니까.’

북해빙궁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그렇게 하자고 매달려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당장 그들이 교역을 원해도 이 멀고 험난한 곳까지 오려고 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 않던가? 더구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물건들은 강한 냉기가 있는 환경이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빠르게 옮기지 못한다면 그 가치가 폭락하거나 사라져버리기도 했고. 초원의 길을 열고 그에 대한 대비까지 세워둔 천화가 아니고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거래였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일단 즐길 시간이다. 북해빙궁주와 이야기를 마친 천화는 일단 나예린, 언중걸과 함께 사절단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고, 곧 잔치가 벌어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천화가 가져온 고기를 아낌없이 풀어, 간만에 궁도들을 배풀리 먹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1658668420674.jpg‘큰 결심하셨네. 식량 사정도 썩 좋지 못할 텐데 말이야.’

그 화끈한 결정에 궁도들이 환호했고, 천화 역시 새삼 그의 화통함을 인정했다. 북해빙궁이 소림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중원이 싫어서나 먼 거리가 귀찮아서라기보다, 당장 그들의 상황이 좋지 못해서였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식량 사정이 부쩍 안 좋아서 골머리를 썩는 중인 것이다.

1658668420674.jpg‘잘만 긁어보면 될 것 같은데.’

천화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남만에서 그러했듯 그런 중대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준다면 북해빙궁과의 우호도 역시 최대치를 찍을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세외사궁 중 둘만 완벽한 자신의 편이 되더라도 다른 배경 따위는 필요가 없어질 터였다. 더구나 천화에게는 도왕이라는 후견인까지 있으니까. 거기에 몇 가지만 더하면, 당장 정사대전이 발발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만한 준비가 끝난다.

1658668420674.jpg“궁주님께서 옷을 몇 벌씩 더 지급해주신다고 하니, 단단히 껴입으시고…….”

잔치가 준비되는 동안, 천화도 사절단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들이 준비한 두꺼운 옷으로는 북해의 한파를 견디기 어려웠기에 북해빙궁주가 그들에게 내려준 털옷을 단단히 여미도록 하고, 북해의 문화에 맞춘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정이 많지만 소심한 까닭에, 그것을 거절당하면 크게 실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후, 고기 굽는 냄새가 빙궁에 진동을 했고 사절단 역시 초대되어 함께 즐기기 시작했다. 천화의 자리는 당연히 빙궁주의 옆. 나예린이나 언중걸은 그 곁조차 차지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설영과 세주연은 그 자리에 함께했다.

16586684206729.jpg“오호, 야수궁주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 벌써 뵌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군. 네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 말이야. 이 녀석도 오랜만이군.”

16586684222402.jpg“크로로롱.”

이전에 야수궁주와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는지 꽤 친근하게 세주연을 대해준 까닭에, 자리의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1658668420674.jpg“궁주님. 아마 밖에 야수궁도들이 떨고 있을 텐데, 혹 괜찮으시다면 그들도 안에서 쉬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16586684206729.jpg“당연한 말일세. 여봐라! 어서 문을 열고 야수궁의 형제들을 안으로 들여라!!”

덕분에 천화도 밖에서 눈사람이 되고 있을 야수궁도들을 배려하기 편했다. 북해빙궁주는 당장 문을 열어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고, 천화가 전해준 털옷을 잔뜩 껴입긴 했지만 얼굴이 붉게 상기된 그들은 고개를 숙여 천화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이어진 잔치 동안 천화와 북해빙궁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이 고팠던 것처럼 북해빙궁주는 수다쟁이처럼 말을 늘어놓았고, 오히려 천화가 들어주는 입장에 가까웠지만 그만큼 그와 가까워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북해빙궁주 단철우의 친밀도가 상승했습니다.] 표현이 아니라 진짜 눈에 보였다. 그 증거로 단철우는 북해빙궁주라는 직위 대신 이름을 부르도록 허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많은 북해의 특성상, 다른 이들에게 이름을 가르쳐준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유대를 쌓았다는 증거였다.

16586684206729.jpg“흐음. 이 작은 녀석이 신수란 말이지? 저 검은 소도 확실히 범상치 않아 보이는군.”

그중에서도 단철우가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이 보유한 영물들이었다. 롱롱이는 이미 야수궁주와 함께 본 적이 있었고, 새로 눈에 띈 흑우와 은룡이에게 큰 관심을 보인 것이다. 아마 북해에 드리워진 근심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남의 우환을 먼저 들춰낸다는 것이 조심스러웠기에 천화도 딱히 말을 꺼내지 않고 있을 때, 놀랍게도 단철우가 먼저 그들에게 제안했다.

16586684206729.jpg“사실 지금 북해는 큰 곤란에 처해 있네. 내가 해결을 해야 할 일이지만 아직까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지. 헌데 자네들을 보니 혹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위험하겠지만 나를, 아니 북해를 도와줄 수 있겠나?”

1658668420674.jpg‘응? 이거 설마?’

그 말에 천화도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친밀도를 올려두었다지만 그는 북해의 지배자이자 빙궁의 궁주였다. 북해의 중대사를 외인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천화가 원하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북해에 흩어져있는 이들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연계 임무들을 마쳐야만 했다. 헌데, 지금 단철우가 내뱉는 말은 그 모든 것을 생략하는 것이었다.

1658668420674.jpg“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니 뭐든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16586684206729.jpg“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허나 실패해도 좋으니 위험할 것 같으면 무조건 달아나야 하네. 그것을 약속한다면 말해주지.”

1658668420674.jpg“예. 약속합니다.”

그가 이 정도로 이야기를 할 정도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천화도 확신을 가졌다. 그의 무위라면 천화와 설영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아차렸을 테고, 무엇보다 롱롱이와 흑우, 은룡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런 말을 한다면 절정 고수가 다수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16586684206729.jpg“우리 북해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1658668420674.jpg“예. 알고 있습니다. 식량의 대부분이 거기에서 나오죠?”

16586684206729.jpg“제대로 알고 있군. 물고기가 아주 풍부하기에 식량의 상당 부분을 그곳에 의존하고 있었지. 헌데, 거기에 문제가 생겼네. 그곳에 자리잡은 영물이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아먹는 까닭에 어획할 수 있는 양이 많이 준 것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놈이 다른 이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단 말이지. 나 역시 놈을 해치워보려고도 했지만, 놈은 빙공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어. 덩치가 커다란 까닭에 육지로 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고. 그 탓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많은 궁도들이 오히려 놈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네.”

이 척박한 땅에서 식량 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단철우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희생당한 궁도들도 안타까웠지만, 계속해서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조만간 창고에 쌓아둔 식량마저 동이 날 테니까. 천화가 가져온 고기들로 당분간은 어떻게든 버틴다지만, 인원이 많으니 그리 오래 버티기 힘들 터였다. 때문에 천화는 슬쩍 만금상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돈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더 큰 것이 있으니까.

16586684206729.jpg“영물과 신수를 다루는 자네들이기에 하는 부탁일세. 놈을 조사하고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공생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게.”

  [호수의 영물 조사 (1)][특수 연계 임무] 북해빙궁의 궁주 단철우가 북해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호수의 영물을 조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호수의 영물을 조사하고, 처리 방향을 결정하자 - 성공 조건 : 호수의 영물 확인 - 성공 보상 : 보통의 경험치

1658668420674.jpg‘와, 이걸 진짜 주네. 세주연, 네가 복덩이였구나!’

천화는 단철우의 이러한 제안을 내놓은 이유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남만야수궁주의 딸인 세주연과 그의 영물인 롱롱이. 이 둘이라면 영물인 것이 분명한 놈을 어떻게든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야수궁도들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고, 세주연이 그중 특출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까. 게다가 영물끼리는 종이 다르더라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믿음이라기보다는 막연한 기대였기에 다시 한 번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만약 세주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가는 남만야수왕을 볼 낯이 없기 때문이다.

1658668420674.jpg“맡겨주십시오. 반드시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허나 그런 걱정과 반대로 천화는 자신이 넘쳤다. 다른 고인물의 이야기를 들어, 호수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분명 어려운 상대이긴 했지만,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만 해결해낸다면 ‘그것’도 얻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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