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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만년빙정 (1) (410/481)

<166화> 만년빙정 (1)2021.11.25.

16586684501802.jpg“조심하게!”

먼저 급발진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예린이었다. 그리 경솔한 성격은 아니었을 텐데, 동생의 치료가 걸려있기 때문인지 서둘러 보법까지 펼치며 만년빙정의 가까이로 달려간 것이다.

16586684501808.jpg“설빙화…….”

정확히는 만년빙화의 근처에 피어있는 한 송이의 작은 꽃을 향해서였다. 설빙화라 불리는, 음기를 가득 머금어 얼음조각 같은 모습으로 피어난다는 진귀하기 짝이 없는 영초다. 북해 중에서도 특히 음기가 강한 지역에서 피어나며 북해의 한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열매를 맺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 꽃잎을 입안에 넣으면 강한 음기가 몸 안으로 퍼져서 혈맥이 얼어붙고, 열매를 먹으면 몸 전체가 얼어버리는 것이 특징일 만큼 그것이 품은 냉기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먹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충분한 체질이나 내공심법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기연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인지 나예린은 슬쩍 천화와 설영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의 관심사는 그것에 있지 않았다.

16586684501811.jpg‘흠, 저거 무지하게 맛없는데.’

설영은 그녀의 사정을 알기 때문인지, 다른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인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천화 역시 그다지 욕심이 나지 않았다. 무신지로에서 한번 먹어 보았으니까. 더럽게 맛이 없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내공의 증진이라는 기연을 얻을 수 있는 물건이라지만, 비슷한 작용을 하는 물건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설빙화가 혈맥에 음기를 뻗어 보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당장 이 안에 있는 어떤 영초를 먹어치우든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을 터였다. 설혹 그런다 한들 다음 경지에 올라서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16586684501808.jpg“혹시, 채집 도구를…….”

허나 나예린은 그것을 쉬이 캐내지 못했다. 이 같은 귀한 영초를 마구잡이로 땅을 파헤쳐 캐냈다가는 자칫 손상되어 영험한 효능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예린은 만년빙정의 한기를 견디며 힘겹게 입을 열고 뒤를 돌아보았다. 채집 도구를 줄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지만, 그 순간의 방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터업!

16586684501811.jpg“야!!!”

화들짝 놀란 것은 나예린만이 아니었다. 천화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16586684501811.jpg“그걸 네가 처먹으면 어떻게 해!!”

만년빙정에 이끌려 다가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흑우가 슥 주둥이를 내밀어 설빙화를 먹어치운 것이다.

16586684501808.jpg“설빙화가…… 설빙화가……?”

그러고는 저도 뜨끔했는지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설빙화는 놈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린 상태였다.

16586684501802.jpg“이런……! 자네 영물이 위험하네!”

그 모습에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던 단철우도 깜짝 놀랐다. 흑우의 위험을 경고하며 녀석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눈이 돌아버린 나예린의 공격? 아니다. 동생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치유제라 알고 있던 설빙화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리자 나예린은 이미 반쯤 넋이 나가버린 상태였다. 검을 들어올릴 기운도 없는 것은 물론, 순간적으로 멍해지면서 몸을 보호하던 내공까지 풀어져 빠르게 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16586684501833.jpg“무우우? 베에에에~.”

그런 가운데 정작 설빙화를 먹어치운 흑우의 모습은 얄밉기 짝이 없었다. 아주 찬 얼음을 삼킨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는지 인상을 구기기는 했지만, 곧 회복하고 맛이 없다는 듯 혀를 쏙 내밀어 보이는 것이다.

16586684501811.jpg‘공청석유도 처먹은 놈이니…….’

설빙화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한기를 지닌 공청석유까지 먹어치운 놈이다 보니, 단철우의 경고처럼 고작 그 정도 한기로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듯싶었다.

16586684501802.jpg“이런!”

그렇게 되자 흑우에게 내공을 불어넣기 위해 뛰어들었던 단철우의 표정도 묘해졌다. 흑우가 궁금해졌지만, 상태가 심각하게 변하고 있는 나예린을 구하는 게 먼저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그녀를 꺼내 짐짝처럼 집어 던졌다. 만년빙정의 한기가 옅어지는 지역까지 날려버린 뒤, 그녀의 등에 내기를 불어넣었다. 설산파의 내공심법을 익힌 그녀였기에, 빠르게 내공을 인도한다면 후유증이 남지 않는 선에서 치유가 가능할 터였다.

16586684501811.jpg“젠장, 내가 못 살아.”

덕분에 천화만 중간에서 난감해졌다. 흑우가 설빙화를 먹어치워버린 덕분에 나예린과의 관계도 엉망이 될 터였고, 무엇보다 자기 몫은 선택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흑우가 사고를 쳤으니 주인인 자신이 수습하는 수밖에.

16586684501811.jpg“너, 두고 보자. 흑우 역소환!”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입맛만 버리고 뻘쭘하게 물러서던 흑우가 천화의 뜻에 따라 아공간으로 역소환되었다. 당장 달려가 쥐어패고 싶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다른 것도 처먹을 수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6586684501811.jpg“어? 넌 또 무슨……?”

골치가 아픈 듯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천화의 눈에 또 한 가지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다름 아닌 설영이었다. 잠시 혼란한 틈을 타 그녀가 만년빙정 쪽으로 다가간 것이다. 처음에는 천화도 나예린처럼 설영이 그 주변에 있는 무언가를 살피고 챙기려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만년빙정에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도 강한 한기를 머금은 특수한 무언가가 만들어지니까. 물론 인접해 놓인 시간이 길수록 더 깊숙이 한기를 머금게 되겠지만, 몇 년쯤만 투자하더라도 명품급 장비가 유일급 이상으로 변화할 수 있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단철우와 북해빙궁 역시 그 점을 이용해 영초를 기르고, 특수한 무구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16586684506118.jpg“천화. 이제 혈마검은 필요없다고 했지?”

16586684501811.jpg“어? 그야 그렇지만…….”

단숨에 손을 내밀면 만년빙정에 닿을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간 설영은 마지막으로 천화를 돌아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설영의 말처럼 이제 무명검을 사용하기 시작한 천화에게는 혈마검이 그다지 필요없다. 주변의 생명력을 감지해낼 수 있으니 레이더처럼 써먹을 수 있겠지만, 천화만변무상심법을 익히고 절정의 수준까지 내공을 끌어올리며 더 이상 혈마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내공을 충분할 만큼 끌어모을 수 있었으니까. 천화가 뭔가 이상한 느낌에 머뭇거리면서도 대답하자, 설영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척이나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16586684506127.jpg[이, 이년이!? 주인님! 말려주십시오!!]

  그때, 혈마검에서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이미 혈마의 후예로써 인정을 받은 설영이었지만, 그녀를 공격하듯 기운을 격하게 뿜어내면서 천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6586684506118.jpg“미안. 이게 맞는 것 같아.”

마지막 순간, 설영은 혈마검과 대화를 했다.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마음이 혈마검과의 대화를 했다. 심령의 연결을 막고 있었을 뿐, 이미 혈마신공을 8성까지 끌어올렸기에 대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휘익-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16586684506127.jpg[크아아아아아아악!!!!!!]

  치이이익!!!!!! 천화가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설영이 그대로 혈마검을 만년빙정에 가져간 것이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절정 고수가 아니고서는 버티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한기를 내뿜던 만년빙정이었다. 그런 것에 직접 닿자 혈마검과 설영의 손끝이 함께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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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6684506127.jpg[네년이 감히! 감히!!!! 크아악!!!!!]

  그 순간 혈마검도 궁여지책을 냈다. 강제로 혈마기를 끌어올려, 만년빙정의 한기에 저항하는 동시에 설영의 몸을 빼앗으려 든 것이다. 강제 혈마화. 그것에 성공한다면 이 빌어먹을 얼음덩어리에서 탈출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얼어붙게 만들어 봉인하려는 설영의 몸까지 탈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지. 천화가 방해할 것이 예상됐지만, 하다못해 본체인 혈마검을 집어던지고 만년빙정에 몸을 던지게 해서라도 대가를 치르게 해줄 참이었다.

16586684506118.jpg“크윽!”

잠시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만년빙정의 기운에 저항할 힘이 필요했기에 혈마검이 우세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혈정의 기운을 몽땅 쏟아붓는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586684501811.jpg‘이런……!’

한순간 멍해졌던 천화였지만 곧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설마하니 혈마의 후예인 설영이 혈마검을 봉인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허나 벌어진 일이다. 말릴 것인가, 말 것인가. 아직 머릿속으로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혹여 혈마검이 몸의 지배권 싸움에서 승리할 경우, 자해를 하려 들 수도 있었으니까. 복잡한 마음으로 일단 둘을 떼어놓으려는 그때, 하나의 알림창이 시야를 가렸다. [설영의 ‘불굴’이 혈마검의 정신지배에 저항합니다.] 투웅! 언젠가 천화가 정신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설영에게 챙겨주었던 심공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와 함께 한순간 혈마검과 설영의 연결이 끊어졌고, 설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기를 분출해 혈마검을 튕겨냈다. 자신에게서 떨어뜨렸다.

16586684506118.jpg“흐윽!”

16586684506127.jpg[키야아아아아아악!!!!!]

  설영과 혈마검이 동시에 비명을 지른 것도 그때였다. 혈마검이 마지막으로 혈정의 기운을 뽑아내 저항해 보지만 이곳은 북해였고, 상대는 만년빙정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한기가 녀석을 감쌌다. 설령 같은 힘을 지녔다 할지라도 그 힘이 마르지 않는 만년빙정과 달리 혈마검은 혈정에 모인 기운만을 사용해야 했기에 버틸 수 없었을 터였다. 그대로, 혈마검이 만년빙정에 달라붙은 채 얼어붙었다.

16586684501811.jpg“제길.”

이미 손 쓸 수 없다. 지금 혈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가는 자신도 함께 얼음조각이 되어버릴 터였기에, 천화는 설영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잠시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만년빙정에 닿았기에 극심한 한기가 몸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16586684501811.jpg“정신 차리고 운기해!”

최대한 빠르게 그녀를 데리고 범위 바깥으로 벗어난 천화는 설영을 강제로 앉게 만든 뒤 장심을 등에 가져다대었다. 내공을 일으켜 그녀의 몸 안으로 흘려보냈다. 이대로면 몸속이 얼어붙든, 한기가 스민 팔이 동상에 걸려 썩어문드러지든 할 테니까. 상의도 없이 그런 짓을 벌인 것은 밉지만, 이대로 설영이 망가지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운기를 통해 한기를 몰아내게 만드는데 집중했다. 푸쉬쉬쉭- 곧 설영의 몸에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다행히도 천화가 익힌 심법이 이렇다하게 모난 성격이 아닌 까닭에 혈마심법과 어울리는 것도, 그녀의 혈맥을 따라 흐르며 열기를 뿜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쪽에서는 단철우가 조금 다른 방법으로 나예린의 몸에서 한기를 놀아내고 있었다. 극음의 성격을 지닌 내공을 보유한 그이다 보니 천화처럼 열기를 발산하는 방법은 무리였다. 천하십대고수에 버금가는 무공을 지닌 그였지만, 내공의 성격을 역전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이 좋지 못했으니까. 그런 약화된 기운으로 만년빙정의 한기를 몰아내려면 내공을 얼마나 쏟아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흡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마침 나예린이 지닌 내공의 성격 또한 음한계열이었기에 일부는 자신이 흡수해버리고, 일부는 그녀의 내공 속에 녹아들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많지는 않겠지만 내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으니 시간을 걸리겠지만, 나름대로 기연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6586684506118.jpg“궁주님께 사죄드립니다. 허락도 없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천화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추스른 설영은 비틀대는 몸을 일으켜 단철우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북해빙궁의 재앙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어쨌든 둘도 없는 보물이기도 한 만년빙정에 자칫 해가 될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허락도 없이.

16586684501802.jpg“요검, 아니 마검이라 할 만한 놈을 들고 다닌다 했더니, 그럴 작정이었나? 아닐세, 잘했네. 저런 요사스러운 놈은 영영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낫지.”

전공인 음기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인지, 단철우는 나예린의 처치를 이어가면서도 설영의 말을 받았다. 자신의 허락도 없이 무리한 짓을 하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에 문제가 생길 만년빙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설영이 지닌 혈마검에 서린 요사스런 기운을 간파하고 있던 그였기에, 그 정도야 얼마든지 협조해줄 수 있었다. 저런 검이 세상에 나간다면, 주인을 잘못 만나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알기 때문이다. 그만한 힘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되레 설영의 결단을 응원하고 칭찬했다.

16586684501811.jpg“무슨 생각이야? 뜬금없이…… 크흠, 검을 봉인시키다니.”

대충 단철우도 눈치를 챈 것 같지만, 나예린이라는 귀가 있었기에 천화는 차마 혈마검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설영에게 핀잔을 주었다. 혈마검을 봉인시켜버린 걸 탓하는 건 아니다. 혈마검을 쥐지 않으면 설영의 힘이 크게 약화될 테지만, 혈마신공을 버텨낼 검쯤이야 구하려면 충분히 구할 수 있으니까. 다만, 자신과 상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자 굳은 표정의 설영이 고개를 푹 숙이며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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