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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만년빙정 (2) (411/481)

<167화> 만년빙정 (2)202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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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668502683.jpg“……미안. 오래 전부터, 처음 강호에 나오기로 결심했던 때부터 생각해오던 일이야. 오랫동안 이어진 이 굴레를 벗어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어.”

설영의 대답에 천화도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호에 나설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라고? 그럼 애초부터 혈마검을 버릴 생각으로 나선 것이란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비화에 천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무신지로에서는 설영이 초반에 죽임을 당해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었으니까. 또한 나중에 설영의 사형제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16586685026835.jpg‘그놈들의 말이 거짓이었다 이거지…….’

그로 인해 무신지로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사뭇 다른 그림이 그려질지도 모르겠다.

16586685026835.jpg“가만, 그럼 혹시 무당파에서도?”

1658668502683.jpg“맞아. 가능하다면 그들에게 맡기려고도 했어. 도사들이니까 부적 같은 걸로 어떻게 될까 싶기도 했고, 구파 중 하나이니 혈마검을 지킬 만큼 강할까도 싶었지…….”

뒷말을 쓰게 삼키는 것이,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이 남았을지 알 것 같았다. 그들로는 무리다. 여전히 구파일방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무당파였지만, 무당신룡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곳이었지만 천화가 느끼기에도 그들은 세속에 너무 찌들어있었다. 욕심은 혈마검의 좋은 먹잇감이 되니, 언제고 도사 하나가 낚여 혈마검에 휘둘릴지 몰랐다. 혹은 혈마검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상대로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고. 그렇기에 이곳 북해에, 만년빙정을 통해 혈마검을 봉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년빙정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다못해 북해 깊숙한 곳 어딘가에 봉인할 생각을 했던 게 아닐까? 천화는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심어를 보내지 못하는 혈마검을 돌아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혈마검이 있다면 언제든 혈마화를 통해 충분한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마검의 힘이다.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혀야 할 테고, 자칫 혈마검의 힘이 너무 강대해진다면 언제고 정신을 잡아먹힐 수 있는 위험 또한 안고 가야 한다. 더불어 혈마화를 하다가, 혹은 혈마검의 정체를 들켜서 언제고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기에 매일매일을 노심초사하며 살아야 할 터였다.

16586685026835.jpg“그럼 이제 어쩔 셈이야?”

천화로서도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인정했다. 혈마검은 사라졌어도 그녀가 익힌 혈마신공의 성취가 낮지 않으니, 충분히 고수로 인정받고 대우받을 수 있겠지. 더구나 지난 비무대회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나? 무림 명숙이라 할 수 있는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장문인과 가주들조차도 설영의 혈마검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16586685026835.jpg‘설마 사라져버리려는 건가?’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신분 세탁을 하고 평범한 무림인처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영의 홀가분한 표정을 보면 이대로 무림에 질려 어디론가 떠나버려도, 은거를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어릴 적부터 천형처럼 그녀를 괴롭히던 굴레가 벗겨졌으니 자신이라도 현타가 제대로 올 것 같기는 했다. 그렇기에 만약 설영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천화는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충분히 고생은 많이 했으니까. 천화 역시도 그녀 덕분에 이만큼이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1658668502683.jpg“글쎄?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천화의 물음에 설영이 다시 한 번 배시시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1658668502683.jpg“그런데 말이야. 난 네 호위잖아? 괜찮다면, 계속 시켜줄래?”

16586685026835.jpg“응?”

1658668502683.jpg“호위라고 하기엔 네가 너무 강해지긴 했지만…… 아니, 원래 강했던가? 어쨌든 괜찮다면 너랑 계속 강호행을 하고 싶어.”

16586685026835.jpg“크흠. 그, 그거야 문제 될 게 없지만…….”

놀랍게도 설영은 계속해서 천화와 함께 다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무림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설영의 실력이라면 어디서든 큰돈을 주며 모셔가겠지만, 그저 숙식 제공이 전부인 천화의 호위무사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절정 고수의 수준에 오르고, 무명검까지 든 이상 이제 천화에겐 호위 따위가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천화는 그 말이 기꺼웠다. 한 명의 아군, 한 명의 절정 고수를 영입한 것과는 별개로 쭉 처음부터 함께였던 설영이 사라져버린다면 무척이나 서운하고 허전할 것 같았기에 멋쩍어하며 승낙했다.

16586685035238.jpg“흐윽!”

묘한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그 훈훈함을 깨는 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예린. 동생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을 잃어버린 그녀가 서러운 눈물을 터트린 것이다. 설신빙화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차갑고 냉정한 성격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만 알려진 그녀였지만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절제하고 참아왔던 것뿐이었으니까.

16586685026835.jpg‘끄응. 이거 참…….’

이렇게 되자 천화로서도 참 멋쩍어졌다. 흑우놈의 짓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주인인 자신의 책임이니까. 허나 함부로 다가가 위로를 하기도 어렵다. 자신이 책임지고 동생을 회복시켜 주리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그는 공식적으로 한 번도 그녀의 동생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16586685035248.jpg“소저는 왜 그리 서글피 우는 겐가? 설빙화를 잃었다고는 하나, 이곳에는 그에 준하는 영초들이 많네.”

16586685035238.jpg“흐끅! ……저에게는 동생이 있습니다. 저와 동생은 어릴 적부터 특이한 체질을 지닌 탓에 크게 아팠지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신 아버지께서 목숨을 걸고 영약을 구해 저에게 먹인 덕분에 죽어가던 저는 살아날 수 있었지만, 영약을 구하다 입은 상처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제가 영약을 모두 먹어치운 탓에 동생은 아직까지도 고통을 받으며 앓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 아이를 낫게 해줄 약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 천화를 대신하여 단철우가 그녀를 달래주려 했지만, 이어진 이야기는 무겁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자신과 동생이 모두 어릴 적부터 아팠고, 부모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대신 몸이 상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자신은 살아났지만 동생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기에 자신이 부모 대신 동생을 돌보려 한 것이고. 물론 그것이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아마 부모도 나예린의 상세가 더 위중하다고 여겼기에 먼저 살린 것일 테고, 그 영약을 반으로 쪼개먹었다고 둘 다 살아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허나 나예린은 마음속에 깊은 부채의식이 있었다. 그것을 자신이 먹지 않았다면, 동생이 먹었다면 저토록 고통 받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자신이 아픈 것이라면 좋을 텐데. 병을 앓는 이도 고통스럽지만 지켜보는 이들도 고통스러운 법이기에, 나예린은 그토록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다 설산파에 바치고 있던 것이다.

16586685026835.jpg“흐음, 혹시 제가 동생분을 봐도 괜찮겠습니까?”

16586685035238.jpg“…….”

그렇게 감추었던 속내를 드러내자 차라리 천화의 입장에서는 접근하기가 쉬워졌다. 과연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해법에 대한 가능성은 제시할 수 있을 터였기에 조심스레 나예린에게 제안을 건넸다.

16586685026835.jpg“이래 봬도 의술에 조예가 깊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도왕께도 도움을 드렸지요.”

움찔 천화를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예린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감돌았다. 무슨 개수작인가 싶었지만, 도왕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그를 도울 수 있을 만큼의 의술이라면 혹 동생의 상태를 일부나마 호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가 싹을 틔웠다.

16586685035248.jpg“설빙화가 필요할 정도라면 음기와 관련된 병일 확률이 높겠군. 그렇다면 나도 봐줄 수 있네. 저 친구에게 진맥을 맡긴 뒤, 여의치 않다면 이곳으로 데려오게. 나도 힘 닿는 데까지 돕도록 하지.”

16586685035238.jpg“……감사합니다.”

16586685035248.jpg“감사는 무슨. 자네들이 해준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세.”

그 말에 나예린도 조금은 힘을 되찾았다. 천화는 조금 못 미덥지만 북해빙궁주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의 말처럼 음기와 관련된 질병이나 체질 문제라면 설산파 따위보다 북해빙궁이 훨씬 더 제대로 살필 수 있을 테니, 보다 확실한 차도를 보일 수 있을 터였다. 어쨌든 사문이고 동생을 돌봐주고 있긴 하지만, 사실 설산파가 동생을 제대로 살피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제3자인 천화나 설영의 눈에도 보였다. 당장 그 많은 돈을 매달 보내고 있음에도, 막상 나예린이 돌아왔을 때 설산파의 인원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동생이 치료 받는 건물조차 설산파에서 가장 허름하다 할 수 있는 곳이었고, 간병인이라고 붙은 이 역시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곳을 들고 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때문에라도 나예린이 설산파에 도착할 때마다 동생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겠지.

16586685026835.jpg‘설산파에서 놓아주지 않겠지만…… 방법이 있지.’

만약 동생을 살릴 수 있다면, 고통을 없앨 만큼 호전시킬 수만 있더라도 나예린은 무슨 짓이든 할 터였다. 설혹 제 발로 설산파를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로 인해 무공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하고야 말겠지. 지금까지는 대안이 없기에, 설산파를 떠날 경우 동생이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에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도움이라면 모험을 걸어볼 만했다. 그녀의 눈에 어떤 결의 같은 것이 어렸다.

16586685035248.jpg“잠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이 단모의 얼굴을 봐서 기분들 푸시게. 천화 이 친구는 영물이 대신 골랐고, 두 사람은 아직이었지? 어서 골라보시게.”

16586685039366.jpg“예.”

그 묘한 분위기를 단철우가 능숙하게 조율했다. 천화는 흑우가 대신 먹어치웠으니 꽝이고, 아직 설영과 나예린에게는 한 번씩의 기회가 있음을 알린 것이다.

16586685035238.jpg“저는…… 나중에 골라도 되겠습니까? 만약 동생을 이곳으로 데려온다면, 그때 필요한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에 설영은 혈마검을 대신할 검을 한 자루 골랐고, 나예린은 선택을 보류했다. 나중에 동생을 데려왔을 때, 필요한 영초나 영약 따위가 있다면 그것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동생을 꼭 치료해달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은 것이지만 단철우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진기만으로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영약을 쏟아부어야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임에도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네 사람은 북해빙궁의 보고에서 밖으로 나왔고, 북해의 근심거리가 사라진 것을 축하하고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단철우가 다시 잔치를 열었다. 하지만 나예린은 생각할 것이 많은지 침묵 속에 자리를 지켰다.

16586685026835.jpg“흑우야, 나와.”

그리고 한편에서는 잔뜩 골이 난 천화가 우둑우둑 주먹을 풀며 흑우를 소환했다.

16586685039381.jpg“무우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 흑우. 그러나 그것이 연기라는 것은 뻔한 것이었다. 설빙화라는 영초까지 처먹은 놈이 뭐가 불쌍할 것이 있겠나?

16586685026835.jpg“그래. 내가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대했지. 어디 오늘 한 번 서열 정리를……!”

때문에 천화는 오늘 제대로 놈을 교육시킬 생각이었다. 흑우가 어지간한 절정 고수는 짓뭉개버릴 만큼 강력한 힘과 능력을 지녔다지만, 천화는 자신이 있었다. 평범한 도검은 박히지도 않는다지만 무명검이 있었고, 두꺼운 피부가 충격을 완화한다지만 제대로 아프게 두들겨 팰 만한 경험이 그에게는 있었다. 어차피 흑우 정도의 영물은 몇 대 쥐어팼다고 죽지야 않을 테니, 오히려 마음 놓고 패도 될 터였다. 하지만 그때, 천화의 눈앞에 여러 알림이 나타났다. [영물 ‘흑우’가 20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영물 ‘흑우’의 능력이 진화됩니다.] [영물 ‘흑우’가 새로운 힘을 깨닫습니다.] [영물 ‘흑우’가 품은 빙한의 힘이 그의 몸에 서립니다.] [얼음의 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빙한지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16586685026835.jpg“아이고, 흑우 님. 잘하셨습니다!”

털썩!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깨뜨릴 듯 주먹을 쥐고 달려들던 천화가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입가에 삐죽 솟아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아예 큰절을 올렸다.

16586685039381.jpg“무우? 무히히히히히!!”

천화의 기세에 놀라 움찔 몸을 떨던 흑우가 상황 파악을 한 것도 그 즉시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천화의 반응에 만족하며 경박스러운 웃음을 터트린 흑우가, 앞으로 잘하라는 듯 앞발로 엎드린 천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서열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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