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니네 무공 쩔더라 (1)2021.12.02.
“감사합니다. 동생의 치료가 끝나고 만약 다시 중원으로 나서게 된다면…… 천화 대협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무엇이든요?”
꼴깍 음흉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침을 삼키는 소리가 겹치자 천화의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설영과 세주연. 그녀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천화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끄응. 내가 어쩌다가…….’
그냥 절정 고수인 그녀를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아서 물은 건데 왜, 뭐, 어째서! 천화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들의 시선을 피했다. 불필요한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얼른 나예린을 떠나보내려고 했다.
“어디를 가는 것이냐!”
허나, 예상했던 대로 설산파가 그녀와 그녀의 동생을 그냥 보내줄 리가 없다. 장문인인 포태주와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예린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나예린이 혼자 나섰거나 사절단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다면 그냥 보내주었겠지만, 그녀의 발목을 잡을 족쇄인 동생을 데려가려 하자 거친 반응을 보였다.
“그 아이를 썩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지 못할까! 동생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몰래 데리고 나갔다면 좋았겠지만, 동생의 상태가 중하니 충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수레에 실어야 하는 데다, 이왕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확실히 매듭을 짓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감추지 않고 설산파를 떠나려 했던 것이다. 그런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산파의 인원들은 여전히 나예린을 속이려 들었다. 이곳에 있어야만 동생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나예린을 막아섰다. 부르르르- 이미 모든 사정을 알아버린 나예린의 주먹이 떨려왔지만 단번에 폭주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대를 이어 몸을 담았던 문파인 데다, 자신이 밖으로 도는 사이 동생을 돌봐준 것도 사실이니까. 설혼단이 독이 되어 동생을 더 위태롭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들이 일부러 그랬다는 확정적인 증거도 없는 상태이니까. 그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밝혔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켜주시지요.”
“네 동생은 이곳을 벗어나면 죽는대도!”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지금 스스로 파문을 하겠다는 것이냐?”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장문인인 포태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 나예린의 말이 거슬린 것이다.
“예. 원하신다면 굳이 설산파의 이름을 버리지 않겠지만, 허락하신다면 그러려고 합니다.”
“감히……!”
그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 것을 확인하자 포태주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 지금까지 실컷 거둬먹였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착각은 자유라더니 정말 자유로운 생각으로 배신감을 느끼고, 치를 떨었다.
“좋다. 허락하마. 단, 설산파가 네게 준 것을 모두 내놓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설산파가 준 것을 모두 내놓으라는 것은, 그 무공까지 모조리 포기하라는 뜻이었으니까. 일부 대문파에서, 문도를 파문할 때 그런 방법을 쓰기는 한다. 자파의 무공이 외부로 유출될 것을 우려하여 파문제자의 근맥을 자르거나 단전을 폐하여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도 어느 정도 특별한 무공일 때의 이야기지, 설산파 따위가 들먹거리는 것은 천화의 입장에서 우스울 뿐이었다. 음기를 축적하기 쉬운 설산이라는 지형과, 음기공이라는 특징을 가진 것을 제외한다면 무공 자체는 고작해야 일류가 될까 말까 한 수준이니까. 그 정도는 과장을 조금 보태어 돈 몇 푼 주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나라면 일단 뚝배기부터 깼다.’
그렇기에 이 정도면 나예린이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몽땅 도륙내고 걸어 나가도 무죄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예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가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다는 것을 알기에 포태주 역시 그런 말을 던진 것이다. 설령 정말로 무공을 포기하더라도 키워준 사문에 칼을 겨누지는 않을 것을 믿었다.
“그게 아니라면, 약조하거라. 매달 본파에 보내는 돈을 3할 더 올리고 중원에서도 지금과 같이 활동한다고. 그러면 보내주마. 아니, 수레를 끌 말과 동생을 보살필 인원도 보태주지.”
선심을 쓰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만 들어도 설산파에 있어서 나예린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파의 유일한 절정고수인 것이다. 예전에야 종종 절정고수나 일류 고수들이 배출되었지만, 현재 설산파는 배가 부른 탓인지 그처럼 힘들게 수련을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고수가 나올 리가 있나? 더구나 나예린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설산파의 위상을 높이고, 중원에 나가 있는 다른 제자들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무공을 폐하라고 강요하는 대신, 다른 조건을 걸어 그녀를 여전히 설산파에 묶어두려고 했다. 만약 머뭇거리다가 진짜로 스스로 무공을 폐하기라도 한다면 그들 입장에서도 정말 큰일이니까.
“잠깐만요. 이거 계산은 바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때, 천화가 앞으로 나섰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엉뚱하게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었기에 한 팔 거들기로 한 것이다.
“외인이 나설 일이 아니오.”
“외인이라니요. 저는 사절단장이고, 나예린 소저는 그 일원입니다. 그러니 어찌 외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임무가 끝난 것도 아닌데요. 아니면, 정파 연합의 권위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말빨이라면 또 지지 않지. 천화가 은근히 정파 연합의 이름을 들먹거리자 포태주도 함부로 말을 지껄이지 못했다. 나예린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돈줄인 중원의 지배자들과 척을 질 수도 없는 것이다.
“무슨 계산을 말하는 것이오?”
“나예린 소저가 설산파에 매달 보내는 금액이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설산파에서도 그것을 돌려주셔야지요. 그래야 합당한 계산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문파의 일원으로서 사문에 베푼 것을 어찌 돌려내라 하는 것이오!”
천화의 계산법에 포태주가 학을 떼며 소리쳤다. 당장 나예린이 벌어다 보내주는 돈으로 그동안 잘도 퍼먹고 놀아난 탓에, 원금은커녕 절반도 돌려줄 돈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돌려줄 생각도 없었고.
“그럼 사문은 왜 베풀어놓고 돌려달라고 하는 겁니까? 뭐 대단한 걸 줬다고.”
“지금 설산파를 무시하는 것이오?”
“네. 맞는데요. 무시 당할 만한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시든가?”
발끈한 포태주가 천화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본전도 못 건졌다. 이런 입만 터는 놈들에게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게 답이니까. 천화가 절정 고수의 풍모를 드러내며 내기를 감추지 않자 포태주의 안색이 헬쓱해졌다. 당장 이곳에서 천화가 날뛴다면 나예린 이외에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의 곁에 있는 두 여인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고, 저 흉물스런 영물들 또한 무시무시했기에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보여서는 안 될 흉한 꼴이었지만, 은근슬쩍 다른 제자들의 뒤로 몸을 숨기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정파 연합이 이처럼 무뢰배 같은 이들일 줄 몰랐구려! 내 정식으로 따질 것이오!”
“아, 그래요? 그래 보시든가?”
네가 나 협박한 거 다 소문낼 거야! 설산파의 장문인 포태주의 뜻을 풀어보자면 이러했다. 허나 그 따위 협박이 천화에게 통할 리가 있나? 오히려 그들이 한 짓거리를 낱낱이 폭로한다면, 설산파는 중원무림의 질타를 받아 모든 교류가 단절되고 말 터였다. 어디 그뿐인가? 이미 북해에서 빙궁주인 단철우와 만금상단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협상을 마친 상태였다. 초원과 북해, 그 경계에 있는 설산파가 만약 두 지역의 패자들의 눈밖에 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돈이 있더라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거지꼴을 면하기 어려울 터였다. 기껏해야 자급자족을 해야겠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설산 눈밭을 헤쳐 가며 풀뿌리나 캐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미처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포태주도 눈치는 있었다. 자신 있는 천화의 태도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고 마냥 강하게 나가지는 못했다.
“설혼단, 그렇다면 저년의 동생에게 먹인 설혼단의 값을 받아야겠소.”
아무리 스스로 파문을 결정했다지만 자파의 제자에게 저년이라니? 천화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을 때, 이번에는 나예린이 직접 나섰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 동생에게 설혼단이 독이 된다는 것을 알고도 계속해서 먹이신 것, 맞습니까?”
에둘러 말하는 것 없는 꽉 찬 돌직구였다. 그 말에 어딘지 뜨끔해보이는 몇몇의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인정할 것이라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독이라니? 설혼단은 영약이다. 영약!”
“어떤 이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나 이 아이가 버티기에 과도하다는 것을 알고도 먹이셨냐고 묻고 있습니다.”
“헛소리! 설혼단은 아무리 먹어도 독이 되지 않는 무척 귀한 영약이다. 내 친히 후궁과혈까지 해주었더늘, 제 동생을 살려주겠다고 귀한 영약을 먹여놓아도 매도하는 무도함이라니!”
예상대로 발을 빼는 포태주였지만 그 태도가 이미 글러먹었다. 눈치가 좀 있는 자들이라면 그가 뭔가 숨기는 바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나예린이 벌어다준 돈으로 자신들 또한 호가호위하며 살았으니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확인해보면 되겠네요.”
서로의 주장이 나름 팽팽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천화가 간단하다는 듯 답을 했다.
“헉?! 무, 무슨 짓……. 으읍!”
무형신보를 펼쳐 순식간에 포태주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그의 턱을 잡아 강제로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털어넣었다. 설혼단. 때마다 가져다주는 것도 귀찮았던지, 일반적인 영약이라면 기운이 소실되어 절대 그렇게 보관하지 않을 텐데도 몽땅 쌓아두고 있던 그것을 소지품창에서 꺼냄과 동시에 털어넣은 것이다. 한 알도 아니고 수십 알을 동시에.
“설혼단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괜찮다면서요?”
“크흑!”
포태주가 끅끅거리며 뱉어내려는 짧은 시도를 했지만, 곧 천화가 혈도를 제압한 탓에 실패로 돌아갔다. 목구멍을 타고 시린 기운이 흘러들어갔고, 이어 천화는 한 가지 수작을 더 부렸다. 내기가 원활히 흐르지 못하도록 일부 혈도를 추가로 막아버린 것이다. 이왕 경험하는 것, 나예린의 동생과 같은 입장을 겪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끄그그극……!”
결국 포태주는 불과 반에 반각도 되지 않아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었다.
‘생각보다 나약한 놈이었군.’
돈만 밝히더니 수련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 정도 수행만 쌓았더라도 이렇게 빠르게 혼절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놈을, 천화가 다른 제자들에게 짐짝처럼 던져주었다. 추궁과혈까지 했다고 자랑을 했으니 할 테면 해보라는 것이다. 그걸로 단번에 털고 일어날 수 있다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자, 그럼…….”
“멈추세요! 이건 경우가 아닙니다. 아무리 정파 연합이라 해도, 당신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다른 문파의 일에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의 문제라고요!”
“맞습니다. 이건 월권입니다!”
“문파의 문제는 문파에서 해결하게 둬야 합니다!”
“만약 저자만 아니었다면 설산파는 오히려 더 크게 발전을 했을 겁니다!”
그렇게 천화가 상황을 정리하려는 순간,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동조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타인이 문파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테고, 그들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나예린이 떠난다면 설산파가 어찌될 것인지를. 그러니 절대 놓을 수 없었다. 이대로 보내줄 수 없었다.
“흐음. 틀린 말은 아니군요. 어이쿠! 뭘 떨어뜨렸네?”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황당한 웃음을 지은 천화가 과장된 몸짓으로 무언가 일부러 땅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다시 주워들었다.
“아참, 저한테 이게 있는데, 그럼 이제 남의 일이 아닌 거죠?”
장문령부. 그것은 만년한철로 만든 장문령부였다. 장문인이 없을 때, 장문인과 같은 권위를 갖게 해주는 신물. 그것을 내보이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저것이 왜 천화의 수중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황당함도 잠시, 모두의 따가운 눈초리가 쓰러진 장문인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저걸 팔아먹네, 이 새끼가?
“설산파 장문령부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공표하겠다. 이 시간부로 나예린과 나백상을 설산파에서 파문한다. 둘의 근간이 설산파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그간 나예린이 설산파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여 아무 조건을 걸지 않겠다. 이 결정은 차후에도 번복될 수 없다.”
“아아아아…….”
다른 무엇도 아닌 장문령부의 권위를 빌려 하는 말이었다. 더구나 번복이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아두었기에, 나중에 장문인이 깨어난다 해도 그녀를 다시 붙잡을 수는 없을 터였다. 우겨본다 한들, 이제 진실을 알고 자유로워진 나예린이 그 말을 들을지도 미지수였고.
“만나서 더러웠습니다. 다시는 보지 맙시다.”
그렇게, 설산파가 동생에게 한 짓을 확신한 나예린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설산파를 먼저 빠져나갔다. 빙궁이 있는 북해 중심부까지는 제법 멀고 험난했지만, 산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북해빙궁의 무인들과 함께라면 평온할 터였다.
“자, 그럼 장문인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어.쩔.수.없.이. 문파 관리를 대신 해볼까나?”
하지만 천화는 꼬박 이틀을 더 설산파에 남았다. 나예린이 이 근방을 벗어날 시간을 벌기 위함도 있었지만, 설산파는 이른바 문파 관리가 좀 필요해 보였으니까. 기강은 물론, 수련 체계 자체가 엉망이 된 설산파의 무인들에게 수련이란 무엇인지도 알려줘야 했고, 설산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것들도 대신 치워줘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이틀 동안, 설산파는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제자들은 팔이 후들거려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까지 수련을 하느라 녹초가 되어 뻗어버렸고, 장문인의 숙소에 잘 숨겨져 있던 돈꾸러미도 천화가 친히 심마를 이겨낼 수 있도록 가져가주었다. 물론, 그냥 가져가면 차후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장문령부를 이용해 ‘투자’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증여나 대여야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투자라는 건 돈을 불릴 수도 있지만 날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설산파의 기둥뿌리를 제대로 뽑아먹은 뒤,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임무 완수를 위해 다시 사절단을 이끌고 중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