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쫄? 쫄? (1)2022.01.18.
‘얘들은 또 왜 여기 있어?’
차마 얼굴에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천화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잘 숨어서 대기하라고 했더니 왜 여기에 잡혀있단 말인가?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사천당가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이들이 자신과 저들의 사이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체를 숨긴다고 숨겼다지만 조금만 조사를 해본다면 충분히 의심할 수 있을 테니까. 복건성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개하여 움직였다고는 하나, 겨우내 동안 해적들을 소탕하며 위용을 떨쳤기에 충분히 그들의 정체를 의심하는 이들이 나타날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조심하라니깐…….’
속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천화가 남해삼십육검을 개량해주었기에 그들의 무위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저렇게 멀쩡히 잡혀온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도 대충 감이 왔다.
“헌데, 저들은 누구입니까?”
계획이 틀어졌다면 그에 맞춰 움직이는 수밖에. 천화가 모르는 척 그들을 바라보자 위문호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였기에 자칫 자신들을 포위하고 제압하려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회유의 여지가 있다 여겼는지 장단에 맞춰주었다.
“별것 아닙니다. 흔한 살수들이지요. 곧 처리할 겁니다.”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 살수라니, 거참 흉흉한 일이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목을 친 뒤 본보기로 대로에 걸어둘 작정입니다.”
천화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일까? 위문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천화와 그들을 돌아보았다. 동요하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지. 실제로 그들의 목이 전부 떨어진다 해도 천화로서는 크게 상관이 없었으니까. 이왕이면 해남파라는 전력을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이지, 그들이 없다고 될 일이 안 되는 상황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태라면 천화 혼자서도 어쩌면 해남파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럼 들어가서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제가 아주 재미난 것을 가지고 왔는데.”
천화와 설영이 처음 시선을 준 이후 전혀 그들을 신경쓰지 않는 모습에 위문호도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천화가 건넨 즐거운 목소리에 혼란스러워졌다. 그 말에 생각난 것이다. 천화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러시죠.”
위문호가 천화를 안내하려 했지만 천화는 제 집처럼 장원 안을 휘젓고 들어갔다. 이미 내부의 구조 따위는 훤히 알고 있다는 듯,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져 처음 방문한다면 헷갈릴 수밖에 없는 구조임에도 거침없이 앞장섰고, 밀담을 나눌 만한 장소를 찾아냈다. 바로 장문인의 침소와 연결된 응접실을 말이다.
‘이미 이쪽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건가?’
그 모습에 위문호도 긴장했다. 천화는 단순히 무신지로에서 여러 번 와본 적 있는 곳이기에 가볍게 생각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마치 이미 해남파에 대한 모든 것을 꿰고 있다는 시위처럼 보였다. 그렇게 천화가 설영과 먼저 들어가 자리에 앉자, 위문호는 계획대로 주변에 눈짓을 보내고 뒤따라 들어섰다. 천화가 저들에게 어떤 정보를 얻어냈든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이곳은 남해도이고, 자신은 해남파의 장문인. 곧 이 섬의 왕이다.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뜻대로 될 터였다.
“앉으세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천화는 주객이 전도된 듯 살짝 껄렁한 모습으로 먼저 앉아 자리를 권했다. 그 옆에는 설영이 있었고, 함께 배를 타고 왔던 흑우는 안으로 들이기 어려웠기에 잠시 밖에 대기시켜 둔 상태였다. 녀석의 힘이라면 설혹 수상한 짓을 당해도 문제가 없을 테고, 여차하면 역소환을 통해 곁으로 불러내면 그만이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또한, 흑우와 함께 은룡도 밖에 남았다. 주자엽과 수하들이 잡힌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독이겠지. 사천당가에서 받아온 독으로 자신을 중독시키려 한 것만 보더라도 대충 짐작이 갔다. 상당한 무위를 지닌 저들이 힘없이 당한 것도 독이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러니 은룡이 힘을 발휘한다면 그들을 중독시킨 독을 해독하고 구해내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 굳이 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고 계시죠?”
위문호가 자리에 앉자 천화는 해남파에서 발행한 전표 중 하나를 팔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와 반대로 급격히 굳어지는 위문호의 표정. 설마 천화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 천화가 물건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이 자리에서 없앨 수도 있을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걸 전부 가지고 계신 겁니까?”
“당연하죠. 돈은 준비가 되셨을지 모르겠네요?”
“조금만 말미를 주시지요. 전액을 당장 마련하기는 어렵습니다.”
“말미라……. 어느 정도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차하면 돈이 아니라 다른 걸로 받아도 되고요. 예를 들어 사업체라든지?”
그래도 순순히 인정하는 위문호를 보며 천화는 살짝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산은 바로 해야 했다. 돈으로 준비하면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혹은 광주와 광동성 전역에 벌려놓은 사업체들을 넘기는 식으로 전표의 일부와 교환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원래는 모두 제 것인 것들로 거래를 하려 하자 열이 받았는지 몸이 잘게 떨렸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꾹 눌러 참는 것이 보였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저 밖에 있는 이들이라든지요.”
그리고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저 밖에 묶인 이들을 교환 조건으로 내건 것이다.
“아, 그런 취향이셨구나.”
“……예?”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여자가 좋거든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하지만 천화는 천연덕스럽게 그것을 거절했다. 이 천문학적인 금액이 적힌 전표와 저들을 바꾸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설령 이 돈으로 저들을 사더라도 그냥 보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천화와 저들의 결탁을 확신하는 증거만 줄 뿐이었다. 그 말에 설영이 힐끔 노려보긴 했지만 상관없겠지. 위문호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머리를 굴렸고, 곧 천화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럼 닷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안에 준비하겠습니다.”
“오? 좋습니다. 그럼 사흘 기다리죠.”
“예?”
“시간은 금이라고 했습니다. 아니면 이자라도 주시든가요? 뭐, 싫으시면 바로 내어줄 만한 곳에 이 전표들을 넘기고요.”
“……알겠습니다. 사흘. 그 안에 준비해보죠.”
닷새를 기약했지만 천화는 단번에 사흘로 줄였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정말 그들이 돈을 준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천당가와 손을 잡은 순간부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했다. 기존 장문인을 해하고 장문인의 자리를 꿰찬 것이야 그렇다 치고, 불법적인 일까지 서슴지 않으며 광동성 전역에 손을 뻗은 것만 보더라도 그의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 인물이 이만한 금액을 그냥 내어준다? 차라리 천마가 머리 깎고 중이 되는 걸 믿겠다. 일단 협상을 마치고 자리를 파한 천화는 안내에 따라 배정된 숙소로 향했다. 그에 따라 밖에 대기시켜둔 흑우와 은룡도 데려올 수 있었지만, 붙잡힌 주자엽과 수하들은 여전히 점혈되어 꼼짝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좀 돌아다녀도 되죠? 전각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곧이어 그들의 처분에 대한 소식도 들려왔다. 천화와 설영을 조급하게 만들려는 수작인지, 기존의 일정을 앞당겨 바로 내일 처형식을 거행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남해도의 주민들도 소문주였던 주자엽의 얼굴을 알고 있을 테니 그들을 죽여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일 터였다.
‘속이 뻔히 보이는구만.’
더불어 다른 속내도 가지고 있겠지. 돈을 주기에 앞서 천화가 그들을 구하게 만들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천화는 개의치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먼저 남해도의 정확한 민심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더불어, 다른 확인할 것도 있었다.
“제법 잘 발전이 됐군요. 과연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비견 될 만한 명문답습니다.”
“감사합니다.”
해남파 무인의 안내를 받은 남해도 곳곳을 돌아보았다. 아까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보았고, 사람들의 표정도 하나하나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불편한 기운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경계어린 눈빛과 기운들. 아무래도 현 해남파 장문인의 초대를 받아 온 이들이다 보니 그들과 한패라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아직 이전의 해남파를 그리워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 현 장문인에 반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현 장문인의 세력이 해남파를 장악했다지만, 그들의 부족한 정통성과 이전 장문인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속내를 숨기고 머물러있는 것이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어딘지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런 이들을 둘러보다가, 천화가 문득 어떤 이들을 가리켰다. 남해도의 주민들과 비슷한 행색을 하고 있지만 그 기질부터 복색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주민들입니다. 장문인께서 자리에 오르신 후, 외인에게 폐쇄적인 남해도의 문화를 바꿔보려 하시고 있지요. 그분께서는 뜻만 함께 한다면 그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주의이십니다.”
은근히 천화를 회유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천화는 그 말로 인해 확신할 수 있었다. 놈들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벌써 붙어먹고 있었군.’
은근한 경계가 어린 눈빛.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기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기운에 더 민감해진 천화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이 마교에서 파견된 마인들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한 것은 운철을 대어보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 상황이 너무 급변할 수 있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모르는 척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곧 보게 될 테니까. 다시 해남파의 장원으로 돌아온 천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먹고 마셨다. 그렇게 들이키는 음식과 술에는 이전에 먹었던 독과 결합하여 특수한 작용을 일으키는 혼합독이 들어있었지만 마음껏 먹어치웠다. 그 정도 독 따위는 이미 통하지 않는 몸이 되었고, 함께 해남파의 식량 창고를 거덜내는 중인 흑우와 설영 역시 은룡이 내뿜는 정화의 빛 덕분에 중독 걱정 따윈 없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하루가 흘렀다. 주자엽과 그 수하들이 처형되는 처형식의 날이 다가왔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모든 일에는 본보기가 필요한 법이죠. 남해도의 평화를 해치려 한 자들이니 마땅히 본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처형식은 생각보다 거창하게 이루어졌다. 저잣거리에 처형대가 설치되었고, 굵고 단단한 밧줄에 포박된 이들이 꿇어앉혀진 채 처분을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최후를 보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남해도의 모든 이들이 불려나왔다. 자신들에 반하는 자들은 어찌되는지 보여줌으로써 남해도를 공포로 다스리겠다는 의도였지만, 아이들도 돌아다니는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의 목을 치는 것은 다소 과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위문호의 입장에서는 전대 문주의 정통을 잇는 후계자이기에 더욱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최후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불편해하는 천화에게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인 위문호는 곧 손을 들어 처형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
‘이참에 뿌리뽑겠다는 건가?’
처형대 주변으로는 해남파의 고수들이 늘어섰다. 일류 이상의 고수들이 두 패로 나뉘어 천화와 설영을 포위하고, 처형대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반대 세력이 그들을 구하려 한다면 일망타진 할 수 있도록. 더불어 천화와 설영이 딴 생각을 품더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천화와 설영의 경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천화는 전혀 초조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뒤로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꼰 채 지켜볼 뿐이었다.
“처형하라.”
“이놈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위문호의 마지막 신호가 떨어진 순간, 인파들 틈에서 일단의 무리가 튀어나왔다. 남해도에 남아있던 이전 장문인을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이 검을 떨치며 처형대를 향해 달려들었고, 예상했다는 듯 주변을 지키던 고수들이 막아섰다. 수적으로나 무력으로 압도적인 열세다. 이래서는 일각을 채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제압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판이었지만 천화와 설영은 나서지 않았다. 아니, 나설 필요가 없었다.
“누가 감히 형제에게 칼을 겨누는가!!”
콰앙!! 그들이 난입한 이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처형을 앞두고 포박되어 있던 이들이 탈출했다. 내공을 일으켜 밧줄을 끊고 수갑을 부수며 근처에 포위하고 있던 이들을 역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