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쫄? 쫄? (2)2022.01.20.
“이게 무슨?! 분명 점혈이 되어 있었을 텐데……!”
위문호가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생각한 천화가 여기 있는데, 분명 밤새 감시하고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을 확인했을 텐데 점혈을 풀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막아라! 아니, 죽여도 좋다!! 해치워버려!!”
믿기든 믿기지 않든 이미 난전은 벌어지고 있었다. 당황하긴 했어도 상대는 해남파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다. 하지만 풀려난 주자엽과 수하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애초부터 해남파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인 데다, 천화가 건네준 새로운 남해삼십육검까지 익혔으니까. 적수공권이던 그들이 근처의 무인들을 제압하고 검을 빼앗아든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고, 검을 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같은 문파원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인지 손속에 사정을 두어 버티는 것일 뿐,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몰아쳐갔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현 장문인에 반기를 드는 이들까지 일어났다. 그들과 힘을 합쳐 싸우기 시작했다.
“흠, 콩가루 집안이네요?”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또 다른 조력자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혼란스러워하는 위문호에게 천화가 가벼운 핀잔을 날렸다. 아직까지는 철저히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쀼웃!”
그런 천화의 어깨 위에서, 이번 일의 주역인 은룡이 칭찬해달라는 듯 으쓱거리며 재잘댔다. 감시망을 뚫고 그들이 갇힌 옥사에 숨어들어가 점혈을 풀어준 것이 바로 은룡이었으니까. 과연 신수라는 것인지, 요령을 알려주자 혈도를 점하고 푸는 법을 곧장 익혀낸 은룡이 그들을 해독시키고 점혈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별도의 언질이 없었음에도 이 순간을 기다리며 여전히 혈도가 점해진 척 연기를 한 것은 순전히 저들의 판단이었지만. 덕분에 저잣거리가 개판으로 변했지만, 수적인 열세와 실력의 고하가 맞물려 꽤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켜라!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그때, 슬그머니 천화와 설영의 눈치를 살피던 위문호가 직접 검을 들고 뛰쳐나갔다. 혹여 두 사람이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가 싶더니, 그보다 수하들이 쓰러지는 것이 더 위험하다 여겼는지 직접 검이 빼든 것이다. 그로 인해 전황이 조금씩 다시 뒤집혀갔다. 어쨌든 위문호는 전대 장문인을 죽일 정도의 강자였으니까.
“놈! 내가 상대해주마!”
그러자 저쪽에서도 주자엽이 직접 나섰다. 이전에는 상대도 되지 않는 두 사람이었지만, 주자엽 역시 그간 절치부심 수련을 하며 실력을 많이 끌어올린 상태였기에 좋은 대결이 될 터였다. 정통성을 이은 주자엽과 해남파를 장악한 현 장문인의 대결. 그 상황을 파악한 모두가 숨을 죽이며 물러났다. 저들의 대결에 따라 오늘의 승자가 가려질 테니까.
“잠깐!”
“?!”
“!!”
쐐애애액- 그 순간, 천화가 끼어들었다. 정확히는 그가 던진 무명검이 둘 사이를 가르고 날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이대로면 너무나 격차가 심할 테니까. 내공을 회복하고 중독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병기조차 가지지 못한 주자엽이 위문호를 상대하기에는 버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화는 무명검을 빌려주었다. 그렇다 한들 내공의 차이는 분명하겠지만, 무명검의 공격력과 추가 효과라면 충분히 겨뤄볼 만하게끔 만들어줄 터였다. 플레이어가 아닐 경우라도 딱히 표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기의 추가 효과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무슨 짓이오! 지금 저들의 편에 서겠다는 것입니까!”
“에이. 그래도 장문인 자리를 겨루는 자리인데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춰야죠. 아니면 쫄리시는 겁니까? 제대로 된 검도 없는 상대가 아니면 못 이겨요?”
“하지만……!”
“쫄? 쫄?”
위문호가 발끈해서 소리를 쳤지만 천화는 빙긋 웃으며 빈정거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싸잡아서 욕을 하거나, 대결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설사 그를 죽이더라도 제대로 위신이 서지 않을 터였다.
“좋다. 얼마든지 해보거라! 누가 진짜 해남파의 주인인지를 알려주마!!”
위문호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 기세를 피워올릴 동안 주자엽은 얼른 무명검을 빼어들었다. 신검. 강호에 유일하게 신검이라 부를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명검이었다. 무려 전설 등급의 검이었고, 천화조차도 그와 같은 등급의 장비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가치를 집어드는 순간 알아차린 주자엽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며 자신감에 눈을 빛냈다. 위문호가 들고 있는 해남파 장문인의 상징, 해왕검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 검만 있다면 위문호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꺾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으니까. 물론 천화만 빼고.
“진짜 남해삼십육검을 보여주지.”
고개를 돌린 주자엽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버지의 원수이자 문파의 배신자인 위문호를 향해 전력을 다해 부딪혀가기 시작했다.
“해소산붕.”
“해소산붕!”
쩌엉!!!! 검강을 피워올린 두 사람의 검이 격돌했다. 사용하는 것은 동일하게 남해삼십육검이다. 해남파가 자랑하는 무공이자, 검초에 바다를 담아냈다 평해지는 고차원적인 무리가 담긴 무공이었다. 까앙 까앙 까앙- 맞붙는 순간 몇 번이나 되는 검격이 오갔다. 남해삼십육검은 아홉 초식으로 이루어진 서른여섯 번의 변화를 담은 검이다. 즉, 단순히 계산해도 한 초식에 네 번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변화무쌍한 검이라는 뜻이다. 그런 검을 떨쳐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아 마땅할 만큼, 제대로 남해삼십육검을 펼쳐낸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후반부 초식으로 이어질수록 변화는 더 빠르고 현란해졌기에, 처음부터 마지막 초식까지를 한번 쭉 펼쳐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수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 둘은 그 변화를 극한까지 펼쳐보이고 있었다.
“놀고 있네.”
하지만 정작 그들의 격돌을 지켜보는 천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름 잘 싸우고 있다. 잘 싸우고 있는데, 문제는 주자엽이 자신이 가르쳐준 새로운 남해삼십육검이 아닌 이전 형태의 남해삽십육검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여유를 부리는 건가? 아니면 자존심?’
무명검이라는 병기의 이점을 살려 비등하게 겨루고는 있지만, 까딱 잘못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중요하고도 긴박한 순간에 저런 짓을 한다는 것은 천화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화영화에서처럼 위기에 빠지면 더 강해진다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천화.”
“괜찮아. 일단 놔둬보자고.”
그때, 설영이 천화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모두가 두 사람의 대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감지한 것이다. 천화 역시 그것을 놓치지 않았지만 방관했다. 은밀히 움직이는 무리를 모두 둘이었다. 하나는 위문호의 직속 수하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제 길거리에서 보았던 이민자들이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민자들이 천화의 설영의 근처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이 싸움에 개입하려 든다면 단숨에 제압하려는 의도이겠지.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겨우 이 정도인가!”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콰앙! 쾅! 쾅!! 그러는 사이 주자엽과 위문호의 대결은 격화되었다. 분명 내공에서도 자신이 우위일 테고, 남해삼십육검의 성취 역시 자신이 높을 텐데 좀처럼 승기를 잡을 수 없자 위문호가 답답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주자엽이 딱히 우세한 상태도 아니었다. 내공의 차이를 병기의 이점이 메우고, 초식의 숙련도 역시 천화가 준 진(眞) 남해삼십육검을 익히며 급격하게 높아진 상태였기에 비등한 싸움이 가능한 것이다.
“이게 전부라면 실망이군.”
허나, 다음 순간 힘의 균형이 깨어졌다. 주자엽이 같지만 다른 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眞) 남해삼십육검. 천화와 고인물들이 재해석해 만들어낸 새로운 남해삼십육검이 그의 손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윽?! 이게 무슨……!”
바다를 닮았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했다. 파도와 해일을 담아내고, 와류와 잔잔함을 동시에 담으며, 생(生)과 사(死)마저도 깃드는 것이니까. 그야말로 바다가 품고 있는 모든 변화와 흐름을 검안에 집약시킨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쇄적이되, 개별적이지 않았다.
‘수련은 제대로 한 모양이군.’
기존 남해삼십육검의 강점은 점점 변화가 격렬해지고, 수가 쌓일수록 위력이 증폭된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약점이 되기도 했다. 힘과 변화가 중첩되지 못하도록 초반에 더 큰 힘으로 몰아쳐버리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천화와 고인물들은 그 개념을 엎어버렸다. 바다의 변화는 수십 년간 배를 탄 뱃사람들조차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흐름은 이어지되 꼭 정해진 초식이 연결되지 않더라도 온전히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아홉 초식을 뒤섞고 삼십육 개의 변화가 동시에 튀어나올 수 있도록 손을 본 것이다.
‘이 정도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는데.’
그렇다 할지라도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모든 초식을 다 쏟아내야만 다시 처음부터 연결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초반부터 매서운 변화로 몰아치고, 힘을 쏟아낸 이후 초식간의 연결과 방어용으로 약간 초식들을 사용할 수 있게끔 된 것이니까. 게다가 한 초식에 네 개가 아니라 그 이상의 변화까지도 담아낼 수 있으니 위문호가 막아내기 급급한 것도 당연했다.
“이게 대체 무어란 말이냐! 이건 남해삼십육검이 아니다!”
자신의 수를 예측하며 검을 떨쳐내는 주자엽의 공세에 위문호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분명 무공 수위는 자신이 위일 텐데 형편없이 밀리기 시작하자 거칠게 힘을 쏟아내며 거리를 벌렸다. 주자엽의 무공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욕심이 눈이 멀더니 무공을 보는 눈까지 없어졌구나. 이것은 태상문주께서 남기신 진 남해삼십육검이다.”
뿌듯하게 대꾸하는 주자엽을 보자니 살짝 뜨끔한 천화였지만, 뭐 어떤가? 결과만 좋으면 됐지.
“개소리! 그런 게 있었다면 네 아비도 죽지 않았겠지! 어디서 사술을 익혀놓고 포장을 하려 드느냐!!”
하지만 위문호는 인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알고 있지만 인정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결국 주자엽의 정통성만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격하게 화를 내며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몇 번을 해도 똑같……!!”
문제는 그때 터졌다. 두 사람이 다시 격돌하려는 순간,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 중 일부가 주자엽을 향해 튀어나간 것이다. 이대로면 자신들이 모시는 이가 패할 것이 보였으니까. 한 번의 수치와 오명을 무릅쓰더라도 지금 반드시 주자엽을 죽여야만 했다. 흐트러진 민심이야 향후 어떤 식으로든 다독이고, 공포로 다스리면 될 테니까.
“모두 동작 그만!!!”
“……?!”
털썩 털썩 그 순간, 천화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사자후라 부를 만한 내공이 가득 실린 음성이었다. 아니, 음공이었다. 이전에 손가락을 튕겨 적들을 쓰러뜨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음성에 악마칠음의 공능을 담아낸 것이다. 순간적으로 기혈이 뒤틀린 이들은 왈칵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나머지 인물들도 황급히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더했다. 악마칠음의 성취가 더 높았다면 정확히 덤벼드는 이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에 패왕과 같은 기세를 담으며 공포까지 심어줄 수 있었으니까.
“큭! 이게 무슨 짓이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곧추세우며 항의한 것은 위문호였다. 개입하지 않겠다더니, 이것은 명백한 공격이 아닌가? 당장 천화를 제압해도 명분이 설 만한 상황이지만, 조금 전의 일수에 담긴 어마어마한 내공이 두려웠기에 먼저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무슨 짓은, 저놈들이 무슨 짓이겠지.”
“……이것은 해남파의 일이오. 남해삼십육검을 익힌 자들이라면 누구나 장문인에 도전할 수 있소.”
여전히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핀잔을 건네는 천화의 말에, 위문호는 항변했다. 해남파의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상한 개입이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당연히 궤변이다. 남해삼십육검을 익힌 자라면 누구나 장문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일대일의 정당한 비무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처럼 뒤통수를 까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그가 이전 장문인을 해하고 저 자리를 차지한 것도 비슷한 방식이었을 듯싶었다.
“아, 그래? 내가 그걸 몰랐네.”
그 말에 천화가 빙긋 웃었다. 이미 한 차례의 시도로 인해 일대일로 겨루는 상황이 끝났다고 여긴 것인지, 위문호의 주변으로 모여든 이들을 슥 둘러보며 크게 발을 굴렀다. 그들을 향해 튀어나갔다. 콰앙!! 이번에도 그 한 걸음에 악마칠음의 묘리가 담겼다. 지면을 강타하는 소음과 함께 지면뿐 아니라 기혈에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 한 걸음에 무공이 약한 이들은 눈을 까뒤집고 지면에서 튕겨올랐다. 천마군림보. 마교의 교주인 천마가 사용하는 독문무공을 연상시키는 신기에 가까운 한 수였지만, 사이한 기운 따위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해삼십육검이라면 나도 익히고 있는데, 그럼 나도 끼어도 된단 말이지?”
천화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위문호의 코앞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