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당문의 시험 (3)2022.02.22.
천검. 보통 천검이라는 이름이 붙는 무공 초식들의 특징은 하늘을 닮는다는 오의를 품었다는 것이다. 허나, 천화가 익힌 무상천검의 이초에서 말하는 천검은 말 그대로 천 개의 검이었다.
“미친……!”
무려 일천 개의 강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가니,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물론 아직은 화경에 이르지 못해 정확히 일천 개는 아니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서로의 내기를 연결시켜 한 점에 집중되는 내공 폭격을 막아내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타격을 받는 한 지점에 힘이 몰리고, 그동안 다른 곳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몇 곳 정도라면 동시에 힘을 집중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일백을 넘어간다면 선택이 필요했다. 일부를 지키는 대신 나머지를 희생할 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공평하게 처맞을 것인지. 콰과과광!!!!
“끄으으윽……!”
“후우! 간만에 힘을 좀 썼더니 개운하구만!”
내공을 연결시켰다는 것은 서로 얽혀 함부로 몸을 빼낼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놈들은 회피조차 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그 와중에 생존에 대한 욕구가 치밀었는지, 뜻이 맞지 않아 일부는 연결된 내공의 운용이 비틀리며 스스로 내상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차라리 내공을 연결시키지 않았다면, 독진을 이루지 않았다면 제법 천화를 곤란하게 했을지도 모르지. 허나 독왕의 공격과 독인지체가 은룡에게 무너진 충격이 너무 컸고, 천화가 이 정도까지의 강자일 것이라 생각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쉽게 말해, 상대에 대한 정보 부족이 이 같은 사태를 낳은 것이다. 그 누가 있어 저 젊은 나이에 이만한 힘을 가질 것이라 생각이나 했겠냐마는.
“모르면 맞아야지.”
수백 개의 강기를 날려 독진을 태우고 와해시켜버린 천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독진을 깨부수고도 여력이 남은 강기들을 움직여 놈들의 목에 겨누었다. 독진을 구성하던 이들이 내상을 입긴 했지만 완전히 빈사 상태에,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천화의 무위에 압도되었다는 것이 컸다. 자신하던 독진을 단신의 힘으로 박살을 내버렸으니 자신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는 패배감에 휩싸인 것이다. 실상 독진의 효용이 하나도 드러나지 못하고, 그들 개별적으로 싸운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았지만 정신이 아찔해져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멈춰라!!!”
이대로면 당문의 정예들이 몰살을 당한다. 그것도 고작 한 명의 후기지수에 의해서. 저들이 천화를 상대하는 동안 흑우를 때려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음을 느끼던 독왕이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당문의 명예도 문제지만, 이대로 저들을 잃으면 어마어마한 전력 손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정파 중에 가장 적이 많은 곳을 꼽으라면 단연 첫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그들이 아닌가? 힘이 약해졌다는 소문만 들려도 이곳저곳에서 시비를 걸어올 테고 복수를 하려 들 테니, 어쩌면 오대세가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지도 모른다.
“제가 왜요?”
그 외침에 일단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천화의 눈빛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덤빈 놈들을 뭐하러 살려두어야 하나? 분명 살려주면 언제고 뒤통수를 치겠다고 이를 갈 놈들인데. 물론 이들이 없으면 마교 소속의 만독문을 견제하고 그들의 독을 해독할 이가 부족해진다지만, 그거야 어떻게든 될 일이다. 좀 더 연륜이 있을 뿐이지, 이들이 좀 죽어나간다고 아예 당문이 힘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힘이 있을 때는 해독 하나 해주는 걸로 온갖 위세를 다 부릴 테지만, 힘이 좀 약해지면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겠지.
“컥!”
푸욱! 그 반응이 허세나 연기가 아니라는 듯, 천화가 조종하는 강기 중 몇 개가 당문 고수들의 목을 갈랐다. 숨을 거두어갔다.
“천독단을 주겠다!”
그러자, 독왕도 더 이상 소리만 지를 수 없었다. 굴욕적이지만,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당문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겠지만, 천화를 인정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가문의 정예인 저들만 몽땅 죽어나가더라도 당문이 가진 힘의 2할 이상이 사라지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로원에도 협조를 구할 것을. 후회가 스쳐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천독단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천화를 달래고 전력을 보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면, 감히 당문을 면전에서 욕할 만한 이들은 없을 테니까.
“두 개.”
“뭣?”
“아까랑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원래는 세 개쯤 받아야 하는데, 제가 마음이 약해서 깎아드리는 겁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만한 힘을 사용하고도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는 모습의 천화는 그 힘의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으니까. 당장 거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놓고서 연기를 하는 것이라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아직 그의 뒤에는 힘을 거의 쓰지 않은 설영이 버티고 있었고, 이 정체모를 영물들의 힘 또한 여느 고수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던 차였다. 더구나 지금 설영의 품 안에 쏙 들어간 채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은빛 뱀 영물이 자신들과 상극의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더 싸운다면 설사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좋아. 주겠네.”
“가주!!”
결국 독왕이 결단을 내렸다. 주변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철저히 계산적인 사람이니까. 천화, 설영과 싸워서 잃는 전력은 천독단 두 알로도 복구가 어려운 수준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천독단을 내어주고, 천화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편이 나았다. 이곳에서 천화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이상, 천화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당문에 위협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있는 한, 또 원한 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이상 당문은 발 뻗고 잠들 수 없겠지. 지금은 초절정이지만 화경에라도 올라 당문을 공격해온다면 정말 멸문을 각오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양패구상을 각오하고 천화와 싸우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이제 좀 말이 통하시네. 그럼 기다려드릴 테니 얼른 가지고 오시죠.”
“지금 당장 말인가?”
“에이. 우리가 한가롭게 밥 먹고 술 먹고 하하호호하다가 선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뭐, 나중이야 어떻든 거래는 확실히 해야죠.”
독왕이 머리를 숙였으나, 천화는 더 거세게 그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무슨 개수작을 벌일지 모르니 당장 내놓으라는 것이다. 원래 당문이 신뢰가 없는 집단이라고는 하나, 그대로 오대세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례하다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뭐?
‘언제는 오대세가라서 그 패악질을 부리고 다녔나? 가만 두면 짱구를 굴려댈 놈들이니 후딱 처리하는 게 낫지.’
“알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결국 독왕은 몸을 돌려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오직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어딘가에서 천독단을 찾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거, 운 좋은 줄들 아쇼. 내가 옛날 성질 같았으면 그냥! 어?”
그동안 천화는 상처 입은 당문의 고수들을 하나하나 제압했다. 이미 그들을 살려주기로 약속하기야 했지만, 독왕이 언제 딴 마음을 먹을지 알게 무언가? 어차피 치료야 내공이 없어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에, 점혈을 통해 내공을 금제시키고 한곳에 모아두었다. 독문 점혈법으로 금제를 가했으니 정해진 시간이 되거나 천화가 직접 해혈을 해주지 않는 이상 내공을 사용하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슬쩍 흑우를 이용해 ‘오한’ 효과를 중첩시켜 놈들을 ‘빙결’상태로 만들어놓았기에 마음대로 몸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 사이 독왕이 딴 맘을 품으면? 칼질 한 번에 싹 다 목이 날아가는 거지 뭐. 제 집 안마당에서 인질이 되어 꿇어앉혀진 기괴한 광경이었지만 오직 천화만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흑우의 등 위에 다리를 꼬고 누운 채로 독왕을 기다렸다.
“받아라.”
휘익-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독왕이 작은 목함을 하나 던져왔다.
“에헤이! 자기 거 아니라고 막 다루시네!”
가뿐히 몸을 튕겨 일으킨 천화가 그것을 안전하게 받아들었지만 즉시 열어보지는 못했다. 천독단의 독기를 생각하면 이 함을 여는 순간 중독이 되고 말 테니까. 그만큼 엄청난 극독이었고, 지금의 천화라 해도 준비 없이는 감히 삼키지 못할 수준이었기에 일단 소지품창에 집어넣었다. 물건이 제대로인지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아니면 다시 찾아와서 깽판 한번 제대로 쳐주지 뭐. 당장 독왕조차 특수하게 만들어진 수투를 끼지 않고서는 만지지 못하는 것이니, 제대로 먹어치우려면 그에 합당한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이제 그들을 풀어주게.”
독왕의 얼굴에 뭔가 아쉬운 빛이 스쳐가는 듯했지만 곧 표정을 회복했다. 거래대로 다른 이들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뭘 풀어주기씩이나. 그냥 내공만 금제해 둔 거니까 자기들이 걸어서 가면 되죠. 해혈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될 겁니다.”
“모두 일어나라!”
지들이 안 움직이는 걸 왜 자신에게 그러냐는 듯한 천화의 말에 모두가 얼굴이 벌게졌다. 그리고 그들을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근신 백 일에 처한다!”
“…….”
사천당문의 가주인 독왕의 말이 아니었다. 독왕의 뒤를 따라 나타난 당문의 노고수들. 사천당문의 원로들이었다. 멀쩡히 가주가 앞에 있는데 그들의 처분을 마음대로 결정하다니? 일반 문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곳은 당문이었다. 가문의 직계를 중심으로 권력이 이어져오는 까닭에, 독왕은 월권을 행사하는 그 늙은이들에게 별다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 당문에서 원로라는 것은, 단지 무공이 높은 고수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집안의 큰 어른이라는 뜻이니까.
“가문의 고수라는 자들이 고작 후기지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다니. 가주는 대체 훈련을 어떻게 시킨 것인지 의문스럽구려!”
“송구합니다.”
심지어는 가주가 원로들에게 사죄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영향력이 당문 내에서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분명 오면서도 한마디씩 했겠지. 나 때는 말이야~ 하면서.’
이미 가주가 내뱉은 말이 있으니, 천화가 힘으로 찍어누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천화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는 없지만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가주는 이제부터 나서지 마시오. 저자와는 우리가 대화하겠소!”
“하지만……!”
“이건 원로원의 결정이오!”
아예 원로원의 권위를 이용해 가주의 입을 막아버렸다.
‘문파 꼴 잘 돌아간다.’
당문의 가장 큰 적이자 고민거리는 원로원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돈다는 것을 알기에, 천화는 가볍게 혀를 찼다.
“제법 이름난 후기지수라더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강호의 도리가 아무리 땅에 떨어졌다지만, 강호의 평화를 위해 분골쇄신한 선배들에 대한 예의와 도리가……!”
그때, 그 모습을 발견한 원로 중 하나가 쌍심지를 켜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 끝날 줄 모르는 잔소리에 천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분골쇄신은 개뿔.’
이 전이나 전전세대쯤 된다면 모를까, 자기들은 평화의 시대에서 꿀 빨고 산 걸 다 아는데 뭐가 어째? 니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강호의 평화를 만들고, 2회차까지 살고 있는 게 나다 이놈아! 좋은 관계로 온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이 귀 따갑기만 한 소리를 듣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할배요.”
“뭐, 뭣이?! 강호의 대선배에게 할배라니 무례하기가……!!”
“거령문, 창파문, 백홍문, 명도방, 비룡방…….”
“!!”
천화의 입에서 지금은 사라진 문파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원로들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다 자기들이 잡아먹은 문파들의 이름이었으니까. 개중에는 제법 명문이라 불리는 정파도 있었고, 사파도 있었지만 그 사파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한 방식을 사용했기에 내심 찔리는 바가 있는 것이다.
“네, 네놈이 그 이름들을 어찌 아는 것이냐?!”
“왜요. 더 읊어드릴까?”
당황한 원로들이 다그쳤지만 천화는 그저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대꾸할 뿐이다. 그래야 더 많은 생각이 들 테니까. 혹여나 천화가 그들 중 하나의 후손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복수를 위해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폭로하면 어쩌지?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음을 주고받는 것인지 입술을 달싹거렸고, 곧 태도를 바꾸었다.
“흠흠. 집안 사람도 아닌데 우리가 조금 흥분을 했던 것 같군. 그보다,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는데 어떤가?”
“제안이요?”
대체 또 무슨 꿍꿍이일까? 결코 정상적이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하며 천화가 눈을 가늘게 뜨자, 원로 중 하나가 마저 이야기를 건넸다.
“자네의 무공이 출중하다고는 하나,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당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네.”
“그래서요. 할배들이랑 한판 붙자고요?”
“아니, 그런 건 아닐세.”
결국 이대로는 못 보내주겠다는 소리다. 독왕을 기다리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공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겠다, 바로 한판 붙을 기세를 보이자 원로들도 식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원로들이 전대의 고수들이기는 하지만, 천화에게 제압된 이들보다 딱히 무공이 높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내공은 조금 더 높을 수 있어도 육체가 쇠약해진 까닭에, 독을 뿌리고 암기를 던지는 힘과 속도는 그들에 비해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문의 시험에 응해주게. 만약 그것을 통과한다면 당문의 이름을 걸고 무엇이든 한 가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엥?”
당문의 시험? 그런 게 있었던가? 확실히 당문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공표한다면 당문에서도 체면을 차릴 명분이 생길 터였다. 천화가 시험에 통과했고, 그에 따라 당문이 이것저것 양보했다는 모양새를 취하면 되니까. 다만 문제는, 그 당문의 시험이라는 것을 천화조차 처음 들어본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저 늙은 독사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 시험을 통과한 뒤, 천독단을 남은 하나까지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려고? 뭔가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만큼 보상이 매력적이었기에 천화도 고민했다. 어차피 당문의 자존심을 뭉개고 기강을 잡으려고 온 것이긴 하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으니까.
‘응?’
[특수 임무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때, 천화의 눈앞에 임무창이 나타났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임무창의 정보를 확인한 천화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생각지도 못한 꿀이 거기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