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독인지로 (3)2022.03.01.
[이럴 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라니……!]
독룡은 천화의 검에 베이고 짓뭉개져도 금방 회복했다. 아무리 심각한 피해를 입혀도, 심지어는 목을 베어 떨어뜨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완벽한 회복은 아니다. 겉모습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때마다 그 영혼의 일부가 갈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천화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크게 흡족해하고 있었다. 놈에게서 떨어져나온 영혼의 힘이 자신에게 흡수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딱 100번만 더하자. 응?”
당장은 힘의 일부가 회복되는 느낌으로밖에 체감되지 않지만, 사실은 내공이 아니라 영력이 쌓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영력이 쌓이고, 상단전이 활짝 열리게 되면 고대하던 화경의 경지를 맛볼 수 있을 테니까. 천화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 내공에 집착하지 않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초절정 상태에서 더 쌓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은 아직 많았지만, 그 내공을 다시 한계치까지 쌓는다 한들 화경의 경지를 밟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절정에서 초절정으로 넘어오는 것도 그렇지만, 화경을 선택받은 몇몇만이 깨달음을 얻어 이룩할 수 있는 경지라고 부르는 것도 화경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단전의 단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강함은 잘 알았다. 더 이상의 시험은 그대에게 무의미할 것 같군.]
“아니, 그러지 말고 그럼 50번만, 아니 30번만……!”
파앗! 그렇기에 몇 번이고 다시 싸우고 싶어 하는 천화였지만, 독룡에게는 얻어맞기만 하는 취향 따위는 없었다. 설마하니 자신을 이 공간에서 뛰어넘는 인간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탈주를 감행했다.
“하,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어요.”
다시 한 번 하얀 빛이 번쩍거리는가 싶더니 시야가 돌아왔다. 다시 포복 자세로 돌아온 천화의 눈앞에, 통로가 끝나고 나타난 작은 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독룡의 시험이 끝난 것이다. [임무 ‘사천당문의 시험’이 완료되었습니다.] 시스템이 대신하여 천화의 독인지로 완수를 확인해주었고, 천화는 툭툭 옷을 털며 일어난 뒤 정면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 제법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고이 모셔진 검은 구슬이었다. 여의주. 독룡의 여의주가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쀼……!”
그와 동시에 다시 한 번 제 멋대로 아공간을 열고 은룡이 튀어나왔다. 독룡의 여의주를 탐내는 것이다.
“이번엔 안 돼, 임마.”
하지만 이번에는 충분히 예상을 하던 것이기에, 천화가 금나수의 수법으로 은룡을 잡아챘다. 이것까지 은룡에게 내어줄 수는 없었으니까. 남해 수련동에서 발견한 것만큼 커다란 놈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보았을지 모르겠지만, 독룡의 여의주는 무척이나 작았다.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홀로 견디며 점점 힘을 잃어간 것이다. 딱 한 입거리라고나 할까? 이 정도라면 은룡조차 한 입에 꿀떡 삼킬 것 같았기에 녀석을 잡아두고, 독룡의 여의주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걸 먹으면 내공뿐 아니라 영력도 증가하겠지. 잘하면 화경까지도 올라갈 수 있으려나?’
사천당문에서 가지고 나오라는 물건 중 아마 이것이 가장 가치가 큰 것이겠지만, 알게 뭔가? 어차피 저들은 이곳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확인할 능력이 없었고, 일단 소지품창에 넣어버리면 몸수색을 해도 발견할 길이 없다. 때문에 천화는 그것을 당장 먹어치우는 대신 일단 가지고 나갈 생각으로 소지품창을 열었다. 독룡의 여의주에 손을 얹었다.
“어?”
츠츠츠츳! 그때, 독룡의 여의주가 다시 한 번 빛을 내뿜었다. 검은 빛이 번쩍이며 떠오르는가 싶더니 천화의 몸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이여. 나와 그대가 만난 것도 거대한 천명의 일부로구나. 그대에게 지워진 거대한 천명의 일부를 내가 채워주겠노라.]
“이게 뭔 개소리야?”
독룡의 마지막 사념이 말을 걸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놈의 태도가 호의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뭔진 모르겠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지.’
[독룡의 영혼이 당신을 인정합니다.] [극대량의 영력을 흡수하셨습니다.] 천화는 저항하지 않고 그 기운을 받아들였다. 즉시 천화만변무상심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하단전에서 올라온 기운이 중단전과 공명하며 내력이 몸 안을 가득 채운다. 한계라 할 수 있을 만큼 몸 안에 내력이 좁쌀만 한 빈틈조차 없이 채워졌고, 그 순간 상단전이 활짝 개방되었다. 주변의, 외부의 기운들과 공명을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천화는 조급해하지 않고 기운들을 움직였다. 몸 안에 가득 찼던 내공을 거의 텅 빌 듯이 밀어내며 주변에 퍼트렸고, 자연지기와 뒤섞인 기운들을 다시 몸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걸어본 길이기도 했지만, 그가 익힌 심법이 천화만변무상심법이기에 더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었다. 자연지기에 한없이 가까운 기운이기에 내공심법의 특성이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체내와 체외의 기운들이 서로 공명하며 융합했고, 피부호흡을 하듯 그것들을 흡수하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 둘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깨우쳤다. [별호 : 화경을 획득하셨습니다.] 초절정을 넘어, 화경의 벽을 무너뜨렸다. 천하십대초인 중에서도 다섯밖에 이루지 못했다는 꿈의 경지에 그가 발을 내딛은 것이다.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가부좌를 풀고,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올린 천화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제어할 수 없었다. 화경!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꿈의 경지에 오른 것이니까. 전성기 때에 비하면 아직도 모자람이 있지만, 그가 올랐던 현경의 경지는 전설상에나 존재하는 개념적인 경지라고 알려진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백대고수가 아니라, 천하십대고수가 오더라도 그를 어찌하지 못할 터였다. 천화는 그들의 무공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으니까.
“다 죽었어.”
이 상태라면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이, 십만대산에 쳐들어가서 천마를 두들겨 패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그 앞까지 가는 것이 더 문제겠지만, 적어도 일대일 승부라면 천마든 무림맹주든, 소림신승이든 이제 더 이상 천화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게다가 화경의 경지 특성상 조금만 시간을 주면 금방 바닥난 내공도 대부분 회복해버릴 테니, 게릴라전을 펼친다고 생각하면 마교 전체를 상대로 혼자 싸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면 흑막 놀이라도 해봐?”
때문에 천화의 자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아예 미적지근한 마교를 대신해 사건사고를 벌이고, 정사대전을 유도하는 흑막이 되어볼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어? 그러고 보니 이게 남았네.”
독룡의 여의주. 이제 상단전이 활짝 열린 그에게는 그 안에 신묘한 기운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보였지만, 일단 그 작은 구슬 형태의 물건이 손에 남은 것을 인지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설령 섭취한다 해도 아주 작은 내공을 얻을 뿐이겠지만, 이러면 굳이 당문을 속여 빼돌리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좋았어.”
어딘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전낭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얼른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독룡의 여의주가 시선을 강탈하긴 했지만, 그 방 안에는 꽤 쓸 만한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수는 적었지만 가치만으로 따지자면 당문의 보물창고에도 이만한 물건은 없을 만큼 대단한 놈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도 챙겨야지.”
그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은 세 가지였다. 독룡갑, 독룡편, 만독총론. 독룡갑은 독룡의 비늘로 만든 흉갑이었다. 착용하기만 해도 내공을 증폭시켜주고 순환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검기를 막아내고 내공을 주입하면 강기마저 막아낼 수 있으니 가히 신물이라 할 만한 물건이다. 독룡편은 독룡의 힘줄을 꼬아 만든 채찍으로, 지금은 익히는 이들이 많지 않지만 이것을 들고 사천당문에 전해오는 편법인 암룡편법을 사용하면 능히 천하를 논할 수 있다는 전승까지 전해져오니, 이 또한 범상한 물건은 아니었다.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독총론은 독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았다 이야기하는 서책이었다. 물론 이전 세대에서 독을 다루는 기술이 더 발전되었다 여겨지기는 하지만, 만독총론에는 지금 세대에 전해지지 않는 특별한 독들에 대한 정보들도 담겨있었기에 당문에서 연구한다면 새로운 독들을 꽤나 많이 만들어낼 수 있겠지. 하나같이 세상을 진동케 할 물건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당문의 손에 들어간다면 당문의 위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지겠지. 게다가 이곳에는 당문조차 지금은 구하지 못하는 독초와 영초, 독물들이 가득했다. 본래대로라면 모조리 시들고 굶어죽었어야 할 테지만 독룡의 여의주가 흘려내는 기운 덕분에 아직까지는 제법 파릇파릇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독룡의 여의주가 사라졌으니 이제 서서히 시들고 말라죽겠지만, 그 전에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 꼴은 못 보지.’
당연하게도 천화는 이 모든 것들을 순순히 당문에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일단 모든 것들을 소지품창에 옮긴 뒤, 당문에 전해줄 것을 추렸다.
“흠, 없네?”
막상 주려니 아깝다. 줄 만한 것이 없었다. 독룡의 여의주야 가치가 거의 없어졌으니 줄 수 있지만, 나머지는 글쎄. 마교와의 일전에서 써먹으려면 만독총론 정도는 전해주는 것까지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독룡갑도, 교룡편도 꽤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이제 이전처럼 속옷만 입고 덜렁거리며 돌아다녀도 별로 무서울 게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템빨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 독룡갑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전투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며, 교룡편은 굳이 당문의 암룡편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굉장히 위력적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어디서든 사용하는 순간 당문이 의심을 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화경에 만독불침까지 이룬 이상, 당문 따위는 이제 귀찮은 놈들일 뿐이다. 하지만 차후 마교와 일전을 벌일 때 뒤에서 장난질을 치면 꽤나 귀찮아지겠지.
‘아오, 대체재만 있었어도 그냥 다 조지는 건데.’
사천당문이 자신들의 경쟁자를 가만 두지 않고 어떻게든 집어삼키거나 망하게 만들어버린 까닭에, 당금 무림에 당문을 대체할 독을 다루는 문파가 없다는 것이 한이었다. 무신지로에서는 고인물 중 하나가 만든 ‘고인독’이라는 문파가 있어 마음 놓고 쥐어팼었는데.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거라도 줘야겠군. 싫다고 하면 좋아하게 만들어주든가.”
결국 천화는 독룡의 여의주와 교룡편, 만독총론을 골랐다. 독룡갑도 보여주기는 하겠지만, 이번 임무의 보상으로 독룡갑을 요구할 작정이었다. 거절은 거절한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시든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먼저 어긴 것은 당문 쪽이 되니, 그다음부터는 자신도 마음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일단 여길 나가야겠군. 시간이 얼마나 지났으려나.”
금방 다녀오겠다고 했던 약속과 달리 독룡과의 전투에 꽤 시간을 소모했지만, 그래도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심상세계는 꿈과 같아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지만 찰나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다.
“여길 부수면 되는 거였지?”
이미 나가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머리 위. X자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을 부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곳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천화도 알지 못했다. 무신지로에서는 이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들어왔던 곳으로 자동 이동되니까. 허나 이제는 그런 편의 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위에 무엇이 있을지도 궁금했다. 나름대로 무형신보를 펼쳐 꽤나 멀리 달려오지 않았던가?
“후읍.”
콰앙!! 굳이 무기를 사용할 것도 없었다. 이미 화경의 경지에 오른 천화의 주먹질은 그 어떤 둔기보다도 강한 충격량을 자랑했으니까. 주먹에 부딪힌 바위가 잘 익은 수박처럼 간단히 부서졌고, 천화가 궁금해하던 ‘바깥’의 정체가 드러났다.
“우라질.”
콰르르륵!!! 황당해하는 천화의 머리 위로 측정할 수 없는 대량의 물이 쏟아졌다. 우물이나 호수. 아무래도 그쯤 되는 것이 아닐까? 끝을 모르고 쏟아진 물은 그대로 천화와 함정들을 쓸어버리고 처음 들어왔던 입구까지 밀어냈다. 아무래도 이것이 처음 들어왔던 입구로 자동 이동되던 이유였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