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마! 이게 화경이다! (1)2022.03.06.
화령검왕이 죽은 일 자체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그를 대체할 누군가가 없다면 모를까, 그만한 고수는 제법 많았고 천화 자신 역시 당장 그를 뛰어넘었으니까. 하지만 염려가 되는 것은, 뒤틀린 미래였다. 무신지로에서는 화령검왕이 대막으로 향하는 일도,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던 것이다. 제2차 정사대전에서 한몫을 해주어야 했을 화령검왕이 죽은 것으로 인해 또 어떤 미래가 바뀔 것인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죽었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한 달이 넘도록 행방불명이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뭐.
“그래서, 조사단에 합류하라?”
“예. 백연 대사께서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전권을 주시겠답니다. 조사단을 이끌고 대막으로 향해 화령검왕의 행방을 조사해주십시오. 조사단의 인원과 필요한 물자는 정파 연합에서 준비할 겁니다.”
이후 전령이 전한 이야기는 간단했다. 사절단의 일부의 주검이 확인 되었고, 화령검왕의 생사가 불분명하니 조사단을 이끌고 대막으로 향해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조사해달라는 것이다. 심지어 조사단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면서.
“싫은데요.”
“……예?”
하지만 천화는 거절했다.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그걸 받아들이겠나? 화령검왕의 행방불명 소식은 분명 흥미로웠지만, 흉수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위험과 불편을 무릅쓰고 대막까지 찾아갈 일은 아니다. 한서불침에 이르면서 대막의 더위도 큰 문제가 되지는 못하지만, 제대로 된 도시가 없는 동네이다 보니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 불편한 생활이 예상되는 것이다. 뭐하러 그런 곳에 자진해서 들어가겠나? 지원금? 그 몇 푼 안 받아도 상관없다. 당장 만금상단에 일을 연결해주고 받기로 한 돈만 해도 어지간한 상단의 연간 수입에 맞먹었고, 중원에서 할 일도 차고 넘쳤다. 돈을 벌 일도, 쓸 일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상했다.
“싫다고요.”
“그래도 백연 대사님의 부탁인데…….”
전령은 정파 연합의 수장 역할을 맡고 있는 백연 대사의 부탁을 천화가 이처럼 매정하게 거절할 줄 몰랐던지 믿기 어려운 눈빛을 했다. 백연 대사가 누군가? 정파 연합을 차치하고라도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방장이 아닌가? 그런 이가 특별히 부탁한 것을 고작 후기지수 따위가 거절한다고? 이렇게 매몰차게? 정파인이라면 최소 고민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왜 저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전권을 주겠다? 저는 고작해야 후기지수 아닙니까? 더 강하고 믿을 만한 인물들도 많을 텐데, 사표까지 낸 사람한테 왜 질척거려요?”
의아해하는 전령하게 천화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정파 연합에도 사람이 많지 않은가? 공을 탐내는 후기지수들도 얼마든지 있고, 실질적인 무력을 담당하는 지무단에 소속된 고수들도 차고 넘쳤다. 화령검왕만큼은 아닐지라도 백대고수급은 널려있으니 그중 적당히 골라잡아 보내면 될 것이지, 왜 자신을 귀찮게 군단 말인가?
“질척이라니, 그 무슨 막말을……!”
가만히 생각하니 살짝 열이 받기까지 했다. 빤히 귀찮은 일이 마구 생길 것이 보이는 일이었으니까. 복수가 아닌 조사이니 그 임무 난이도가 낮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얽히게 되면 한바탕 드잡이질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백연이 알고 있는 천화의 무위는 높게 잡아도 초절정이 아닌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막 초절정의 경지에 발을 딛은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텐데, 이 같은 일을 맡긴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꾸려보겠다는 조사단원들도 최소 절정에서 최절정, 어쩌면 초절정 수준의 고수가 끼어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될 경우, 아무리 전권을 위임 받았다지만 사소한 시비가 붙을 것이 불 보듯 뻔할 텐데,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은 생각에 짜증이 치솟았다.
“아무튼 안 해요. 알아서 잘들 해보라고 전해주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엎어버리고 정사지간을 선언할까도 생각한 천화였다. 만약 그가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문이 돈다면, 또 다시 정파의 여러 문파와 세력들이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귀찮은 일들을 벌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믿지 못했는데 정말 이렇게 나오시는군요.”
“뭐요?”
그 꼴을 보느니 건드리면 다 뒈진다고 선언하고 독보강호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령이 한숨을 푹 쉬며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저 말은, 천화가 거절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 따위 제안은 왜 한 거지? 간이라도 본 건가? 의뭉스런 눈초리를 띄고 있을 때, 전령은 품 안에서 봉인된 서찰을 꺼냈다.
“그거……?”
그 봉인의 인장을 확인한 천화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아주 극소수만 알고 있는 인장이었으니까.
“신승께서 전해주신 서찰입니다. 진룡무쌍이 거부하거든 꼭 전하라 이르셨습니다.”
‘신승이라…….’
천화가 그것을 마지못하는 척 받아들었다. 백연 대사의 서찰이면 아예 받지도 않았을지 모르지만 신승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천화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인물이니까. 천기를 읽어 미래까지 내다보는 인물이었으니 뭔가 중요한 것이 적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봉인을 뜯고, 내용을 살폈다.
“하……. 이거 참.”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대막으로 가라는 것. 허나, 다른 것이 있다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함께라는 것이었다. [만약 자네들이 대막으로 향한다면,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혈마에게 찍힌 무림공적의 낙인을 지워주겠네.] 다른 이들이 말했다면 개소리로 치부했을 터였다. 오히려 설영이 혈마의 후예라는 것을 밝히겠다는 협박으로 받아들였을 터였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소림신승의 말이다. 소림 방장보다도 더 권위를 인정받는 그의 호언장담이니, 혈마의 명예를 되찾아주지는 못하더라도 무림공적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는 있겠지. 무당파를 비롯해 오래도록 혈마와 그 후예들을 핍박해온 대문파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후예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혈마신공 자체는 마공이나 사공이 아닌 온전하고도 무결한 무공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수는 있을 터였다.
“…….”
하지만 신승이 이런 제안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천화가 몇 번이고 서신을 다시 읽으며 말을 아꼈다. 그동안 설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을 텐데도 보지 못한 척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말이나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천화의 결정에 영향을 줄까 봐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천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내색하지 않았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맡아보죠.”
“그럼 준비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디든 머물고 계신 곳으로 사람이 갈 겁니다.”
“대신, 신승께서도 꼭 약조를 지켜달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전령와의 밀담은 거기서 끝이 났다. 천화의 대답을 들은 전령은 대답을 전하기 위해 사라졌고, 방안에는 천화와 설영만이 남았다.
“천화. 나 때문이라면…….”
“아니. 신승이 이런 제안을 할 정도라면 분명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십대고수 중 한 명이 사라진 일이라면 나도 좀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도 고마워.”
계획에 없던 대막행이 결정되었다. @ 굳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기에, 천화는 독인지로의 끝에서 찾은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 인근 객잔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문에서 힘을 쓴 것인지, 객잔은 그들을 귀찮게 할 만한 다른 손님들은 전혀 받지 않았고 천화와 설영은 간만에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설영은 뒤늦게 천화가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흠짓 놀랐지만, 허탈해하기보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자신 역시 무공 수련에 열을 올렸다. 혈마신공 자체가 종국에는 상단전을 열어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무공이니 내공을 충실히 쌓고, 제대로 단련한다면 설영 역시 화경에 이를 수도 있겠지. 아직은 요원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설영의 무공 수련을 봐주며 칠주야를 보내고 났을 때, 전령이 다시 그들을 찾았다. 전권을 위임 받은 조사단장이 이곳에 있으니 다른 이들 역시 이곳으로 모이게 했으며, 사천당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정에 필요한 물품들도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였다.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라고요?”
출발은 다음 날.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모이기로 했다는 일행들의 명단을 받아든 천화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구파에서 네 명. 오대세가에서 한 명. 그리고 모산파에서 세 명. 그들의 이동과 편의를 도울 표사들도 십수 명이 붙었다. 일반 문파의 무인들도 끼워넣을 수 있었지만, 사막이라는 특성과 그곳에 있는 이들을 생각할 때 차라리 무공이 높은 소수 정예로 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누구 복장 터트릴 일 있나.”
하지만 천화는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지리도 말을 안 들을 것 같은 놈들만 모아 놓은 것이다. 누구 화병 걸리는 꼴 보려고 이러는 건가?
‘당문이야 이제 말 잘 듣는 똥개가 됐다지만.’
그중 독과 질병의 치료 따위를 생각한 것인지 사천당문의 소가주인 당문악을 끼워넣은 것은 문제가 없다. 녀석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이제 당문이라면 자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나머지 놈들은? 모산파야 술법을 주로 사용하는 포달랍궁과 마라혈교를 견제하기 위해 끼워넣은 것이니 상관없다지만, 나머지 넷은 분명 은근히 자존심 싸움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이놈들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헛짓거리를 할 텐데.’
자존심 강한 네 명의 고수들. 천화를 초절정 고수라 알고 있더라도 그들 중 후기지수급은 한 명도 없었으니, 지지리도 말을 안 들어 처먹을 것이 뻔했다.
‘기강 한 번 잡고 가야겠군.’
이런 식이라면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식대로 처리하고 이끌어가는 수밖에. 차라리 당문에서 자신이 화경에 올랐다는 사실을 소문내주었다면 일이 편해질 수도 있지만, 그놈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 자신들이 당한 만큼 남들도 당해봐야 한다고 생각할 놈들이니까. 결국 명단을 보며 참여자들의 정보를 떠올린 천화는 적당히 하루를 보내다가 설영과 함께 집결지로 향했다.
“늦었군.”
“과분한 자리를 맡았으면 미리미리 와서 준비하고 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은…….”
제 시간에 맞춰나온 천화였지만 그를 보자마자 이런저런 불만들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조사단장이라는 자리를, 그저 자신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자리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천하십대고수인 화령검왕의 행방을 조사하러 가는 인원들인 만큼 구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이 모인 까닭이다. 하나같이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으며, 배분이 낮은 자도 없다. 따라서 천화를 조사단장에 세운 것도, 자신들 중 누군가가 그 자리에 서면 나머지 인물들이 자존심 상해할 것을 우려하여 허수아비를 하나 세웠다 여기겠지.
“지금 그게 무슨……!”
“괜찮아, 괜찮아.”
그 말에 설영이 먼저 발끈해서 나서려 했지만, 천화가 그녀를 제지했다. 어차피 지루한 말싸움을 해봤자 저것들이 들어먹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흥. 그래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는 놈은 아닌 것 같군.”
“아해야. 전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저들이나 잘 챙기거라.”
“성심을 다해 보필하면 이번 행보가 끝날 때쯤 한자락 배움을 전해주도록 하지.”
“뭣 하느냐? 어서 움직이거라!”
그 반응을 곡해한 구파의 고수들이 묘한 비웃음을 흘렸다. 천화가 자신들과 같은 경지라는 것은 전해들었지만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에게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당금 무림에 초절정의 고수가 일백은 족히 됨에도 그 사이에는 현격한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들은 백대고수의 반열에 들기는 했어도 천하십대고수라 불리는 이들 중 말석에 오른 이들과는 큰 차이가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십대고수들 중에서도 화경에 이른 이들은 고작해야 다섯에 불과하고, 그중 하나인 독왕은 독과 암기술을 높게 평가 받아 그 자리에 올랐을 뿐, 순수 무공만이라면 결코 자신들의 위일 수 없다고 생각하던 터였으니까.
“자, 할 말들은 다 끝나신 거죠?”
그런 그들을 향해 천화가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들의 태도와 입장을 확인했으니, 이제 자신의 뜻대로 판을 뒤엎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