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포달랍궁과 마라혈교 (1)2022.03.15.
‘마라혈교인가?’
서둘러 출수하며 적들을 쓰러뜨리는 천화와 달리, 뒤늦게 나타난 이들은 누구를 상대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모두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포달랍궁과 마라혈교. 대막을 거점으로 삼는 두 집단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이다. 당장 술법 따위를 잘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무공의 형태 또한 크게 다르다는 느낌이 없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포달랍궁은 강시를 다룬다는 것이고, 마라혈교는 피를 이용한 술법으로 대상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저기, 저기, 저기, 저기! 맡으세요!”
그렇기에 천화 대신 설영이 구파의 고수들을 통제했다. 설영의 혈마기가 피의 주술을 사용하는 마라혈교의 수법들에 반응하는 것이다. 설영 역시 그들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확연히 이질적인 기운을 다루고 있었기에 즉시 판단을 내렸다. 그들이 상대를 해주어야 할 강자들을 짚어내었고, 구파의 고수들도 일제히 몸을 날렸다.
“소저의 판단이 맞기를 바라지!”
“그럼 이들을 부탁하네!”
구파의 고수들이 사라지고 설영과 당문악, 모산파의 세 고수들이 남았다. 설영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이었기에 설영은 자연스레 그들을 보호하는 위치에 섰다. 그들도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이들이지만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 수 없으니까. 일단 방어를 굳히고, 차근히 주변부터 도와나가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상한데…….’
그 사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마라혈교의 무리들을 쓰러뜨리던 천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으니까.
‘너무 약해.’
물론 천화의 기준에서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상대할 만한 화경급의 고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초절정급의 고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라혈교는 물론, 포달랍궁도 상황이 비슷했다. 이들의 전력은 이 정도가 아닐 텐데? 외부에서 부딪힌 것이라면 모를까, 본진까지 쳐들어올 정도라면 작정을 하고 섬멸전을 벌인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양쪽 모두 힘이 부족해 보였다.
‘어디 갔지?’
당장 천화가 알고 있는 얼굴들, 각 세력의 수장과 정예급의 인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탓에, 혹여 함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더러운 마불들 같으니! 이젠 중원의 종자들까지 끌어들인 것이냐!”
“멍청한 중원의 개들아!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컥!”
“뭐래는 거야? 짝퉁들이.”
천화와 구파의 고수들이 나서자 전황은 급격히 기울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포달랍궁의 최정예가 나서지 않아 간신히 균형을 이루거나 약간이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나서자 최고수들의 균형이 깨어진 것이다. 절정급의 무인의 차이 정도였다면 어떻게든 비벼 보았겠지만, 최상승의 고수들에서 격차가 나니 상황은 극적으로 뒤집어졌다. 당장 천화 혼자서도 마음만 먹는다면, 시간만 충분하다면 저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지경이었으니까.
“퇴각! 모두 퇴각하라!”
“부교주님, 하지만……!!”
“이대로는 개죽음뿐이다. ……도 중요하지만 교도들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퇴각! 여기는 내가 막겠다. 모두 퇴각하라!!!”
그러자 상대도 제법 기민하게 대처했다. 천화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고수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즉시 퇴각을 명령한 것이다. 포달랍궁의 본진에 쳐들어올 정도라면 어쨌든 양패구상까지 작정을 하고 덤빈 것이겠지만, 개죽음은 사양이니까. 놈들이 온갖 술법을 부리며 시야를 어지럽히고,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그 사이 몇몇의 고수들이 뒤쫓는 포달랍궁의 고수들을 막아서느라 희생되었지만, 최대한 많은 교도들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어째서 쫓지 않는 것이오!”
“저희가 왜요?”
그들을 여기서 뿌리 뽑고 싶었는지 포달랍궁의 한 인사가 천화에게 성질을 부리며 추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천화는 단호했다. 도와준 것을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성질이야?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아직 정확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기에 굳이 무리해서 쫓지 않은 것이다. 천화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한들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천화는 포달랍궁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이 대막의 패자가 되는 것은 그리 원하지 않았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마라혈교의 교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 같고요.”
“크흠……!”
천화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싶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자신들을 바깥으로 꼬여내고 혈교주가 난입을 하거나 기습을 해온다면 피해가 클 테니까. 그렇기에 천화가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리한 요구인 것도 사실이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쫓지 마라! 진법을 정비하고 다친 궁도들을 수습하라!”
결국 포달랍궁도 추격을 포기했다. 이대로 추격을 한다 한들 천화 일행이 돕지 않으면 우위를 점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방어를 굳히고 이후를 도모하는 것이 나았다.
“중원에서 왔다고 했소?”
“예. 정파 연합에서 왔습니다. 일전에 이곳으로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는데, 혹 만난 적 없으십니까?”
“사절단? 들어본 적 없군. 이곳을 찾지 못한 것 아닌가?”
천화는 일부러 슬쩍 떠보았지만 놈은 넘어오지 않았다. 정말로 들어본 적 없다는 듯, 표정의 변화나 기운의 들뜸도 전혀 없이 태연하게 대꾸한 것이다.
‘진짜 못 만난 건가?’
이곳까지 보내면서 포달랍궁과의 접선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을 리도 없으니, 도착하기도 전에 변고를 당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포달랍궁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어쨌든, 조력에 감사하오. 허나, 보다시피 상황이 이러하니 나중에 다시 와줬으면 좋겠는데.”
“궁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사절단이 도착하지 못했다니 저희라도 인사를 드려야 할 듯한데요.”
“궁주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시오. 내부의 행사가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우셨소.”
천화가 궁주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이기는 했다. 그는 무려 화경의 고수이니까. 마라혈교에서도 교주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처럼, 포달랍궁에서도 궁주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궁주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워낙 주술적 의식들을 많이 치르는 이들이니 어딘가에서 또 뭔가 의식을 치르는 중인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틈을 노리고 마라혈교가 쳐들어 온 듯했다. 정보가 샌 것인지, 첩자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궁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조차 감추고 외려 천화 일행이 빨리 이곳을 떠나주기를 원하는 놈들에게는 더 이상 신경을 쓰기 싫었다. 충분한 힘이 없었다면 그 태도 때문에라도 진작 멸망했을 놈들이 포달랍궁이라는 것을 알기에, 천화는 부글부글대는 속을 부여잡고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사절단이 이곳에 온 적도, 만난 적도 없다고는 했지만, 나름대로 대막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이니 의심 가는 것 정도는 말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천화는 그들이 당한 흔적과 여러 정황들을 늘어놓으며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다행히 그들은 그 말에 진지하게 고민을 해주었고, 한 가지 단서를 전해주었다.
“……학살이요?”
“그렇소. 최근 사막의 일부 소수 부족과 마을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저 빌어먹을 혈교 놈들인가 싶어 우리도 나서서 확인을 해보려 했으나, 재빠르게 도망 다니는 까닭에 발견하지 못했소. 흑풍사라는 비적 떼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희생당한 이들이 목내이가 되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기에 혈교 놈들과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 본 궁에 여유가 생기는 대로 놈들을 조사해 대가를 치르게 해줄 생각이었다오.”
‘목내이!’
그들 역시 흑풍사를 지목하고 있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흑풍사가 익힌 무공이 상대를 목내이로 만드는 종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이라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무공이나 술법이라면 이 근방에서는 마라혈교 정도가 사용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들과 흑풍사가 손을 잡았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붉은 머리의 무인과 무리는 마라혈교의 숨겨진 고수쯤이었던 것일까? 사람의 피를 이용해 술법을 강화하거나 무인의 능력을 강화하는 일종의 강체술을 주로 사용하는 놈들이니만큼 마라혈교가 가장 유력한 흉수였지만, 흑풍사도 조사해볼 필요는 있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결국 천화와 일행들은 어쩔 수 없이 포달랍궁을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저들은 궁의 주변을 두르고 있던 진법을 파괴한 것에 대해서는 별반 문제 삼지 않았다. 애초에 정파 연합에서 포달랍궁을 포섭하려던 이유도 마교를 상대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편에 서서 중원 침공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사절단의 역할까지 대신해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궁주를 대면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저들이 궁주가 돌아왔을 때 상황을 전할 것이기에 적당히 은혜는 입힌 셈이니까.
“어쩔 셈이야?”
“일단 조져보면 뭐가 나오겠지.”
그렇게 포달랍궁을 돌아나온 천화는 다음 행선지를 확정했다. 바로 흑풍사의 본거지. 사막의 이곳저곳을 털어먹고 다니는 비적 떼라지만 거점은 분명히 존재했고, 천화는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정말 그들이 마라혈교와 붙어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박살을 내놓고 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나? 설령 관계가 없더라도 또 다른 단서를 얻거나 용의집단을 하나 지워버리는 일이니 나쁠 것은 없었다. 즉시 방향을 잡고 흑풍사의 거점을 향해 이동했다.
“모두 정지.”
흑풍사의 거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막 한가운데에 버젓이 객잔 같은 건물을 크게 지어두었으니까. 그들이 약 삼백 장 가까이까지 왔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그들이 오는 것을 알고 모두 도망을 친 것일까?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기에, 천화는 모두를 잠시 멈춰 세웠다.
“지뢰진.”
쿠웅!!
천화가 흑우에서 내리더니 대뜸 발을 굴러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철컹 철컹 철컹! 그와 함께 모래가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나아갔다. 모래 아래 교묘하게 파묻어둔 덫들이 튀어나왔고, 그와 함께 매복하고 있던 흑풍사 놈들이 튀어올랐다.
“헛?”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구파의 고수들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초절정 고수인 그들의 감각까지 속인 채 숨어있던 것이다. 만약 이대로 진입하다가 저 매복에 걸렸으면? 아무리 무공의 격차가 난다 한들 상처를 입었을 확률이 높았다. 자신들의 무공을, 반응속도를 믿기에 치명상까지 입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상처에 독이라도 파고 든다면? 독인의 경지에까지 오른 당문악이 있다지만, 처음 보는 독을 해독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수 있었다.
“이제 가지.”
그렇게 모두가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천화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다시 흑우의 등에 올라탔다. 모랫바닥에서 튀어나온 자들은 이미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터였고, 그 정도 시간이면 거점 안에 있는 놈들을 모두 처치한 후일 터였다. 한 칼씩 먹여 숨을 끊어놓는 대신 일단 건물로 들이닥쳤다.
“웬 놈들이냐!!”
“포달랍궁인가? 아니면 마라혈교?”
“어? 복색이 다른데요? 중원 놈들인 것 같습니다!”
천화가 일으킨 지진 때문일까? 안에서도 곧 반응이 왔다. 그들이 누구인지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이었지만 곧 대처를 마쳤다.
“뭐야 이거?”
건물에서 우르르 쏟아져나온 그들을 보며 천화가 인상을 구겼다. 놈들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흑풍사의 모습이 맞았다. 분명 맞는데, 뭔가 이상했다.
“너네 대체 뭐냐?”
천화가 냉랭한 목소리로 놈들을 추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