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포달랍궁과 마라혈교 (2)2022.03.17.
‘이게 흑풍사라고?’
거점을 공격당해 몰려나온 것치고는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놈들이 붕대를 치렁치렁 감고서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대체 이 사막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사이 협객이라도 다녀간 건가?
‘붉은 머리는?’
천화가 미간을 좁히며 빠르게 놈들을 훑었다. 기감으로 일대를 뒤덮으며 소문의 붉은 머리를 찾았다.
‘없다?’
소문의 붉은 머리는 보이지도, 감지되지도 않았다. 이미 화경에 이른 천화의 기감은 같은 화경의 경지가 아닌 이상 속일 수 없었다. 헌데 그 어디에서도 붉은 머리로 보이는 이의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더불어, 있어야 할 다른 기운들도 느껴지지 않았다.
“흑풍은 어디 있지?”
“……대장을 찾아오셨습니까?”
그 말에 흑풍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뜸 공격을 하는 대신, 자신들의 수장의 이름을 대며 찾자 한 가닥 희망을 본 것인지도 몰랐다.
“흑풍 어디 있냐고.”
“그것이……. 으흐흑! 으허허헝!!!!”
“뭐, 뭐야?”
다시 한 번 되묻자 놈들이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천화 일행을 흑풍의 친구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거의 대성통곡이다. 이쯤 되니 천화마저 당황스러울 정도. 이것도 자신들을 속여넘기기 위한 연기가 아닐까 의심을 했지만, 곧 눈물 콧물을 짜내며 목소리를 내는 놈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허헝! 그, 빨간 놈이, 허흑! 대장, 흑! 우리, 이용! 흐허허허헝!!!”
물론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
잠시 후,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천화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일단 최근 사막 부족들을 약탈하고 학살한 것은 그들이 맞았다. 또한 화령검왕을 죽인 것도 이들이었다. 정확히는 어느 날 쳐들어와 그들을 제압하고 부려먹은 붉은 머리의 괴인과 그 수하들이 한 짓이었다. 그들이 사막 부족들을 학살한다는 소식을 들은 화령검왕이 사절단을 이끌고 그들을 처단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흑풍사를 이용해 화령검왕과 사절단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붉은 머리가 직접 화령검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홍사산까지 추격하여 목숨을 거둬간 것이다. 그에게 당한 이들은 전신의 피가 빨려 목내이처럼 변한다고 먼저 말을 꺼내니 신빙성은 더욱 높아졌다.
“마라혈교인지는 모른다?”
“예. 피가 빨리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본 적 없는 무공이었습니다. 생김도 그들보다는 무림인에 가깝기도 했고요.”
다만, 붉은 머리와 수하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 힘에 굴복하여 명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들이 한 번도 자신들에 대해 밝힌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무공의 특수성 때문에 마라혈교일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라혈교의 놈들과는 그 생김이나 무공을 펼치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홀연히 사라졌다라…….”
그리고 지금 그들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의 쓸모가 다했다고 여긴 것인지, 기존 대장이었던 흑풍과 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을 죽이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던 이들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그렇기에 지금 이곳이 비적 떼의 소굴이 아닌, 병상처럼 변해있다는 것이다. 이미 정예들이 모두 죽어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기에 천화 일행들이 단숨에 매복을 뚫어내자마자 항복을 한 것이고. 황당한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무신지로에서는 단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이지?’
천화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붉은 머리라는 놈이 화령검왕을 압도하는 강자라는 말이니까. 어쩌면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인물인지도 몰랐다. 무신지로에서 화경의 경지에 올랐던 인물은 자신이 모두 꿰고 있건만, 그런 인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대체 이건 어디서 튀어나온,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 놈들이지? 행방이라도 안다면 추적을 해보겠건만, 어느 날 흑풍사의 대가리들을 몽땅 죽이고 사라져버렸다니 찾을 방도가 없었다.
“아! 얼굴을 가리고 있긴 했는데, 놈을 따르는 자들의 나이가 상당히 어려 보였습니다. 그에 맞지 않게 무공은 엄청나게 강했고요. 일류 이하의 수준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어려?”
그나마 단서가 있다면 붉은 머리를 따르는 이들 중 대다수가 어리다는 것이다. 그저 그래 보이는 것뿐일 수도 있지만, 기억해 둘 만은 했다.
“이제 어쩔 셈인가?”
흑풍사는 이미 투항하여 무기를 버리고 꿇어앉아있었다. 이들이 흉수라는 것을 알았으니 마땅히 중원으로 끌고 가야하겠지만, 그들만 데려가는 것은 그리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구파의 고수들도 알고 있었기에 천화의 의중을 넌지시 물었다. 이들이라도 잡아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더 조사를 해볼 것인가.
“어쩔 수 없네요.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점심을 먹은 후 중원으로 돌아갑니다.”
“……알겠네.”
천화의 결정에 구파의 고수들도 군말 없이 따랐다. 화령검왕을 죽인 진짜 흉수가 누구인지 그들도 더 조사해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천화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화령검왕은 결코 만만한 이가 아니었으니까. 자신들 넷이 함께 덤빈다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는 있겠지만 승부를 장담하기는 어려울 만큼 강력한 무인이었다. 천하십대고수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를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죽인 이를 쫓는다 한들, 죽이거나 제압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미 사라져버린 그들을 시간을 더 들인다고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저놈들의 금제는 맡기죠. 저녁은 알아서 할 테니 제 방에는 아무도 올라오지 마십시오.”
조금은 안도하며 긴장을 푸는 일행들을 보며 천화가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설영과 함께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올라갔다. 표사와 쟁자수들이 그 둘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뭐해? 얼른 와.”
“응? 너……?”
방으로 올라간 천화는 즉시 창문을 열어젖혔다. 모래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기파를 이용해 밀어내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어차피 아래층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니 상관없다. 천화는 방 안에 머무는 척, 흑풍사의 거점을 탈출해 어딘가를 향해 달렸다. @
“대체 어딜 가는 거야?”
흑풍사의 거점을 빠져나온 천화는 말없이 한참을 달렸다. 생각에 잠긴 듯한 그 모습에 설영도 한동안 말을 걸지 못했지만 일각, 이각, 반시진이 지나도록 달리기만 하자 답답했는지 말을 건넸다.
“마라혈교.”
“뭐? 그럼 왜 둘만 가는 거야? 구파의 분들이라도…….”
“그 노친네들이랑 움직이면 일이 복잡해져. 어차피 전면전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래.”
천화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놀라웠다. 포달랍궁보다는 약체라고 평가되어 세외사궁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들의 본진에 쳐들어 갈 만큼 강한 힘을 지닌 것이 그들이 아닌가? 그런 곳을 단둘이서 쳐들어간다고? 아무리 전면전을 펼칠 것이 아니라지만, 이미 한 차례 격돌하기도 했으니 그들이 자신들을 발견한다면 무조건 싸움을 걸어올 게 뻔했다. 물론 둘 다, 누가 나타나든 스스로 몸을 빼낼 만한 실력은 있다. 그렇다 해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설영은 천화를 믿었다.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하기는 해도, 천화가 틀린 판단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더구나 이제 의미 없다고는 해도, 혈마의 복권을 위해 이번 임무도 맡아준 것이 아니던가?
“다 왔다. 이쪽이야.”
“……?”
허나 그 믿음이 흔들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천화가 다 왔다며 가리키는 장소는 다름 아닌 개미지옥이라 불리는, 모래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곳이었으니까. 설마 이 또한 포달랍궁처럼 진법이나 술법 따위로 눈속임을 한 것일까? 슬쩍 발을 가져다 대 보니 발이 쓸려가는 느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혈마신공을 익힌 자신에게는 애초에 환술이나 진법 따위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건 진짜였다.
“빨리 와. 나 먼저 간다?”
푸욱! 그 기묘한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을 빼는 동안, 천화는 아예 개미지옥의 중심으로 뛰어내렸다. 단숨에 허리까지 쑥 빠지는가 싶더니 계속해서 땅으로, 땅으로 빨려들어갔다. 설영에게 얼른 오라 손짓을 하면서.
“에잇!”
그 또한 환상이 아닐까 잠시 고민했지만, 여차하면 혈마기를 폭사시키고 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면 될 터였다. 설영도 눈 딱 감고 개미지옥 속으로 뛰어내렸다.
“푸하!!”
잠시 후, 몸이 땅속으로 쑥 꺼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돌아온 설영의 눈에 보인 것은 어두컴컴한 동굴이었다. 널찍널찍하게 횃불이 비치되어 있어 간신히 어둠은 면하고 있는 어두운 지하 동굴.
“……어? 여긴 뭐야?”
지하에 이런 동굴이 있다고? 그걸 천화는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역시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천화가 의도해서 들어온 만큼 이곳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마라혈교와 관련이 있는.
“여기? 뭐였더라. 혈신전이라고 부르던가?”
천화는 별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굉장했다. 혈신전이라면 마라혈교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본거지, 그 중에서도 아무도 본 적 없다는 성역이었으니까. ‘교’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들 역시 어떤 종교를 믿는 단체였고 그 종교의 성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가 혈신전이라고?”
그렇다는 곳은, 이곳에 마라혈교의 정예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인 설영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발각된다면 큰일이었으니까.
- 어쩌려고 그래? 확인만 한다면서.
다행히 그 소리에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이번에는 전음으로 천화에게 물었다. 전면전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서 놈들의 중추까지 들어왔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괜찮아, 괜찮아. 여기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거든. 나름대로 성역이니까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거지. 원래 입구가 여기도 아니고.”
그러나 당황해 눈만 껌벅거리는 설영을 향해, 천화는 걱정 말라는 듯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성역은 그야말로 특별한 곳이고, 특별한 지위를 가진 이들만 출입하거나 머물 수 있는 곳이니까. 그만큼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잠입하기에는 딱 좋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거든.”
“잠입? 으흠…….”
그래도 소란을 피울 생각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아무리 천화가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세외사궁인 포달랍궁을 위협할 만한 집단인 마라혈교와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으니까. 그 말에 설영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화의 뒤를 따랐다. 그녀로서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느 쪽이 입구이고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쪽인지 알 수 없었기에 천화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렇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정말 마라혈교를 나타내는 상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배 안에 든 불꽃을 형상화한 마교의 상징과 달리, 그들은 성배 안에 붉은 피가 찰랑거리는 상징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설영의 긴장을 더욱 높여주었지만, 천화는 마치 제 집안을 돌아다니듯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기운을 갈무리해 자신를 감추고 기감을 넓혀 상대가 접근하는 것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지만,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거침없는 행보였다.
- 천화, 이 뒤에……!!
그리고 마침내,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통로를 전부 가로막는 철문 뒤에 상당한 기운을 가진 이들의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끼이익- 허나, 천화는 망설이지 않고 그 문을 열었다. 설영도 알아차린 다른 이들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웬 놈들이냐!”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지?!”
“야, 잠입이라며!”
바로 반응하는 마라혈교의 고수들. 설영도 뭔가 억울해져 소리쳤지만, 그 순간 천화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잔상을 남기는가 싶더니, 기도 중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놈들을 벌써 베고 있었다.
“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는 무인들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천화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검을 집어넣으며 설영을 바라보았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잠입이지, 뭐.”
설영에게 잠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