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포달랍궁과 마라혈교 (3)2022.03.20.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문이 열리는 순간, 적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목을 따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천화가 그러지 않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역시 좀 이상하네.”
“뭐가?”
“보통 이 정도면 몇 놈쯤 더 나타나야 하거든.”
이곳 성역에 머무는 이들의 경우, 술법가들이 중심이기에 육체적 능력이 형편없어서 여유를 부린 것도 있지만 일부러 반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헌데, 반응이 없었다. 너무 빨리 죽인 것일까? 딱히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반응은 없었고, 기척도 평소보다 적게 느껴졌다. 포달랍궁과의 일전을 벌인 이후라서 모두 치료 중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성역의 곳곳에는 술법들이 깔려있을 텐데 그중 상당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신지로 때는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시간만 주더라도 즉시 술법진을 발동시켜, 성역 전역이든 주변 경비병에게든 구원 요청이 들어갔는데 말이다.
“이거 어쩌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천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베어낸 시신들을 버려두고 좀 더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일단 계속 ‘잠입’해 보자고.”
확인을 위해 천화와 설영은 계속해서 잠입했다. 자신들을 목격한 이들은 가차 없이 처치했고, 이제는 반응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없네?”
그리고 마주한 막다른 길. 제단 같은 것이 있는 방에 들어선 천화가 의문을 품었다. 중의적인 의미에서 말을 내뱉었다. 없다. 포달랍궁의 습격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모종의 수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라혈교의 교주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들이 제단에 모시는 성물, ‘성배’의 안이 텅 비어있었다. 보통은 특별한 술법으로 피를 응축시켜 빚어낸 농축된 핏물이 저 안에 가득해야 하는데, 바닥이 보일 만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딘가에 이미 사용을 한 것일까? 아무리 시기가 조금 이르다고는 하지만 절반가량은 차 있어야 할 텐데?
“이놈들!!!!”
그때, 그들이 지나왔던 통로 쪽에서 수많은 기척이 일어났다.
“오호?”
기척을 지우는 술법을 사용했는지, 아무리 성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지만 근처에 다다랐을 때에서야 천화가 알아차릴 만큼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수십은 족히 되는 인원들이.
“혈둔의 술!”
“혈력응집의 술!”
그리고 나타남과 동시에 제각기 술법을 펼쳐 천화와 설영을 압박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나타났느냐!!”
아직 침입자들의 정체까지 파악하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이미 오는 동안 다른 자들을 죽인 까닭에 적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대답 여부와 관계없이 죽일 각오로 전신의 혈액과 공력을 빨아들이는 술법을 겹겹이 쌓아올렸다.
“읏?”
천화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수십 명의 술법가들이 동시에 펼친 것이지만, 천화는 이미 대자연의 기운과 소통하는 화경의 경지였으니까. 그보다 더 강한 간섭력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천화에게 그런 식의 술법으로 해를 끼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설영은 달랐다. 초절정의 고수에다 혈마신공의 특성에 의해 상단전이 어느 정도 열려 술법에 대한 저항력을 가졌다지만, 상대는 술법만으로 어지간한 대문파를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한 이들이니까. 힘을 빼앗겼고, 생기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워낙 크다 보니, 힘을 빼앗아가는 이들조차 착각을 할 정도였다. 설영 하나가 아니라 설영과 천화 둘에게서 빼앗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그거,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그 모습을 보고 상황 파악을 마쳤음에도 천화는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약간의 힘을 사용하면 설영에게 가해지는 술법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텐데, 그러는 대신 놈들에게 가벼운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
“흥! 그런다고 봐줄 줄 아느냐! 목숨을 구걸해 보거라! 누가 보냈는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다시 왔는지 낱낱이 고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다시?’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주의였지만, 저들의 말은 조금 거슬렸다. 언제 봤다고 자꾸 다시 다시 거리는 것일까? 포달랍궁에서 본 것을 가지고 말한다고 보기에는 뭔가 꺼림칙했다. 천화는 가볍게 턱을 쓸며 놈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으아아앗!!!”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놈들의 술법은 더욱 강해졌다. 설영 한정이기는 하지만, 유형화되어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 기운들을 뽑아가며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저항을 해보았지만, 그녀가 펼치는 공격들은 술법가들을 함께 따라온 무인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그들을 잡기 위해 달려온 마라혈교의 고수 중에는 그녀와 비등한 힘을 지닌 초절정의 고수들 역시 있는 것이다.
“너 정말 안 도울 거야?!”
“잠깐만. 조금만 더 생각 좀 하고.”
점점 기운은 빠지고, 공격은 통하지 않자 옆에서 가만히 구경 중인 천화가 괜히 얄미워진 설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천화는 딴청을 부리며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그러다 툭하고 해법이 될 만한 말을 던져주었다.
“어차피 생명력은 남아돌면서 귀찮게 뭘 실랑이를 하고 있어. 배고프다고 하면 그냥 배가 터지도록 먹여주면 되지.”
“뭐? 흐음, 에잇. 모르겠다. 잘못되면 네가 책임져!!”
그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설영이 이를 앙다물었다. 천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술법이 생명력을 빼앗아가는 것이라면, 자신이 익힌 혈마신공은 사용자의 생명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내공도 내공이지만 생명력 자체를 증폭시켜 엄청난 회복력을 부여하고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생명력을 흡수해가시겠다? 어디 먹어봐라. 내 생명력이 더 큰지, 네 위가 더 큰지 두고 보면 알겠지! 아예 놈들의 술법을 거스르지 않고 전력으로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음껏 먹게 해주는 대신, 아예 깔대기를 꽂고 들이붓듯이 기운을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오오오오! 이렇게 순도 높은 생명력이라니!”
“저자들을 무조건 사로잡아야 한다! 가둬놓고 계속해서 기운을 뽑아낸다면 성배를 금방 다시 채워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상대 쪽에서도 반응이 즉시 일어났다. 설영에게서 뽑혀나오는 기운은 고작 한 명의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잘 단련된 무인 하나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기운은 일반인 수십 수백 명분에 이르는데, 지금 설영이 내뿜는 기운은 그런 고수들 수십 수백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마르는 기색이 없어, 얼마나 더 많은 기운을 뽑아낼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적당히 회복시키고 기운을 뽑아내길 반복할 경우 막대한 힘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당연히 욕심이 났고, 술법가들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의 한계에 육박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으윽?!”
“아직도 더 나온다고?”
“말도 안 돼! 어떻게 인간이 이런 기운을……?!”
반면, 노도와 같은 기운을 밀어내는 설영의 표정에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다. 혈마신공의 경지가 9성에 이르며 화경을 눈앞에 두었기에 그녀가 뽑아낼 수 있는 기운은 무지막지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공만을 뽑아내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생명의 기운, 그 자체를 흡수하고 있었기에 설영이 낼 수 있는 힘은 기존의 몇 배에 이르렀다. 그것을 마구 쑤셔박고 있으니, 술법가들이 여럿이나 동원되어 능력을 중첩시키고 있다 한들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죽여라! 저년을 죽여!!!”
“이 이상 힘이 넘쳐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든 해치워!!!”
그들의 음성이 다급하게 바뀌었다. 한계 그 이상까지 기운이 몰리다 보니 술법을 제어하는 몸에 과부하가 걸렸고,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죽어라!!!”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설영을 죽이려 들었다. 죽일 수 있다는 착각을 했다.
“흥!!”
허나 설영에게는 아직도 여력이 넘쳤다. 술법에 억지로 기운을 밀어넣고 있는 와중에도 덤벼드는 무인들을 충분히 상대할 정도였고, 술법의 폭주는 가속화되었다.
“아, 안 돼……!!”
츠츠츠츳-!!!!! 퍼엉!!! 결국, 술법가들의 몸뚱아리가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술법만으로 기운을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어떻게든 감당해보려 했지만 그 또한 넘어선 것이다. 동시에 술법의 축이 무너졌고, 설영의 몸에서 뽑아내었던 기운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헉?!”
그 막대한 기운들이 모두에게 내려앉았다. 마라혈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강체술과도 비슷했지만, 그것이 과도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갑자기 막대한 생명력을 한순간에 주입당한 무림들이 가슴을 틀어쥐며 호흡을 어려워했고, 전신에 푸른 핏줄이 불끈거리며 괴로워했다. 퍼엉! 펑! 펑!! 과도한 생명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터져나갔다. 그와 함께 주입되었던 생명력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명력이 결합하여 다시 공기 중에 터져나갔다. 연쇄 폭발. 놀랍게도 신체가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몇몇은 간신히 생명력을 뿌리치고 쉴 새 없이 비워내며 버티고 있었지만, 미처 대응하지 못한 이들은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멸했다.
“엉?”
그리고 그 생명력의 폭주에 성배가 반응했다. 성배 안에 찰랑거리던 농축된 생명의 힘이 방 안에 퍼진 기운에 반응한 것이다.
“와, 이걸 해먹는다고?”
그 모습을 외딴 섬처럼 바라보던 천화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영의 혈마기라면 충분히 술법을 폭주시킬 테니 문제가 없을 것은 알았지만, 성배가 저절로 반응을 할 줄이야? 얼떨떨한 눈으로 빛을 내는 성배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성배 안의 붉은 액체가 사라졌다. 포자처럼 흩날리는가 싶더니, 설영의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
처음에는 설영도 깜짝 놀라 저항을 하려 들었지만, 몸에 닿자마자 스르륵 스며들어버리는 기운에 곧 몸을 내맡겼다. 자신이 뿜어낸 것 이상의 엄청난 기운이 들어온 것이다. 그뿐 아니라, 농도 짙은 생명의 기운에 반응하여 방 안을 가득 메운 기운들 역시 설영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몸이 터져 죽은 이들의 생명력까지 빨아들인 채로.
“운 좋은 놈들은 앞으로 넘어져도 돈을 줍는다더니…….”
기연. 그것은 기연이었다. 오직 혈마기를 익혔고 9성 이상의 놀라운 성취를 보였기에, 또 저들이 생기를 흡수하는 술법을 펼치고 폭주해버렸기에 일어난 기연. 설영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초절정의 문턱에 발을 딛었으나 조금 부족하던 내공을 가득 채우는 것은 물론, 모여든 기운들이 반쯤은 상단전을 열어젖혔다. 화경에는 이르지 못했어도 그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설영 본인이 얼마나 소화해 낼지는 미지수였지만.
“교, 교주님을 뵙습니다!!”
“엥?”
그러나 기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간신히 생명력을 흘려내며 목숨을 부지한 술법가들이 설영 쪽으로 기어가는가 싶더니, 머리를 조아리고 소리친 것이다. 교주라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무릎을 꿇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뭐 그런 건 아니지?’
이건 천화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마라혈교의 교주는 따로 있지 않던가? 그것도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꽤 강력한 존재였고, 강체술까지 펼친다면 거의 화경에 육박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고수였다. 그런데 이렇게 배신을 때린다고?
‘가만, 마라혈교의 교주 선출 방법이 뭐였더라?’
황당했지만, 설영이 완전히 힘을 수습할 때까지 머리를 조아린 채 기다리는 놈들을 보며 천화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배?’
힘이 가장 강하거나, 술법을 가장 잘 다루거나. 그도 아니면 혈통으로 이어지거나. 일반적인 문파라면 그런 식으로 이어지겠지만, 마라혈교의 교주 선출 방식은 조금 달랐다. 성배의 인정을 받는 것이 교주가 되기 위한 관문이었다. 성배에 담긴 핏물, 정확히는 응축된 생명의 기운을 몸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교주로 인정받는 방법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조금 전 저들이 그랬던 것처럼 버티지 못하고 몸이 터져 죽는다고 했지. 그런 것이야 운기 능력의 차이가 아니겠냐며 도전을 했던 고인물 중 일부가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나가면서, 뭔가 특별한 조건이 있겠거니 하는 말이 돌았었다.
‘그래서 설영을 교주라고 부르는 건가? 그럼 현 교주는?’
그렇기에, 성배가 저절로 반응하여 힘을 보태준 설영을 교주라 부르는 것도 대충 이해는 되었다. 다만 문제는, 이번 포달랍궁 습격 때도 보이지 않긴 했지만 그가 알기로 현 교주가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 설영을 이용해 교주의 자리를 다퉈보려는 것일까?
“일어들 나세요. 교주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때마침 설영이 힘을 수습하고 숨을 골랐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힘을 수습하는 것이었기에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그것이…….”
의아해하며 경계하는 설영의 물음에 놈들이 대꾸했다. 그것은 천화의 예상을 깨뜨리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