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혈마 재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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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혈마 재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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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혈마 재림 (2)
2022.06.05.
‘여긴…….’
설영의 정신이 어딘가를 떠돌았다.
추광의 정신 세계일수도, 혈마검의 정신세계일 수도 있었다.
설영 자신도 확신을 갖고 행한 것이 아니라 도박에 가까운 수를 벌인 것이니까.
사실 정신세계로 들어올 수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다.
‘혈마검의 정신 속인가? 듣던 것과는 다른데.’
심해를 유영하듯 그 안을 떠돌며 설영은 그곳이 누구의 세계인가를 확인했다.
고작 수십 년으로는 닿을 수 없는 지독한 악의와 분노.
혈마검의 정신이라는 것은 파악했지만, 천화에게 들었던 정신세계와는 조금 달랐다.
독룡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화경을 이루어낸 천화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온통 하얀 빛으로 뒤덮인 연무장 같은 공간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바닷속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였으니까.
그곳에서 어둠 이외에 보이는 것은, 닿을 수 있는 것은 보글보글 저 밑바닥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기포들뿐이었다.
포옹!
‘이건 기포가 아니라, 기억인가?’
그리고 그것이 닿아 터지는 순간, 작은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자신이 겪은 일인 것처럼 눈앞에 선명히 펼쳐졌다.
‘…….’
하나같이 슬픈 기억의 단편이었다.
혈마와 그 후예들이 겪었던 기억들을 함께 겪으며, 쌓여왔던 불행한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슬프다.
괴롭다.
화가 났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이해하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설영의 몸이 기포속에 파묻혔다.
색몽요녀에게서 얻은 원기의 영향일까? 감정은 더 진하게 다가왔고, 한 알의 기포가 터질 때마다 따끔한 기억에 감정이 들썩였지만 설영은 어떻게든 버텨냈다.
찾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혈마검은 파멸만을 원하는 것일까?’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혈마검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설영이었다.
혈마의 피를 이은 정통의 후계자로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들이 받았던 억압과 비루했던 삶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혈마검에게도 좋은 기억과 다른 목적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몸에 닿아 터지는 기포가 늘어날수록 감정이 격해졌다.
마치 자신의 몸 또한 기포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혈마검의 감정 속에 파묻혀 그 일부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서둘러야 한다는 조급함도 들었지만 최대한 시야를 넓게 가졌다.
보다 커다란 기포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내었고, 그것들에 하나하나 접촉했다.
침잠해 들어갔다.
‘있다.’
깊이, 더 깊이 빠져드는 설영의 몸이 흐릿하다.
수많은 기포들에 녹아들며 그녀의 정신 역시 흐릿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설영은 자신을 잃지 않았다.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기필코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가장 심층으로 내려갔다.
다른 주요 기억들에 비하면 작지만, 자신을 방어하듯 두껍게 껍질을 두르고 있는 분홍빛의 기포를 찾아내었다.
토옥
그것을 건드리는 순간, 어떤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초대 혈마와 함께했던 기억.
그와 함께 수련하고, 제를 올리며 혈마검이 아닌 도인의 검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던 때의 기억이었다.
행복했고 순수했으며, 당시의 혈마는 신검합일을 이룬 고수가 아니었음에도 그와 하나되는 일체감이 뿌듯하게 밀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야가 바뀌었다.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덮쳐드는 수많은 고수들.
탐욕으로 가득 찬 그들의 눈빛에 가슴이 일렁였다.
그런 와중에도 혈마검이 바라는 바는 단 하나였다.
주인을 지키고 싶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더 강한 힘을 머금고, 혈정이 충만해지는 것보다 지치고 미쳐가는 주인을 돕고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훨씬 커다랬다.
[나는, 강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혈마검의 음성이 비로소 설영의 귀에 들려왔다.
자신을 찾아내고 막아내기 위해 나타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혈마검 내면의 목소리였다.
[무공 따위를 알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듣지 못하는 게 아니었어.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
천화가 들었다는 혈마검의 목소리.
자신은 들을 수 없는 그 소리를 천화는 어떻게 들었을까 늘 궁금했지만, 이제는 알겠다.
자신은 단지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뜻을 정해놓고서 혈마검을 없앨 생각만 하고 있었기에, 그 속마음이 들킬까 봐 혈마검과 제대로 대화를 해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둘의 힘이 통하였듯 혈마검은 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미안했고 미련했다.
좀 더 일찍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함께 해낼 수 있던 것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주인의 고통은 모두 내게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설영은 진심으로 혈마검의 감정에 공감했다.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눈물처럼 흐르는 혈마기를 씻어내주고 싶었다.
[이미 내게는 수많은 업보와 한이 쌓였다. 나를 쥐는 자는 분명히 불행해질 것이다. 그의 후예여, 너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난…….”
잔뜩 마모된, 어딘지 지쳐 보이는 그 음성에 설영이 조심스레 답을 했다.
혈마검의 안에서 녹아들었다.
@
“크흐흐흐! 곁에 두고 예뻐해 주려 했건만, 결국 이렇게 되는 구나.”
문득 정신을 차린 추광이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쓰러진 흑우와 은룡, 혈마검이 몸에 틀어박힌 설영의 모습은 소기의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게요. 결국 이렇게 되네요.”
그때, 설영 역시 깨어났다.
침착한 표정으로 움켜쥔 혈마검의 검신에서 손을 놓았다.
삶을 포기한 것일까? 그럴 리가.
손을 놓은 순간 놀랍게도 혈마검이 저절로 몸에서 빠져나왔다. 당황한 추광이 힘을 주어보지만 오히려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순간 팔이 꺾여버렸다.
“무, 무슨 짓을……!”
당황스러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분명 꿰뚫렸어야 할 설영의 몸에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은 것이다. 정확히는 급속 재생이 이루어져 상처를 치유했고, 흉터 하나 남기지 않은 것이지만.
“으읏!!”
파지짓-!
그것을 오래 관찰할 새도 없이 고통이 밀려온다.
자신에게 힘을 주어야 할 혈마검이 오히려 고통을 주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젠장! 가만히 있어!!”
혈마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혈마기를 잔뜩 끌어올려 보지만 소용없다. 어디서 감히 혈마기를 두고 힘싸움을 벌인단 말인가?
억지로 검병을 움켜쥔 손바닥이 지진 듯 화끈해졌고, 실제 화상까지 입기 시작했다.
그것은 혈마기의 치유 능력으로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상처 자체가 혈마기에 의한 것이었기에 회복시키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난 네 주인이란 말이다!!!”
저항을 할수록 고통이 심해져오건만, 추광은 끝까지 혈마검을 쥐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그것을 쥐어 휘두르려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설영 때문일 테니까. 그녀만 죽여 없앤다면 다시 혈마검도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이라 믿었다.
“혈마사멸령!!”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도의 기운으로 혈마검법 최후 초식을 펼쳐내었다.
“미안해요, 대사형. 당신은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
영혼마저 갈라내야 할 일격이, 아주 가뿐하게 설영의 손에 붙잡혔다.
혈마기가 저절로 호응하여 그녀의 몸에 깃드니 굳이 다른 무기를 꺼내들 필요도 없었다.
조금 힘을 주자 억지로 붙들려 있던 혈마검이 딸려왔고, 설영은 그것을 휘돌려 추광에게 돌려주었다.
혈마검의 검신이 추광의 심장을 관통했다.
“커어……?”
츠으으읍-
꽤 많은 힘을 쏟아낸 탓일까? 혈마검은 기세 좋게 추광의 피를 빨아들였다.
그가 지니고 있던 모든 혈마기를 회수하고, 수많은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껍데기만 남겨버렸다.
추광이 목내이가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흑우, 은룡. 둘 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무힛.”
“쀼우우!”
그와 동시에 설영이 자신의 기운을 흑우와, 은룡과 나누었다.
혈마검에 찔려 시름시름 앓고 쓰러진 흑우의 몸에 생기가 깃들었고, 혈마기에 부딪혀 내부가 상했던 은룡 역시 기운을 되찾았다.
마치 괜찮다는 듯 설영에게 웃어 보이는 둘을 보며 설영도 싱그러운 미소를 되찾았다.
“너희들까지 끌어들여 미안하구나.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주마.”
어릴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무척이나 밝고 친절하던 대사형이었는데.
그런 추광의 시신에 마지막으로 시선을 둔 설영이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가 뿌려둔 나쁜 씨앗들을 대신 거두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납치되어 강제로 개조된 혈마신공을 익힌 아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혈마검.”
츠즈즈즈즈즛!!
설영이 무림맹의 고수들과 분투 중인 수라혈마교의 아이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정제되지 않아 난폭하고, 사용자마저 집어삼키는 불완전한 혈마기들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딱히 손을 쓴 것도 아니지만, 설영의 혈마기에 닿는 아이들마다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이들이 가진 혈마기가 모두 설영에게 빨려들어간 탓이다.
순간적으로 신체의 균형이 깨지며 혼절을 한 것이다.
자칫 아이들이 위험해질 수 있는 수법이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설영과 혈마검이었다. 혈마기에 대해서는, 생명력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제어력을 보여주었기에, 잠시 기절했다 깨어나고 나면 오히려 개운한 기분이 들 터였다.
약간의 요양이 필요하고, 이후 지도를 통해 혈마심법을 잊어가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당장 혈마기에 잠식당해 선천진기까지 소진하며 목숨을 불사르는 일은 없을 터였다.
“멈추세요.”
“헙!”
그 사이, 무림맹의 고수들이 쓰러진 아이들을 노리기는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적이니, 틈이 생겼을 때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을 설영이 막아섰다.
색색환요공의 수법을 이용해 혈마기를 담아 기세를 뿜어내는 것만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이들은 제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수라혈마교와의 싸움은 여기서 끝입니다.”
“개소리!”
“대사형의 원수를 갚겠다!!”
“설영, 네가 결국 대업을 방해하는구나!”
그 순간, 무림맹의 고수들을 몰아붙이던 나머지 사형제들이 설영을 향해 짓쳐들었다.
자신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던 대사형 추광이 죽임을 당했지만,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운이 좋게, 혈마검을 빼앗았거나 추광이 혈마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폭주한 것으로만 여겼다.
그들 역시 화경의 고수들을 상대하던 터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까닭이었다.
“혈마강천.”
화경의 고수 셋이 동시에 짓쳐드는 것이었지만 설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혈마검을 뻗어낼 것도 없이 혈마기를 일으켜 그들을 내리찍었다.
“컥?!”
마치 수십 배의 중력에 짓눌린 듯, 혈마기에 짓눌린 그들의 몸이 뒤틀렸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전신의 뼈가 부러져 제대로 몸을 일으키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일반적인 진짜 화경의 고수였다면 힘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저항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이룬 것은 혈마기를 이용한 가짜 화경이었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머리가 붉게 물든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혈마기의 기운이 골수를 넘어 터럭 한 올에까지 깃든 탓에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릴 때면 머리색이 붉게 변했고, 일정 시간 밖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 이상의 시간 동안 혈마화를 강제로 유지했다가는, 스스로 혈마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여 사방으로 혈마기를 뿌려대거나 몸이 터져 죽어버리고 말았겠지.
쓰러진 아이들처럼 성취가 낮지 않아 강제로 혈마기를 뽑아내면 위험했기에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이들이 폐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공은 봉인하거나 폐해야 할 터였다.
그 후에는 죄값을 치러야 하겠지.
“저의 사형제들이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무림맹 분들께서도 저를 보아 이쯤에서 멈춰주시지요.”
그렇게 수라혈마교의 모든 이들을 제압한 설영이 간신히 그들을 상대하던 무림맹의 인사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정중하긴 했지만 계속하려 한다면 그녀를 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고, 비로소 안심한 설영이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전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천화와 천마의 싸움이,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