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프 시즌(2)
허공에 떠서 선택을 기다리듯 반짝이는 수많은 카드들.
[이게 다 내 재능들이야.]
박도현이 뽐내듯 말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잘게 쪼개 놓은 것들로, 계약을 맺는 순간 이 재능들 중 하나를 랜덤으로 증정하며.
매일 연습을 하거나 경기를 뛰며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걸 모아서 다시 재능을 뽑을 수 있단다.
포인트의 물가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니.
‘지금 최대한 좋은 걸 뽑아야겠네.’
대충 게임 시스템이랑 비슷하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이런 뽑기 시스템은 무조건 운빨이라는 것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설령 알았더라도 그걸 알려주면 뭔가 페널티가 있겠지.
듣나 마나 한 이야기는 대충 흘려듣고, 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드 한 장을 손으로 건드리자, 다른 카드는 전부 흩어져 사라졌다.
[D등급 재능 ‘체력은 근력’을 획득하셨습니다.]
‘······.’
[······.]
허공에 뻗은 내 손을 쳐다보며, 둘 다 굳어버렸다.
[그, 원래 첫술에 배부르란 법은 없잖아. 뽑기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도움이라고는 쥐뿔도 안 되는 위로의 말은 개무시하며, 카드에 적힌 ‘상세 설명’이라는 문구를 터치했다.
[체력은 근력(D등급) ― 성장형]
○ 타격에 적합하도록 근육의 상태를 조정합니다.
○ 유산소 운동 시 근력의 성장이, 웨이트 트레이닝 시 심폐 지구력의 성장이 보정됩니다.
○ 현재 숙련도: 0%
설명을 확인한 순간, 온몸에 은은한 열기가 퍼져나갔다.
몸을 더듬어 확인해보니 복부와 허리 등, 원래의 내 몸에서 달라진 부분들이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D등급이라는 말에 한숨부터 나왔지만, 막상 설명을 읽어보니 상당히 유용한 재능이었다.
[D등급은 몇 개 있지도 않은데, 하필 이게······.]
박도현은 여전히 머리를 감싸고 중얼대고 있었지만.
‘다른 재능이 더 좋다는 거야?’
[당연하지! 공이 수박만 하게 보이는 재능, 타구 판단력을 올려주는 재능, 도루 타이밍이 보이는 재능······.]
그러더니 자기 재능을 주절주절 자랑하듯 떠들어댄다.
분명 이것보다 훨씬 대단하고, 경기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재능인 건 맞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저런 것들보다는 이게 훨씬 알맞은 재능이다.
[근육은 트레이닝만 제대로 받으면 누구나 키울 수 있잖아. 특히 너처럼 원래 운동하던 사람이면 더 그렇고.]
내 반응이 나쁘지 않아 보이는 게 의아했는지 박도현이 물었다.
‘이건 단순히 근력을 키워 주는 재능이 아니야.’
타격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 건 노력의 영역이지만, 그걸 이미 ‘완성된’ 상태로 만들어주는 건 차원이 다르다.
이건 시간을 절약하는 것 외에도 분명한 메리트가 있다.
‘잠깐만.’
허공을 바라보며 타격 자세를 잡았다.
가상의 투수를 노려보며 타이밍을 잡다가, 치기 좋게 몰린 체인지업을 때린다는 생각으로 허리를 돌렸다.
후우웅!
[뭐야, 너 왜 그렇게 버벅대?]
박도현의 지적이 없었더라도 나 자신부터가 엉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등판 전날 숙소에서 가볍게 스윙 연습을 하던 때보다도 훨씬 개판인 지금의 모습.
휘두르는 힘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똑같은 공을 상상하며 스윙 폼과 궤적을 조금씩 바꾸던 도중.
이거다, 싶은 자세를 찾아냈다.
후우웅!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직 스윙에만 모든 힘을 쏟아내는 자연스러운 동작.
물론 실제로 배트를 쥐고 투수의 공을 상대하려면 이곳저곳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감은 익혔다.
사람의 몸에는 관성이 있어서, 평소 습관대로 움직이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몸에 습관적인 부하를 주어 만드는 것이 바로 근육이다.
원래대로라면 습관적인 타격 훈련을 통해 타격에 적합한 근육을 만들어야겠지만, 나는 이미 재능의 힘을 빌려 근육이 완성된 상태.
이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스윙 동작이 바로 내게 적합한 타격 습관이다.
[어? 지금 어떻게······?]
박도현 눈에는 내가 혼자 생쇼하다가 갑자기 스윙이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보이겠지.
‘고맙다, 친구야. 잘 써먹을게.’
실패해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도전.
그런데 이 재능이라는 게 얼마나 사기적인 건지 알고 나니 욕심이 생긴다.
* * *
나와 박도현은 같은 에이전시와 계약했다.
협상력이나 지원 규모는 대형 에이전시에 비해 조금 부족하지만, 전력 분석 능력이 뛰어나고 선수의 의향을 협상에 최대한 반영해주는 회사.
현재 계약된 선수가 30명 내외인데, MLB와 NPB, KBO에서 하나같이 특급 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활약해주는 알짜배기 선수들만 쏙쏙 잘 뽑아서 데리고 있다.
“······타자로, 그것도 내야수로 전향하고 싶으시다고요.”
애쉬튼 베이스볼 에이전시의 대표이자 아직 현장에서도 뛰고 있는 에이전트, 데릭 애쉬튼.
박도현의 사고 이후 법정 싸움을 비롯한 뒤처리로 1년 새 부쩍 수척해진 데릭에게 다시 폭탄을 투하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 돌아왔다.
“제가 각오했던 최악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 최악의 이야기라는 건 아마도 내가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이겠지.
실제로 한국 언론이 허구한 날 내 은퇴에 관한 기사를 써 대기도 했고.
“전에 말씀드렸지만, 저는 Koo가 투수로서 회복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건 물론 비시즌 동안 체결해야 할 계약을 위해서다.
지난 시즌 메이저에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한 만큼, 메이저 계약은 물 건너갔다.
데릭은 마이너에서 출발하되, 재활 프로그램 전면 지원을 따내겠다며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던 중이었고.
“데릭, 미안하지만 저는 이미 결정했어요.”
본의 아니게 헛고생을 시키게 된 건 안타깝지만.
박도현과의 계약은 이미 이루어졌고 돌이킬 수 없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어요. 스폰서 계약을 1년 단위로 맺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반대한다면 서로 다른 길을 가도 상관없다는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데릭의 표정이 굳었다.
[야, 너 그렇게 강하게 나가도 돼?]
박도현이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사실 스타 플레이어야 본인이 에이전트 앞에서 갑이지, 지금 내 상태로는 이렇게 헤어지는 게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
당장 다음 시즌 계약은 둘째치고, 오프 시즌 동안 타자로서 훈련을 해야 할 텐데 에이전트 없이 환경을 마련하기는 힘들지.
그러나 나는 이미 데릭이 내 의견을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한 상태에서 지른 거다.
“Koo, 당신과 Park에게 계약을 제시하면서 제가 했던 말 기억나요?”
이 말이 나오면 이야기는 다 한 거다.
고교시절.
영어라고는 더럽게 못하면서 메이저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박도현과는 달리, 나는 KBO를 거쳐 가려고 했다.
이유는 지금 와서는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거다.
그렇게 해외 에이전시의 접근을 마다하던 내게, 데릭이 건넨 한마디가 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선수가 우리를 버리더라도, 우리는 선수를 버리지 않습니다.”
물론 단순한 립서비스는 아니었고, 실제 사례를 보여주면서 했던 말이다.
현역 연장을 간절히 원하는 나이 든 선수의 하위 리그와의 계약을 타진하거나, 장기부상으로 드러누운 선수의 재활을 끝까지 도와 결국 메이저로 재진입시키기도 했다.
애초에 사례 자체가 적긴 하지만, 선수 쪽에서 떠난 건 장기계약 등의 협상에 유리한 대형 에이전시로 옮긴 것 정도였다.
“대신 Koo, 이번 결정은 다저스와의 협상에서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각오해주셔야 합니다. 계약 후에야 타자 전향 의사를 밝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물론이죠.”
그런 양아치 같은 짓을 하는 에이전트는 나야말로 사양이다.
구단에 밉보여서 출전 기회 자체가 날아가 버리면 답도 안 나오니까.
“협상 일정은 나왔나요? 여유가 있다면 미리 훈련을 시작하고 싶은데요.”
“열흘 후에 잡혀 있습니다. 별도로 휴식은 안 취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실전 등판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타격이랑 수비 훈련을 하면서 몸까지 만들려면 시간이 모자라서요.”
데릭은 타격 인스트럭터를 최대한 빨리 구하겠다며 다급히 사라졌고.
나는 사옥 지하에 마련된 트레이닝 센터로 향했다.
[데릭이 이렇게 쉽게 이해해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는데······.]
박도현이 중얼거렸다.
‘이해? 아마 못 했을걸.’
[어? 뭔 소리야, 그럼 뭐하러 타격 코치까지 구해다 줘?]
‘적어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봤겠지.’
메이저리그 서비스 타임이 4년을 넘겼지만, 내 나이는 아직 만 25세.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 시즌 정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다.
게다가 어차피 다음 시즌은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
타자로서 마이너리그에서 뛴들, 성적이 바닥을 뚫는다면 어차피 계속 고집부리기는 힘들어질 거다.
‘물론 미리 신뢰를 쌓아두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흔쾌히 찬성하진 않았겠지만.’
내가 그날의 사고 탓, 악플러 탓을 하며 재활에 설렁설렁 임했다면 데릭도 슬슬 나와 멀어질 준비를 했겠지.
웃으며 헤어지자는 내 말에 정말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사람이니까.
[저기지? 트레이닝 센터.]
‘어, 여긴 진짜 오랜만이네.’
오프 시즌에 주로 사용하는 훈련 장소는 플로리다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여기는 사실상 직원 복지용 피트니스 센터에 선수 전용 공간을 마련해둔 것에 불과하다.
개인 트레이너와의 훈련 계획을 짜거나, 타격이나 투구에서의 새로운 접근법을 상의할 때 말고는 거의 안 쓰는 공간.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훈련 모드를 활성화합니다.]
[오늘의 할 일을 완료하면 항목별로 1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오늘의 할 일 : 체력 훈련(10km 달리기), 타격 훈련(스윙 300회), 수비 훈련(1시간)]
이제 이 게임 시스템 같은 안내 음성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포인트.
지금 가지고 있는 ‘체력은 근력’ 말고도 새로운 재능을 뽑으려면 1만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훈련만으로 재능 하나를 뽑으려면 거진 1년을 뛰어야 한다는 거다.
[실제 경기를 뛰면 포인트가 더 빨리 모이거든?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따라만 와.]
명예의 전당을 노린다고 가정하면, 25살이라는 나이는 상당히 늦은 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구는 시즌도 길고, 선수로서의 커리어도 긴 종목.
괜한 조급함에 몸을 망치거나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체력 훈련부터 하자.’
10km 러닝은 원래부터 매일 하던 거였다.
트레드밀 위에서 한 시간 좀 넘게 뛰면서 몸을 달구고 나니.
[오늘의 할 일 (1/3)]
셋 중 하나를 완료했다는 표시가 떴다.
‘저거 셋 다 해야 30포인트를 주는 건 아니지?’
[응. 오늘 안에 다 못 끝내면 끝낸 만큼만 포인트가 들어와.]
당장 수비 훈련을 진행할 수 없으니, 당분간은 체력과 타격 훈련을 통해 20포인트씩 수급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수 전용 장비가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그거 쓰게?]
‘어. 그래도 손에 익은 거로 해야지.’
33인치(약 83cm)에 31온스(약 878g)의 물푸레나무 배트.
타격 성적에 큰 욕심이 없었기에, 그냥 박도현이 쓰는 걸 그대로 썼다.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가벼운 배트로 매 시즌 40홈런 이상을 뻥뻥 날리던 박도현 때문에 한때 유망주들 사이에서 가벼운 배트가 유행하기도 했다.
[내가 너 타석 들어갈 때마다 얘기했던 거 기억나지?]
‘기억나지. 노이로제 걸릴 뻔했는데.’
박도현과 함께 메이저에서 뛰던 시절.
최소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타격 코치보다 더 집요하게 잔소리를 해 댔다.
핸드폰 카메라를 설치하고, 타석에 들어선 뒤.
박도현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스윙에 임했다.
단단하게 디딘 하체를 살짝 굽히며, 등에 모은 힘을 전달한다는 느낌으로 허리를 돌린다.
방망이의 가장 두꺼운 부분이 스트라이크존을 정확한 타이밍에 지나가면.
적어도 가운데로 몰린 공만큼은 무조건 쳐낼 수 있다.
“흡!”
후우웅!
팔로우 스윙 때 배트가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박도현이 말했던 느낌은 얼추 살린 것 같다.
첫 스윙을 마치자, 허공에 떠 있던 안내 문구가 바뀌었다.
[타격 훈련(299/300)]
박도현이 소리쳤다.
[지금 그 자세를 똑같이 유지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열 번!]
허공에 배트를 돌리는 스윙 훈련.
아직은 어색하지만, 한때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였던 사람이 직접 자세를 봐주는 행운을 또 누가 누릴 수 있을까.
쏟아지는 잔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방망이를 돌리고 또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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