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4화 (4/200)

4. 오프 시즌(3)

LA 다저스 소속 선수들의 연봉조정 협상이 이루어지는 회의실.

다저스는 팽팽한 줄다리기에 앞서, 협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선수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구현기.

3년간 선발투수로 활약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전반기 복귀가 불투명했으며.

그마저도 날아가 아예 시즌 내내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도 못한 선수.

평소대로라면 이런 선수는 그냥 방출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구현기는 그럴 수 없다.

블래스 신드롬은 발병만큼이나 회복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병.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만큼, 회복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래서 원래 구단이 제안하려던 것은, 메이저리그의 최대 연봉 삭감 기준인 20%를 적용한 400만 달러.

그리고 25인 로스터에 포함된 일수에 따라 해당 금액을 나누어 받는 스플릿 계약이었다.

아무리 양심이 없는 에이전트라도 선수의 상태를 고려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단장 마이크 올리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임 사장 앤드류 프리드먼의 뒤를 이어 단장직에 오른 지 여러 해가 지났고, 그간 많은 선수들과 협상을 벌여왔지만.

이런 경우는 그의 프런트 경력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제 고객은 다음 시즌부터 내야수로 전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맞은편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도현의 에이전트이기도 한 데릭 애쉬튼.

10년 3억 달러의 계약을 염가 계약이라며 뻔뻔하게 나올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제는 아예 머리가 돌아버린 게 아닐까.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어쩐지 보기 드물게 선수를 직접 데리고 왔다 싶더라니.

어질어질해지는 머리를 흔들며 마이크는 구현기에게 물었다.

“Koo, 지금 자네 에이전트가 한 말 책임질 수 있나?”

원래부터 표정 변화가 잘 없는,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는 선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장인 자신이 노려보는데도 구현기는 정말이지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아무리 지금 블래스 신드롬에 걸린 상태라고 해도, 내야수 전향이라니.

심지어 좌완투수가.

타구를 1루 방향으로 보내야 하는 내야수 특성상, 달리는 방향과 던지는 방향이 엇갈리는 좌투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설마 지금, 협상의 판도를 바꿔보기 위한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가.

그런 의심이 고개를 들 만큼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Koo. 만약 진지하게 하는 말이라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자네를 경력이 전무한 타자 유망주로 가정할 수밖에 없어.”

전반기 복귀가 불투명한 지난 시즌에 500만 달러의 연봉을 안겨준 것과, 방출 대신 협상 테이블을 가진 것은 투수로서의 가능성과 커리어를 고려했기 때문.

타자 전향은 그 모든 걸 포기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마이크 단장은 강조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현기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많은 기회를 주셨다는 거, 저도 압니다. 논텐더 방출이나 지명할당이 되더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전에 이야기가 된 듯, 흉흉한 단어가 나오는데도 에이전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설마 지금 자신을 함부로 방출시키긴 어렵다는 걸 알고 블러핑을 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저 일당은 프로야구 선수와 에이전트가 아닌 할리우드에 가야 한다.

“······잠깐 우리끼리 대화 좀 하겠네.”

결국 마이크는 휴전을 선언했다.

구현기와 데릭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는 내셔널리그라지만,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다 보니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점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방출했을 때 돌아올 수 있는 후폭풍.

사유가 생긴 만큼 방출 자체에 대한 여론은 걱정할 것 없지만, 만약 타자 전향을 포기하고 타 구단에서 투수로 복귀에 성공한다면 문제가 커진다.

타자 전향은 블러핑일 것이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아예 야구를 그만두기 전 마지막 시도다······.

실무자들의 의견을 들으며 고심하던 마이크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다시 불러오게.”

구현기와 데릭이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마이크는 앞서 꺼낸 계약서의 연봉을 슥슥 지웠다.

“연봉은 500만 달러로 유지하자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메이저리그로 올라오지 못하면 지급될 일 없는 돈 아닌가. 서류상의 금액 때문에 쩨쩨하게 군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

타자로서의 구현기가 5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선수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이번 시즌 그를 메이저리그에서 볼 일은 없다.

즉 기회는 줄 테니 마이너에서 알아서 증명해라.

사실상 다음 시즌 전력 구상에서 완전히 제외한다는 선고였다.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자격도 포함이죠?”

말뜻을 분명 알아들었을 텐데도 에이전트의 얼굴은 태평했다.

“그래야지. 스플릿이라고는 해도 500만 달러짜리 선수를 안 불렀다가 무슨 소릴 들으려고.”

마이크가 목소리를 낮췄다.

“대신 역량이 수준 미달이라면 첫날이라도 바로 내려갈 수 있지만.”

직전 시즌까지 투수였다고 해도 평가 기준을 낮춰줄 순 없다.

선수와 에이전트 모두 당연하다는 듯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투수로서의 재활 지원에 관한 사항들을 제외했을 뿐, 나머지 세부 항목에 대한 논의는 빠르게 끝났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계약서에 양측의 사인을 마친 뒤, 마이크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구현기를 붙잡았다.

“지금부터는 단장으로서가 아니라, 자네를 데려와야 한다고 드러누웠던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야.”

마이크 올리버는 단장으로 승격되기 전 스카우트 팀의 총책임자로 일했다.

그가 단장직에 오르는 데 일조한, 가장 성공적인 투자였던 박도현이 입단하던 해.

박도현에게 300만 불을 배팅했으니, 굳이 구현기를 잡기보다는 중남미의 중대형 유망주에 눈길을 돌려보자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다저스와의 인연이 끊어지더라도, 야구를 놓지 마.”

190cm에 달하는 탄탄한 피지컬과 뛰어난 제구력, 마운드 위에서의 포커페이스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고교 시절부터 슈퍼스타 대우를 받는 친구와 불화 없이 어울리는 강인한 멘탈이, 마이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멘탈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인가.

한 사람의 야구인으로서 씁쓸한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돌아서는 구현기의 눈에서, 마이크는 이날 처음으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 * *

지금 나를 방출하기엔 애매하니, 정중하되 단호하게 나가도 되겠다는 데릭의 조언이 통했다.

물론 방출되더라도 나를 물어갈 팀이 제법 있기에 시도할 수 있었다. 조건은 더 나빠지겠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었고.

아무튼 계약은 무사히 마쳤고, 데릭이 구해 오겠다던 타격 인스트럭터와 플로리다의 트레이닝 센터에서 첫 만남을 가졌는데.

[저 영감님이 왜 여기서 나와······?]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헤 벌린 박도현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다, 작은 꼬맹이.”

머리를 박박 민, 곧 환갑에 접어드는 중년 남자.

다저스와 계약한 해부터 오프 시즌마다 박도현의 타격 훈련을 담당한 전속 인스트럭터, 훌리안 로페즈였다.

“꼬맹이면 꼬맹이지, 작은 꼬맹이는 뭡니까.”

“작은 꼬맹이 맞지. 그 빌어먹을 꼬맹이보다도 별볼일 없는 놈인데.”

“키는 그 자식보다 제가 더 큽니다.”

“말대꾸하는 것도 둘이 아주 똑 닮았어.”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고 있지만, 만만한 노인네는 아니다.

원래부터 나름 이름이 알려진 양반이었는데,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 박도현을 키워내면서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았으니까.

“은퇴하신 줄 알고 있었는데요, 코치님.”

박도현의 죽음 이후, 추모 분위기가 잦아들자마자 영감님께 엄청난 오퍼가 쏟아졌다고 한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몸만 와 달라고 여기저기서 성화였다나.

정작 본인은 모든 제안을 단칼에 쳐내더니 고향인 멕시코로 돌아가 버렸지만.

“은퇴는 무슨. 귀찮게 구는 놈도 없어졌겠다, 한 2~3년은 푹 쉬려다가 데릭 저놈이 사정사정을 해서 와준 건데.”

보통 저런 말은 상실감을 감추기 위한 강한 척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살 겁나 쪘어······.]

못 본 사이 턱이 사라졌다. 얼굴에 기름기도 꼈고.

그냥 잘 먹고 푹 쉬다 온 사람 그 자체다.

[사람 일이란 게 진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구나.]

‘왜? 무슨 문제 있어?’

[그거야 전에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지난 시도에서 벌어졌던 일을 발설하면 안 되는 제한이라도 있나 보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접하는 셈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코치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나 아직 계약서에 사인 안 했다.”

훌리안의 눈빛이 한순간에 돌변했다.

이 영감님이 박도현을 만나기 전까지 실력에 비해 인정을 덜 받았던 이유가 떠오른다.

성공하겠다 싶은 유망주를 보는 눈은 뛰어났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에겐 영 의욕을 못 냈으니까.

스타 플레이어 출신도 아닌 주제에 더럽게 까다롭게 군다며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지.

“다음 시즌 타자로서 개막 엔트리에 들게 해달라는 개소리나 할 거면 침이나 뱉어주고 가려고 왔지.”

[저거 진심이다. 백프로.]

박도현이 끼어들어서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고.

“저, 아무데서나 잘 먹고 잘 자고 똥도 잘 쌉니다.”

마이너리그에서 비슷한 실력을 가진 선수 두 명을 평가할 때, 다음으로 보는 것이 바로 적응력이다.

그나마 원정길이 편한 메이저리그에서도 한 시즌을 보내고 나면 퍼지는 선수들이 속출하는데, 열악한 마이너리그에서 잘 버티면 더 말할 것도 없지.

밤새 달리는 원정 버스에서 머리만 댔다 하면 1분 안에 잠들던 나다.

마이너리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적응 못 할 일은 없다.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훌리안은 코웃음을 치더니 가져온 배트를 내밀었다.

“어디 우리 타자 지망생님의 방망이 솜씨 좀 보자. 따라와.”

데릭이 영상을 보냈겠지만, 아무래도 직접 봐야겠다고 판단했는지.

훈련장으로 이동한 뒤 훌리안은 뒤에서 던져주는 공을 날리는 백토스 배팅을 주문했다.

센터 직원 한 명을 불러 공을 던지라고 지시하더니, 의자를 가져다 내 전신이 잘 보이는 곳에 가서 앉았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시작.”

백토스 배팅이 일반 토스 배팅과 다른 점은, 공이 날아오는 타이밍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실제 투수와 상대할 때처럼 스텝을 밟으며 움직일 준비를 하다가.

따아악!

공이 보이는 순간, 그간 연습해 온 대로 스윙을 가져간다.

[하체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 이 상태에서 헛스윙하면 무릎 꿇는 거야.]

[팔꿈치 벌어진다. 공에 닿을 때까지는 각도 유지하고, 밀어내면서 쭉 펴.]

[방금 빗맞은 건 토스가 이상하게 온 거니까, 괜히 의식하지 마. 그대로 가. 호흡 유지해.]

뭔가 어긋나는 것 같은데, 싶으면 여지없이 박도현의 지적이 들어왔다.

언제 날아올지 모를 공에 신경 쓰랴, 피드백 받아들이랴. 정신없는 상태에서 공을 쳐내기를 대략 스무 번.

“그만.”

배트를 내려놓고 숨을 고르며 영감님의 표정을 살폈다.

만족감도 불쾌함도 아닌, 뭔지 모를 묘한 표정.

“다시 해봐. 이번엔 상의 탈의하고.”

“······갑자기요?”

“꼬맹이한테 얘기 못 들었구나. 앞으로 훈련할 때 내 말에 토 달지 마.”

뒤돌아 옷을 벗으면서, 코칭 의뢰를 수락한 거나 마찬가지인 그 말에 몰래 웃었다.

“다시 시작.”

따아아악!

[어우, 왜 저렇게 살벌하게 쳐다보냐.]

등판이 미뤄진 만큼 웨이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데다가, ‘체력은 근력’의 영향으로 타격에 적합해진 신체.

적당한 움직임으로 데워진 근육이 움직이면서 벼락같은 스윙을 만들었다.

따아아악!

“그만.”

이번에는 채 열 번도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멈추라는 지시를 받았다.

펜을 돌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영감님은 데릭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친구 전신 스캐닝 기록 있지? 운동능력 평가지랑.”

“운동능력 평가는 한 달 전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스캐닝 자료는 6개월 전 기록이 가장 최근에······.”

“6개월? 장난하나. 장비 다 있지? 당장 새로 찍어.”

“아, 예. 지금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 타석에 선 거, 그거 기록도 다 정리해서 가져오고.”

그렇게 훈련하다 말고, 뜬금없이 측정실로 끌려가 각종 기계를 오가며 촬영을 진행했고.

촬영 결과지와 요청했던 자료들을 건네받은 훌리안은, 나를 옆에 세워둔 채 그걸 한참이나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고 나를 불렀다.

“작은 꼬맹이.”

“예.”

“전형적인 투수 타격밖에 못 배웠구만.”

정상적인 타격 메커니즘을 갖고 타석에 임하는 투수는 거의 없다.

어차피 안타를 쳐도 누상에서 신경을 쓰다 투구 밸런스가 흐트러지면 손해란 인식이 널리 퍼져 있으니까.

수비수가 있든 없든, 어떻게든 의도한 곳으로 공을 보내는 희생번트와 희생플라이를 주로 노린다.

“제대로 몰린 타구는 거의 정타를 만들었고, 대신 주심의 존이 넓거나 존에 걸치는 패스트볼을 던지면 무조건 루킹 삼진.”

[자료만 보고 저걸 다 맞히네.]

박도현이 감탄할 만큼 정확한 분석이었다.

나는 타석에서 장타를 노려본 적이 없다. 컴팩트한 스윙 궤적으로도 쳐낼 수 있는 공만 노렸고, 조금이라도 빠져나간다 싶으면 아예 손을 안 댔지.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투구 밸런스였으니까.

“이제부터는 네놈이 설정한 존을 넓혀야 할 거다. 적어도 보통 타자들만큼은 말이지.”

자료 뭉치를 뒤로 휙 던지며, 영감님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렇게 하면, 내가 널 홈런 타자로 만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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