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프 시즌(4)
메이저리그 오프 시즌.
이 시기에는 유니폼을 갈아입거나, 리그를 떠나는 이들이 속출하다 보니.
대활약을 해서 큰 변동이 일어난 경우가 아니라면, 연봉조정 소식은 딱히 대중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지난 1년간 메이저에 올라오지 못했던 내가 500만 달러의 스플릿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에도 ‘예우상 연봉은 보전해줬나 보다’ 하고 그러려니 했지만.
[다저스 관계자, “Koo는 다음 시즌부터 내야수로 전향한다. 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달라.”]
발표를 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말해두긴 했지만.
내부적으로 괜찮겠다는 판단이 나왔는지, 한 박자 늦게 나의 타자 전향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Koo의 새로운 도전, 관계자들 응원하면서도 성공 가능성은 ‘글쎄’]
[LA 다저스 구현기, 타자 전향 선언··· 전문가들 ‘은퇴 기로일지도’]
미국과 한국은 물론, 프로야구 리그가 있는 일본과 대만에서까지 난리가 났다.
심지어 큰 이슈거리가 없어 잠잠하던 야구 전문 TV 프로그램에서도 내 이슈를 전면적으로 다뤘다.
“향후 몇 년간 Koo가 포기하지 않고 마이너리그에서 버틴다는 가정하에, 그의 메이저리그 복귀 가능성을 논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밝지 않다는 건 다들 공감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않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기술적인 보완을 떠나서, 현재의 문제에서 도망치듯 타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군요.”
성공 가능성을 일축하는 사람도 나왔다.
긍정적으로 보는 패널들이 대부분 투수 출신이고, 부정적으로 보는 패널들은 타자 출신이라는 게 조금 재미있었다.
[Koo. 나야, 랜디. 네 마음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힘든 결정이었다는 건 알아. 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줘.]
[소식 들었다, Koo. 많이 힘든 길이겠지만 후회 없이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응원할게.]
다저스에서 함께 뛰던 동료들은 대체로 응원하는 분위기였다.
일반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다들 너무 잘 아니까, 심정적으로 받아들여 준 거겠지.
괜히 SNS에 올렸다가 말뜻이 왜곡되는 걸 우려했는지 다들 따로 연락해온 것도 그렇고.
물론 모두가 그렇게 신경을 써준 건 아니었지만.
[Kyle Kemp @LAD_Kemp]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한때의 동료로서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박도현의 사망 이후, 지난 시즌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로 뛰었던 카일 캠프가 SNS에 남긴 글이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도 전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훨씬 많았고.
그런데 그거야 팀 안팎의 전문가들이 판단할 일이고, 팀워크를 중시하는 메이저리그 선수가 뱉을 만한 말은 아니라는 게 문제지.
[얘는 뭘 잘했다고 또 입을 털어?]
[다른 팀원들은 그걸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이 새끼는 인종차별 발언할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불똥을 동반한 역풍이 카일 캠프에게 튀었다.
심지어 차별 발언으로 출장정지를 받은 전력이 있기에 이 자식의 말이 사람들에게 더 고깝게 들렸을 거다.
‘하핫. 개판이네.’
정작 당사자인 나는 한마디도 안 보탰는데, 인터넷상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다.
내 몸을 통과해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박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는 어째 제리가 조용하다?]
‘걔? 지난번에 쿠사리 먹고 풀이라도 죽었나 보지.’
카일 캠프가 SNS에서 헛짓거리를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년 전이었나, 몇몇 팬들을 저격하는 발언을 올린 적이 있었지.
물론 과격한 팬들의 언행을 좋아하는 선수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걸 대놓고 저격하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다.
그때, 나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을 돌던 투수 제리 헤이즈택이 카일을 대놓고 저격하는 바람에 사건이 커졌다.
‘그딴 거지 같은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면 너를 동료로 인정할 수 없다’라고 했던가?
결국 둘 다 자체 징계를 먹고 얌전해졌지만, 한동안 팀 분위기는 최악이었지.
박도현이 일주일 동안 실책을 3번이나 할 정도였으니까.
‘씨부릴 사람은 씨부리라고 하면 돼.’
에이전시는 물론, 어디서 알아냈는지 내 개인 번호로도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하나같이 거절했고.
트레이닝 센터의 내부 숙박시설에 머물며 거의 셀프 감금 상태로 지내고 있다.
사실 살다 보니까 은근히 편해서 안 나가는 것도 있지만.
‘가자. 얼른 실력을 키워야 저딴 소리도 안 듣는 거야.’
귀신처럼 웃는 훌리안 코치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 * *
“흐읍! 흐읍! 흐읍······!”
“자세 흐트러진다! 정확한 자세로 안 하면 카운트 안 한다고 했지!”
조금이라도 힘을 뺐다가는 가차 없는 고성이 쏟아진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며 강한 탄력의 고무줄을 박자에 맞춰 아래쪽으로 당긴다.
팔꿈치를 일정 각도로 고정한 상태에서의 상하좌우 밴딩 운동.
타격에 쓰이는 근육을 강화하는 한편, 팔꿈치의 움직임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고 한다.
“그만!”
저 걸걸한 목소리가 천사의 나팔 소리처럼 느껴진다.
고무줄을 벗어 던지며 바닥을 뒹구는 내 위로 훌리안 코치님이 슬쩍 지나간다.
“30분까지 타격 훈련장으로 오도록.”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훈련장을 떠나버렸다.
[짜릿짜릿하지 아주?]
박도현이 놀리는 소리에 대꾸할 기력도 없다.
예전에 오프 시즌 기간 함께 이곳에서 훈련할 때도 서로 담당 트레이너도 프로그램도 달라 서로 뭐 하는지는 정확히 몰랐는데.
이 짓거리를 매일같이 하고, 그걸 버텨내는 몸이니 그런 활약을 했구나 싶다.
‘오늘도 안 죽었다.’
훌리안 영감님이 유능하다는 말은 자주 들었는데, 하루가 지날수록 체감이 된다.
당장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확신은 든다.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닐까?’ 싶을 때 한 번 더 하고 끝나는 건 똑같은데, 개수를 세보면 착실히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체력은 근력’의 효과에 따라 심폐 지구력이 성장합니다.]
[‘체력은 근력’의 효과에 따라 근육의 발달을 조정합니다.]
훈련을 진행하면서 이 ‘체력은 근력’의 사기적인 점을 하나 더 알아냈다.
늘어난 근육이 타격에 가장 적합한 부위를 자동으로 강화해줄뿐더러, 수비 훈련 등 유산소 운동을 해도 성장치의 일부가 근력을 늘려주니까.
이론상으로는 무지성으로 몸만 죽어라 굴려도 최상의 타격 컨디션이 유지된다는 거다.
물론 부상 방지 효과 따위는 없으니 알아서 사려야겠지만.
[야, 슬슬 일어나. 지금쯤 세팅 다 끝났겠다.]
‘아······ 나 진짜 쫌만······.’
[지각 한번 해볼래? 별로 권하고 싶진 않은데.]
이 새끼 말 한마디로 사람 쫄게 만드네.
그거 좀 쉬었다고 힘이 돌아온 몸을 이끌고 타격 훈련장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도착해보니, 심판용 보호 장구를 착용한 채 기다리고 있던 훌리안 코치님이 타석을 가리켰다.
“얼른 타석 들어가. 10타석이다.”
“옙!”
마운드에 선 투수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다.
지난 시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하이싱글 A에서 뛰었던 투수 유망주.
우리 에이전시와 계약한 건 아니고, 숙식 제공 아르바이트로 모집했다.
“플레이 볼!”
티 배팅과 토스 배팅 등 기초 훈련을 통해 타자로서의 기본기를 익히고, 나에게 적합한 자세를 찾아낸 후.
타석에서의 접근법을 확립하기 위해 라이브 배팅을 시작한 지 1주일이 넘었다.
처음엔 마운드 위의 투수를 보니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어 치기 좋은 공을 그냥 흘려보내기도 했지만.
“이 머저리야! 니가 아직도 투수인 줄 알아?! 하이스쿨 야구팀 후보선수인 내 외손주도 담장을 넘길 저따위 공을 그냥 흘려보내?! 모금에 낼 현금이 없어서 볼카운트 하나 기부하기로 한 거냐?! 정신 똑바로 차려!”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은 이후로 그따위 감정은 싹 사라지고, 어떻게든 쳐낸다는 독기만 남았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와인드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타이밍을 예상했다.
초구로 존 안에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즐겨 던지는 투수이다 보니, 자연스레 패스트볼 타이밍을 의식하며 팔을 움직였지만.
손끝을 떠나는 공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힘을 주어 팔을 멈췄다.
팡!
치기 좋게 들어오는가 싶더니,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볼!”
라이브 배팅을 갓 시작했을 때는 코치님이 주의해야 할 부분을 하나씩 짚어줬다.
몸쪽으로 오는 공을 일단 참아보면서 어떤 공이 존 안으로 들어오고, 그 공에 어떻게 대처할지 주의 깊게 보고.
겉보기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공에도 배트를 가져가며 히팅 포인트를 찾아내보자는 등.
그런 식으로 타석에서의 접근법을 몸에 익히면서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다.
파앙!
“볼!”
내가 타고난 선구안이 제법 나쁘지 않다는 거다.
먹음직스럽게 들어오다가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훅 떨어지는 포크볼에 손도 대지 않은 지금처럼.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주력으로 삼는다는 두 종류의 변화구로 배트를 이끌어내지 못한 투수의 심정이 편할 리가 없지.
내가 투수 출신인데 설마 모르려고.
그러니까.
후우웅!
헛스윙을 유도할 생각으로 던진 하이 패스트볼도, 존 위로 더 과감하게 띄우지 않는다면.
미리 예상하고 있던 타자한테는 치기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제법 공을 볼 줄 아는 것 같으니, 바깥쪽 공에 제대로 힘을 줘서 때려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봐라. 어차피 몸쪽 보더라인 제구를 완벽하게 해내는 투수는 손에 꼽는다.”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궤적으로 들어오는 공을 끝까지 보면서, 이미 홈플레이트를 지나간 배트를 당겼다.
“어퍼 스윙, 어퍼 스윙 하는데. 그건 스윙의 전반적인 궤적을 말하는 거지, 손목에 인위적으로 힘을 줘서 공을 퍼올리려는 얼간이 같은 짓은 하지 마라.”
날아오는 공과 배트의 스윙 궤적이 완벽하게 맞물리면서, 나에게는 반발력이 거의 전달되지 않았다.
“스윙은 단 하나의 과정에서라도 망설이거나 주춤하면 다 망하는 거다. 릴리즈 포인트가 눈에 안 들어왔다고 해도 멈추지 말고 네놈이 믿는 대로 끝까지 스윙을 마쳐라.”
따아아아악!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이, 좌측 벽에 설치된 그물망에 맞고 떨어졌다.
명백한 홈런성 타구.
오프 시즌이라고는 해도, 이제는 타이밍만 정확하게 읽어낸다면 하이싱글 A 레벨의 투수에게서 홈런을 뺏어낼 수 있게 됐다.
* * *
[오늘의 할 일(2/3)]
아침에 끝낸 체력 훈련에 이어 타격 훈련까지 마치고, 투수를 보낸 뒤 코치님에게 피드백을 받았다.
“몸쪽 공을 아무리 잘 안 던지는 투수라고 해도 가능성에서 아예 빼버리지 마라. 저놈도 네가 몸쪽 공에 소극적이라는 거 눈치 까고 초구 스트라이크 챙겨 갔잖냐.”
“알겠습니다.”
“지금은 볼넷을 노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휘둘러봐야 할 시기라고 했을 텐데. 6번째 타석 쓰리볼 상황 말하는 거다. 치기 좋은 공 들어왔잖아.”
“맞습니다.”
그렇게 피드백이 끝나고, 다음날 훈련 일정을 전달받은 뒤.
평소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훈련장을 나섰을 코치님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꼬맹이 놈만큼 이게 좀 돌아가는 놈은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말야.”
그렇게 말하더니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준들, 해온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놈들이 허다해.”
코치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영광인 줄 알아라. 그놈한테는 이런 식으로 칭찬해준 적한 번도 없었으니까.”
갑자기 왜 그러나 했더니.
박도현을 키울 때는 칭찬 한마디 없이 무조건 굴리기만 한 모양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헤어질 줄은 코치님도 몰랐던 거겠지.
[어우, 저 영감님 왜 저래. 낮술 했나?]
근데 별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이 자식 이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어요.
“저 투수도 저 레벨에서 못 써먹을 놈은 아니지만, 더 좋은 투수의 공을 던져보면 보완점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투수가 나간 쪽을 바라보며 코치님이 입맛을 다셨다.
메이저급 투수가 던지는 공은 이것보다 더 위력적으로 들어오고, 유인구의 변화도 더 크다.
그 수준급의 변화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직접 타석에서 마주하지 않는 이상 절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래도 스프링캠프 임박해서는 부탁할 사람들이 생길 테니까요.”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지금쯤 컨디션을 끌어올리며 슬슬 몸을 만들기 시작하겠지.
새로운 구종을 장착하려는 게 아니라면 굳이 벌써부터 공을 던지지는 않을 거다.
“그때 가서 대처법을 연구하려면 바빠지긴 하겠지.”
“투수로 뛸 때도 강속구 투수 앞에선 그냥 자동 삼진으로 내려왔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부터 공을 관찰이라도 해볼 걸 그랬어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훈련장 입구 쪽에서 무언가 작은 소란이 일어난 듯했다.
“훈련 끝난 것 같은데, 아직도 안 됩니까?”
“어, 끝나긴 했는데······ 코치님이 아직 안 나오셔서요.”
유리문 너머를 슬쩍 내다보니, 장신의 남자가 센터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뭔가 싶어 얼굴을 살피려다가 눈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이 들어오라고 손짓했더니 좋다고 들어온다.
“Koo, 오랜만이야.”
품에 두루마리 휴지 세트를 안고서.
저걸 도대체 왜 가져온 거지.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는군. 아, 물론 걱정한 건 아니야. 나는 아니고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좀 있지.”
애쉬톤 베이스볼 에이전시 소속 선수이자, 나의 메이저리그 데뷔 동기이자, LA 다저스 소속 선발 투수.
그렇다. 선발 투수다.
“······왔네요, 투수.”
“그러게.”
코치님과 빠르게 시선 교환을 마쳤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