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라이브 배팅(2)
첫 타석에서의 삼구삼진을 이끌어낸 커터를 마주한 순간 느꼈다.
만약 이 승부가 3타석짜리였다면 무조건 졌다.
‘이걸 경기 내내 던질 수만 있다면 얘가 명전 가겠네.’
그렇다. 던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결정구라는 게 괜히 볼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에서만 던지는 게 아니다.
공이 위력적일수록 투수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크다는 것은 야구계의 유구한 공식이다.
빠른 템포로 밀어붙였다가, 투 스트라이크에서 커터로 녹아웃.
짧은 승부였다면 이 패턴이 통했겠지만, 10타석짜리 긴 승부라면 아무리 강한 공이라도 타자에게 타이밍이 읽힌다.
특히 휴식기를 가지면서 투구 감각이 둔해진 상태라면 더더욱.
그래서였을까.
‘나한테 심리전을 걸어?’
쓰리아웃도 됐겠다, 타이밍을 좀 생각해보려고 타석에서 내려왔는데.
설마 휴식 없이 계속 던지겠다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너무 얕봤다.’
중간에 코치님이 멈출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지른 거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하기 힘든 소리다.
좀 빡세긴 해도 진짜 10타석을 안 쉬고 잡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들었겠지.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는 동안 던진 공은 고작 아홉 개.
어깨도 딱 기분 좋게 데워졌겠다, 투수로서 가장 ‘뽕’이 차는 순간이니까.
저 상태에서의 지나친 자신감은 독이 된다.
그걸 알려주기 위해, 제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신경질적으로 타석에 돌아갔다.
표정은 딱딱하지만, 타격 루틴은 일정하게.
그렇게 ‘빡치지만 평정을 유지하려는 타자’를 가장했다.
4번째 타석, 초구.
“볼!”
바깥쪽으로 터무니없이 빠지는 서클 체인지업.
뭔가 액션이라도 취해 볼까 순간 고민했지만, 이따위 공에 반응하면 오히려 의심스러울 거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평소보다 조금 큰 동작으로 포수의 공을 낚아챈다.
“볼!”
같은 구종에 같은 코스, 그러나 조금 더 존에 가까운 공이 날아왔다.
배트를 내려다 간신히 참았다는 듯 온몸을 움찔했지만.
‘이 정도면 대응할 만해.’
이 정도 코스는 골라낼 수 있고, 존에 더 가까워지더라도 최소한 커트는 할 자신이 있다.
변화구 타이밍만 읽어내면 제리의 서클 체인지업은 내게 위협적인 구종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파울!”
바로 지금처럼.
예상과는 달리 똑같은 코스로 또 들어온 서클 체인지업을 때려서 파울을 만들었으니까.
‘짜증이 슬슬 올라오지?’
흥분한 내가 헛스윙하길 기대하며 안이하게 던진 공 때문에 불리한 카운트로 몰렸으니까.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무조건 공을 하나 보기로 하며 다시 타석에 들어섰고.
“볼!”
제리의 선택은 존을 한참 벗어난 하이 패스트볼.
이게 흔히 타자가 본능적으로 배트를 내밀 수밖에 없는 공이라고 하던데.
타자로서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가, 나한테는 이 코스가 딱히 먹음직스러워 보이지가 않더라고.
쓰리 볼로 몰린 이 상황에서 투수가 고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포심 패스트볼.
파울이 되든 땅볼이 되든, 무조건 배트를 내기로 하며 와인드업하는 제리를 지켜봤고.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미 스윙 동작에 들어간 상체에 힘을 불어넣었지만.
배트가 홈플레이트 방향으로 뻗어가는 찰나의 순간, 잔뜩 들어간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이게 맞아?’
분명 노리던 코스였는데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배트를 제대로 휘두를 수 없었다.
배트 헤드는 아래로 축 늘어졌고, 몸쪽 포심 패스트볼이 포수 미트에 틀어박혔다.
집중이 풀려서 끝까지 스윙을 못 한. 욕을 먹어도 할 말 없는 플레이였다.
공이 홈플레이트 위를 통과했다면 말이다.
“볼! 베이스 온 볼스!”
볼넷은 결과와 상관없지만, 어쨌든 출루를 빼앗았다.
“······쯧.”
대놓고 불만을 쏟아내진 않았지만, 제리는 한쪽 손을 허리춤에 얹으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펄쩍 뛰지 않는 걸 보니 양심은 있나 보다.
공 하나 정도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빠졌다.
“볼넷은 승패에 상관없다. 알지?”
훌리안 코치님의 말에 대충 고개만 끄덕인 제리는, 포수를 향해 손짓했다.
마운드로 올라온 포수에게 글러브로 입을 가리더니 뭐라뭐라 지시를 내린다.
레퍼토리에 다른 구종이라도 추가하려는 건가.
아무튼.
잠깐 생긴 짬을 틈타, 조금 전 그 이상한 감각을 떠올려봤다.
노림수에 딱 맞는 공이 다가오는데도, 그 본능을 억누를 정도로 강렬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공은 아니라고.
단기간에 수없이 배트를 돌리며 머릿속에 새겨진 가상의 궤적과 어긋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몸쪽 공 하나만 더 줘봐. 확인 좀 해보게.’
그렇게 생각하며 임한 다섯 번째 타석에서, 초구에 기회가 찾아왔다.
조금 전 타석의 마지막 공과 마찬가지로, 몸쪽으로 확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볼.
훨씬 살벌한 소리를 내며 포수 미트에 박혔지만.
“볼!”
이번에는 최소 하나 이상 빠졌다.
유인구인지, 카운트를 잡으려다 빠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이제 몸쪽 패스트볼을 골라내거나 커트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어떡할래?’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몸쪽 패스트볼.
상대가 대응해내는 무기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너는 어떤 공을 던질 수 있을까.
* * *
“그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복잡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제리 헤이즈택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투구 수가 너무 늘어났다. 내 권한으로 잠깐 중지하겠어.”
훌리안 코치의 선언에, 타석에 서 있던 구현기는 아무런 리액션 없이 타석에서 사라졌다.
제리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운드에서 내려갔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느 정도 투구 수가 쌓이면 코치 쪽에서 잠시 중단할 거라고는 이미 계산했었다.
다만, 그가 예상한 형태는 아니었다.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는 데 들인 투구 수가 9개.
바로 다음 타석에서 안이한 판단과 실투가 겹쳐 볼넷을 내줬지만, 곧바로 자기 페이스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웃카운트 하나를 더 잡기 위해 던진 공이 무려 8개.
그것도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풀카운트까지 끌려갔다.
결정구로 던진 커터가 가운데로 밀려 들어가며 빠른 파울 타구가 만들어진 뒤, 적극적으로 승부하지 못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유인구는 귀신같이 골라내다 보니.
‘설마 투수 눈에만 보이는 무슨 습관 같은 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딴 생각이 든다는 것부터가 정신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증거다.
‘내가 말린다고? 지금껏 공만 던졌던 Koo한테?’
모든 타자를 반드시 잡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저 친구는, 구현기는 다르다.
제리에게 구현기는 어디까지나 투수였다.
제구가 뛰어나고, 수 싸움에 능하고, 강인한 멘탈을 지녔으며, 무엇보다 그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기가 막힌 커브를 던지는.
“저, 헤이즈택 씨. 슬슬······.”
“어, 아, 네.”
휴식 시간이 끝나기 5분 전, 포수와 캐치볼을 하면서도 제리는 구현기를 힐끔거렸다.
여느 타자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스윙 연습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제리에게는 확신을 갖고 타이밍을 맞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플레이 볼!”
다시 시작된 승부.
제리는 분위기를 끌어와야 한다는 생각에 커터 두 개를 연달아 던졌고.
“볼!”
“볼!”
한 번 품었던 불편한 감정은 흔적을 남겼다.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으면서 투구 밸런스가 흐트러진 것이다.
패스트볼 두 개가 연달아 존을 벗어나자, 제리는 자연스럽게 오프 스피드 볼을 떠올렸다.
‘무조건 하나 넣어야 해.’
볼넷은 승부에 영향을 주지 않고, 이 정도 밸런스는 라인 근처로 몇 개 넣었다 뺐다 하면 금방 되찾을 수 있을 테지만.
당장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느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떨어지는 체인지업.’
바깥쪽으로 배트를 유혹하는 서클 체인지업에는 타이밍이 눈에 익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낙폭을 주는 체인지업은 상대적으로 덜 써먹다 보니 제구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대충 아래쪽만 파고들어도 최소 파울은 뺏는다는 계산도 있었고.
그렇게 와인드업을 하고, 팔을 휘둘렀다.
“흡!”
손끝에서 공이 떠나고 나서야 떠올렸다.
모든 게 계산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매섭게 돌아간 배트가 충분히 가라앉지 않은 체인지업과 부딪히는 순간.
따아아아악―!
소리만 들어도 정타였다.
승부의 끝을 예감한 제리가 글러브를 낀 손을 축 늘어뜨렸다.
그런데, 타석에 선 구현기는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는 대신 고개를 갸웃하며 배트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훌리안 코치를 보니, 그 역시 애매한 표정으로 펜을 돌리고 있었다.
‘설마······ 라인드라이브인가?’
타구의 속도는 빨랐지만, 야수 방향으로 향했다는 것.
투수인 자신으로서는 당연히 아웃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고, 타자 본인과 훌리안 코치도 긴가민가한 모양이었다.
“어이, 주심.”
“아, 예.”
훌리안 코치의 부름에 주심이 마스크를 벗었다.
“자네 다저스 유격수 알지? 수비 좀 한다는 친구들은 다 체크하고 있을 거 아닌가.”
“네, 그렇죠.”
오늘 주심을 맡은 사람은 구현기의 수비 인스트럭터.
트레이닝 세션 연구를 위해서라도 웬만한 수비수들의 플레이는 전부 체크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친구였다면 방금 공 잡았을 것 같나?”
주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잡았죠. 카일 캠프라면.”
제리 자신과는 성격도 안 맞고, 인종차별 발언 전적도 있어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카일 캠프의 수비만큼은 진짜배기다.
내셔널리그 골드 글러브 최종 후보에 세 차례나 이름을 올릴 정도니까.
“그럼 아웃. 네 개 남았다.”
올라간 아웃카운트에도 제리는 기뻐할 수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 급의 유격수가 아니라면 안타가 될 타구라는 뜻이니까.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유니폼 소매로 훔치며, 제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지금 제구가 될 만한 공 중에서, 타자 눈에 덜 익은 구종.’
제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첫 타석에서 체크스윙을 유도했던 몸쪽 슬라이더였다.
생각보다 몸에 가까이 붙는 바람에 놀라서 지금껏 피했지만, 존 안쪽을 보고 던지면 괜찮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배트 좀 내라. 몸쪽 공도 대응 잘하더만.’
속으로 주문을 외며 공을 던지자마자, 손끝의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꼈다.
제대로 채인 슬라이더는 평소보다 격한 변화를 보인다.
같은 손 타자였다면 헛스윙을 유도하기 쉬운 공이지만, 반대 손 타자에게는―
퍼억!
“윽!”
바로 지금처럼, 몸에 맞는 공을 내줄 위험성이 있다.
제리는 자기도 모르게 마운드에서 내려와 구현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 저기, Koo.”
맞기 직전 몸을 돌리는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어디에 맞았는지는 미처 보지 못했다.
만약 골반 근처에 맞았으면 최소 미세골절이다.
게다가 타이밍도 최악이었다.
안타성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나온 뒤, 바로 다음 타석 초구가 몸에 맞는 공.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에 신경질이 나서 던졌다고 오해하기에 딱 좋았다.
“이 새끼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훌리안 코치의 호통에, 제리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들고 있던 수첩을 집어던지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타자를 걱정해?! 니가 그러고도 투수야?! 당장 마운드 처 올라가서 마저 공이나 던져!”
자기 제자를 맞췄다고 날뛰는 줄 알았더니, 전혀 뜻밖의 이유로 화내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제리는 구현기를 바라보았다.
언제 일어났는지, 맞은 부위를 문지르지도 않은 채 다시 방망이를 툭툭 치며 타격 루틴을 가져가고 있었다.
‘Koo, 저 자식이······.’
구현기의 타자 전향 소식을 들었을 때, 제리에게는 그것이 사실상 은퇴를 각오하고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구현기를 언젠가 다저스의 1선발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할 라이벌로 여겼던 제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말리기 위해 찾아왔다.
절망에 빠진 친구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몰아세우기 위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제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구현기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글러브에 공을 집어넣었다.
타석에 선 구현기와 시선이 마주쳤고.
“흐읍!”
우렁찬 기합과 함께 제리는 공을 뿌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구현기 자신에게서 배웠던 공.
공의 낙폭이 탐나서 가르쳐달라고 애원했지만 막상 던져보니 손에 안 맞아서, ‘너는 지금 커브를 던지는 게 아니라 똥을 던지는 거야!’라는 치욕스런 소리를 들었던 바로 그 공.
낙차만 클 뿐, 시속 70마일도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슬로우 커브에 구현기의 배트가 딸려왔다.
틱!
데구르르르······.
힘없이 굴러간 타구가 제리를 향해 굴러왔고.
제리는 가볍게 공을 주워서 1루를 향해 송구 자세를 취했다.
“······아웃!”
주심이 한 박자 늦게 선언했고, 구현기는 황망한 표정으로 배트를 늘어뜨렸다.
제리는 뒤돌아서며 글러브로 얼굴을 덮었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아마 구현기도 짐작하고 있을 거다.
‘짜릿해. 늘 새로워. 최고야.’
메이저리그 선발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마이너 시절부터 투수조 안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지냈던 이유는.
두 사람 다 타자를 엿먹일 때 희열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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