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스프링캠프(1)
“이건 그냥 배트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배트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던 도중.
평소 쓰던 배트와 무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가 다른지 좀 보이냐?”
“조금······ 굵어졌네요. 무게도 약간 늘었나?”
직접 들고 휘둘러보니 무게 차이가 조금 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웬일이래? 배트 무게 함부로 늘리는 거 극혐하는 양반이.]
과거에는 무거운 배트가 장타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부상의 위험도 그만큼 높았다.
적절한 무게의 배트를 사용하고, 기술적 접근으로 장타력을 늘리는 것이 최근 메이저리그 트렌드.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아예 가벼운 배트와 정확한 컨택의 조화를 추구한 타자가 바로 박도현이다.
“사실 타자로서는 첫 시즌이고 부상 위험도 있으니까 쓰던 걸 쓰려고 했는데······ 이걸 써도 문제는 안 되겠더라.”
“무게가 어느 정도 늘어난 겁니까?”
“2온스(약 57g). 느낌이 좀 오냐?”
수치상으로는 작은 차이일지 몰라도, 800g대와 900g대는 휘두르는 느낌 자체가 다르다.
“너, 배트 컨트롤을 해줄 때 타격 밸런스가 조금 흔들리는 경향 있는 거 알지?”
“아, 네. 특히 실패했을 때 영향이 좀 크더라고요.”
헛스윙 이후 밸런스가 흐트러지는 거야 남들도 자주 겪는 일이라지만.
배트를 간신히 멈추거나 궤적을 바꿔 컨택에 성공하더라도 평소보다 감각이 둔해지는 걸 느꼈다.
“가진 파워에 비해 너무 가벼운 배트를 쓰면 그럴 수 있다. 이걸로 스윙하는 데 익숙해지면 좀 덜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 더 휘둘러 봤다.
조정을 마치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묵직하게 감기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와, 내가 1온스만 늘리고 싶다고 했을 땐 겁나 뭐라 그러더니······. 하여간 피지컬 좋은 놈들이 다 해먹네.]
박도현이 투덜거리는 것도 이해는 간다.
팔 길이, 근력, 내구도 등등. 피지컬은 플레이의 상한선을 늘려주는 중요한 재능이니까.
프로필상 180cm지만, 실제로는 179cm도 간당간당한 박도현으로서는 아쉬운 게 많았겠지.
근데 이 새끼 그 피지컬로도 메이저리그에서 매 시즌 40홈런 이상씩 뻥뻥 때려냈잖아.
이해 간다는 거 취소다. 재능충 같으니라고.
“그리고 하나 더.”
그러더니 훌리안 코치님은 내 앞에 서서 손으로 사각형의 존을 그렸다.
“작은 꼬맹이, 네놈이 타석에서 대응하는 공이 대략 이 정도 범위로 들어오지?”
스트라이크 존보다 약간 여유가 있는 크기의 존.
자기만의 히팅 존을 설정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뒤로 항상 이렇게 접근해왔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해준 장본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너같이 공 좀 본다 싶은 놈들이 꼭 하는 짓거리가 있지.”
“그게 뭡니까?”
“자기 존에서 빠진다 싶으면 기다리는 거.”
그렇게 말하더니, 조금 전보다 공 한 개 정도 넓은 존을 새로 그렸다.
“네가 생각한 구종과 타이밍이 적중한다면, 최소 이 정도 범위에서는 배트가 나와야 돼.”
존을 벗어나는 공에도 배트를 내야 한다니.
지금까지 배운 것과 모순되는 것 같은 그 말에 내가 멍 때리고 있자, 박도현이 덧붙였다.
[히팅 존이 너무 좁으면 주심에 따라 성적이 좌우되고, 투수와 싸울 무기가 줄어들어서 그래.]
‘주심은 알겠는데, 무기라고?’
[너 투수 할 때, 유인구로 던진 벗어나는 공을 타자가 계속 컨택하면 압박감 느끼지 않았냐?]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갔다.
투구 수는 늘어나지, 던질 수 있는 코스는 점점 줄어들지.
차라리 맞춰버리고 내보내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타자들이 꼭 있다.
“배트 컨트롤이 좋아지면 히팅 존을 더 넓혀도 배럴 타구가 나올 확률이 올라갈 거다.”
그날부터 훈련 프로그램이 조금씩 바뀌었다.
나에게 맞는 배트를 사용하며 더 유연한 스윙을.
유연한 스윙을 바탕으로 더 적극적인 컨택을.
쉬운 목표는 아니었고, 특히 타격을 본격적으로 배운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양반이 성질은 더러워도 남한테 못 하는 거 안 시켜. 니가 할 수 있다고 봐서 시키는 거야.]
훌리안을 믿고 따른 끝에 메이저리그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 옆에서 그렇게 얘기하는데, 포기할 수가 있나.
달콤한 과실이 당장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처럼 하루하루 조금씩이라도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물론 모든 게 다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 * *
수비 훈련 시간.
매일 이 시간만 되면 유니폼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굴러다닌다.
“휴식 끝! 마지막 세트 갑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연습장 한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지금 하고 있는 건 유격수 수비 연습.
올겨울 내내 나는 내야 전 포지션의 수비를 익혀왔다.
일단 내가 주 포지션을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도 이유지만, 여차할 때 다른 포지션을 소화할 수 없는 야수를 로스터에 남겨두는 구단은 없으니까.
“1루!”
트레이너가 신호를 보내며 땅볼을 쳐냈다.
타구를 글러브로 붙잡아, 재빨리 잡아 빼고는 1루 위치에 서 있는 직원에게 던졌다.
송구가 팡,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글러브에 박히기가 무섭게 트레이너가 다시 외친다.
“2루!”
아까보다 힘이 실린 타구가 날아왔다.
첫발을 조금 늦게 떼며 글러브에 공이 아슬아슬하게 걸쳤고, 재빨리 몸을 일으켜 2루 쪽으로 송구했다.
불필요한 스텝이 한 번 들어가긴 했지만, 방향은 정확했다.
“방금 그건 스타트 빨랐으면 세이프입니다! 다시 1루!”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해주는 피드백 외에도, 반응 속도, 송구 속도 및 정확도 등 훈련 내용이 다방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리고 던진 끝에.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훈련장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있자니 수비 코치가 다가왔다.
“처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더, 더, 더 많이 늘어야 해요.”
“하하하······.”
수비 코치는 훌리안처럼 사람을 쏘아붙이지는 않지만, 조곤조곤 뼈를 때리는 스타일이다.
첫날 훈련을 마치고 난 뒤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 모든 끔찍한 것들을 마주친 사람의 표정이 딱 저렇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특히 핸들링. 이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글러브에서 공을 빼는 속도를 더 올리지 않으면 잡아낼 수 있는 주자의 수가 대폭 줄어들 겁니다.”
문제의 원인은 알고 있다.
글러브로 공을 받아낸 다음 최대한 빨리 오른손으로 옮겨야 하는데, 이때 무의식적으로 변화구 그립을 잡는 것.
변화구의 제구력을 잃어버린 나로서는 특히 더 치명적이다.
무심코 커브 그립으로 던졌다가 1루수 키를 한참 넘기는 송구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으니까.
'오른손으로 던지던 습관이 남아 있어.'
어린 시절, 원래 쓰는 손과 반대 손으로 공을 던져야 롱런할 수 있다는 돌팔이 감독을 만난 나는 오른손으로 공을 던졌었다.
불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완으로 전향하고 나서야 그게 개소리라는 걸 알았지.
아무튼 그때의 기억을 살려, 최후의 보루로서 우완투수 재전향을 시도해보기도 했는데.
이게 또 오른손으로 던지는 커브가 생각보다 제구가 잘 돼서, 어떻게든 살려보자고 진짜 한 수천 구는 던졌던 것 같다.
반대로 패스트볼 구위가 못 써먹을 수준으로 떨어져 결국 포기하긴 했지만.
덕분에 우투가 기본인 내야 수비에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지금처럼 그립을 의식하면서 공을 빼내면 딜레이가 생긴다.
수치상으로는 그리 크지 않지만, 발빠른 주자를 잡아내기 어려워질 정도의 차이는 난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에 나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나를 쳐다보고 있던 수비 코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지만, 다음 시즌부터 구단에서 고민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네? 무슨 고민이요?”
“기본기가 부족한 걸 보면 1루에 세워야 할 것 같은데, 정작 그러기엔 운동 능력과 타구 판단 센스가 아깝거든요.”
명예의 전당에 반드시 유격수로 올라가야 한다는 제한은 없었기에, 나도 내심 1루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야수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질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거지.
[그래, 임마. 원래 송구보다 포구가 훨씬 까다로운 건데, 넌 그건 잘하잖아.]
‘그래, 고맙다.’
둘 중 하나만 능하다는 건 결국 활용도가 한정된다는 뜻이니, 솔직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유격수의 송구 능력은 1루수의 포구 능력에 좌우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송구와 포구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까.
“기운 내세요. 저는 사실 되도 않는 내야수를 고집하다가 그나마 올라온 타격감도 말아먹고 마이너만 전전하는 선수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입니다.”
수비 코치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옷에 묻은 흙을 손수 털어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기운을 내주길 바란다면 그런 살벌한 소리는 안 꺼내는 게 좋았을 텐데.
“메이저 투수를 상대하면서 타격감이 올라갔듯, 실제 연습경기를 뛰다 보면 새로 눈뜨는 게 생길지도 몰라요.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 말 그대로였다.
어차피 명예의 전당 못 가면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 조급해져 봤자 나만 손해다.
마른 우물에 물을 붓는 심정이었지만, 분명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메이저리그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왔다.
* * *
스프링캠프.
미국에서는 ‘스프링 트레이닝’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이것은, 선수들의 경기 감각을 되찾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지만.
개막 로스터의 빈자리를 두고 옥석을 가려내는 것 또한 중요한 목적이다.
“하던 대로만 하면 어디 가서 욕먹진 않을 거다, 작은 꼬맹이.”
트레이닝 센터를 떠나기 전날, 항상 바락바락 소리나 질러대던 훌리안 코치님의 마지막 말에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학창시절 거지 같은 수련회 마지막 날 감성팔이를 시전하던 조교들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지긴 했지만.
“Koo,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좌절하지 마세요. 저도 플레이를 계속 체크하며 개선점을 찾아보겠습니다.”
수비 코치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뻔했다.
송구 시 핸들링은 나름 안정적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반 템포쯤 느린 건 고치지 못했으니까.
결국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겠지.
“내리시죠, Koo.”
“고마워요 데릭.”
LA 다저스의 스프링캠프 야수조 소집일.
첫날이니만큼 특별히 데릭이 직접 데려다주었다.
소지품을 챙겨 훈련장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데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머지않아 Koo를 다시 메이저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뒤돌아보며 한 번 씩 웃어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임마. 재능은 형이 아낌없이 줄 테니까, 응? 빠꾸 없이 직진 가즈아!]
‘아 좀 싸물어.’
얘는 죽어서도 말이 너무 많다.
솔직히 뭔 말을 해도 상처받지를 않으니 말로 이길 자신이 없다.
훈련 영상을 돌려볼 때 나름 유용한 피드백을 주는 건 고맙다만.
[업적 ‘스프링캠프 참여’를 달성했습니다.]
[2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 4560]
오프시즌 내내 훈련과 몸 만들기를 동시에 하고, 휴식일에도 체력 훈련으로 인정되는 런닝을 빼놓지 않으며 10포인트씩 살뜰하게 모은 결과.
다시 재능을 뽑을 수 있는 포인트의 거진 절반가량을 모았다.
새삼 드는 생각인데, 훈련만으로는 포인트 수급이 너무 느리다.
돌발 미션으로 얻은 700포인트가 없었으면 더 느렸겠지.
[자신은 있어?]
‘무슨 자신.’
[뭐긴 임마. 우리 팀 기존 내야수들 밀어낼 자신 있냐고.]
대답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시스템상 한 번 메이저리그에 정착한 사람은 어지간한 실력으로 밀어내기 어렵다.
솔직히 실력적인 문제 외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지만, 적어도 눈도장은 확실하게 찍어놓겠다는 생각으로 덤벼야지.
“저기 온다!”
“Koo! Koo!”
훈련장 입구에는 취재진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작년에는 재활에 집중하느라 참여하지 않았고, 재작년에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구단 측에서 미리 제한을 뒀을 텐데도 이 정도라니.
“타자로서 첫 스프링 트레이닝에 임하는 기분이 어떤가요?”
“이번 타자 전향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 말씀해주시죠!”
“필드에서 수비해본 경험이 없을 텐데, 이에 대한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실 생각입니까?”
좀 전부터 조잘조잘 떠들어대던 박도현이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영어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뺀질대니까 취재진이 몰려오면 통역 눈만 보면서 웃는 거 아냐.
취재 요청의 유일한 순기능을 만끽하면서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새로운 도전을 할 생각에 두근거립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에이전시에서 소개해준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타자로서의 기본기를 갖추었습니다. 결과는 이번 스트링 트레이닝에서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또한 걱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만 이 또한 제가 이겨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인터뷰는 이렇게 하는 거다, 친구야.’
[응. 안물안궁.]
‘너 지금까지 키웠던 애들하고는 어떻게 얘기했냐? 영어도 못하는 게.’
[나는 그냥 한국어로 말하는데, 걔네들 머릿속에는 걔네 언어로 들리는 모양이더라.]
정해진 시간을 약간 넘겼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조금 시간을 더 내서 취재에 응했고.
마지막으로 포즈 좀 취해준 다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구현기 선수!”
조금 전과는 다른 언어가 튀어나와서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뭐야, 저 인간이 여기 왜 왔어?]
얼굴 볼 필요도 없이 저 벗겨지다 만 머리만 봐도 알겠다.
한국에서 오신, 나랑 별로 좋은 인연은 없는 기자님.
“기자님, 정해진 시간이 지났으니 다음 기회에······.”
“아뇨, 아뇨.”
입구 앞에서 대기하던 구단 직원이 내 등을 떠밀었지만 괜찮다고 만류했다.
여기서 그냥 무시하면 또 뇌피셜로 기사나 쓸 거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 먼 길을 왔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스포츠문화 이재상 기자입니다. 시간 관계상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눈을 치켜뜨며 내 쪽을 쳐다보던 이재상 기자는 번들번들한 이마를 손수건으로 쓱 훔치더니 입을 열었다.
“좌투수의 내야수 전향은 굉장히 드문 일인데요. 혹시 박도현 선수에게서 영향을 받아서 이런 결정을 내렸나요?”
한국어를 모르는 구단 직원이나 다른 기자들의 시선이 전부 내 쪽으로 쏠린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질문이었는데, 이게 또 팩트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박도현과 우연히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야수 전향은커녕 아예 야구를 그만뒀을 거다.
저 인간이 어떻게 알았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이제 막 스프링캠프 들어가는 선수에게 이따위로 똥을 뿌려?!]
그래서 분개하는 박도현을 보기 전까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저 양반은 내가 어떻게 대답하건 그냥 자극적인 기삿감을 뽑아내는 데 혈안이 된 거다.
내가 그게 맞다고 인정하면 ‘구현기, 故 박도현과의 충격적 사연 밝혀’ 뭐 이런 식으로 쓸 거고.
조금이라도 정색하면 ‘구현기, 故 박도현 이야기에 불쾌한 심경 내비쳐’ 이러면서 나를 이상한 놈으로 만들겠지.
그거보다 더한 짓거리도 해온 인간이니까.
[야, 이딴 질문 받아줄 필요 없어. 그냥 들어가자.]
실력에 비해 제법 고분고분한 편이라 한국 언론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박도현은 모른다.
여기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라는 걸.
‘해주지 뭐, 대답.’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띤 이재상 기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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