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스프링캠프(3)
스프링캠프 첫날, 모든 훈련을 마친 뒤.
LA 다저스의 코칭스태프들은 회의실에 모여 훈련 결과를 공유했다.
“투수조에서는 이 친구를 내려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에 비해 아직까지 구속이······.”
“이 친구는 블로킹 센스가 아직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며칠 전부터 소집되어 훈련에 임하던 투/포수조에서 탈락자를 가려내는 건 쉬운 편이다.
그러나 첫날 훈련만으로 타자들 중 모자란 이들을 골라내는 건 비교적 어렵다.
어디까지나 평소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여기 마지막 조는 왜 이렇게 성적들이 저조하지?”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의 물음에 해당 훈련을 참관했던 수석 코치가 대답했다.
“Koo가 이 조와 함께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작년까지 투수였던 선수에게 밀릴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군요.”
구현기와 가까운 배팅 케이지를 사용했던 유망주들이 특히 크게 흔들렸다.
평소보다 취재진의 수도 많았으니, 자칫 잘못하면 전국적으로 창피를 당할 수도 있다는 불필요한 압박도 느꼈겠지.
수석 코치의 설명을 들은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다 내려보내자고.”
훈련 결과표에 밑줄을 그었다.
“아직 첫날인데, 이렇게나 내려보내도 괜찮을까요?”
“남 훈련하는 데 정신 팔려서 자기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놈들한테 무슨 기대를 하겠어?”
언론에서 다루는 이미지는 유순한 편이고, 선수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드문 오브라이언 감독이지만.
선수의 자질을 평가하는 데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한 그이기에, 본인이 생각하기에 함량 미달인 선수를 쳐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서, 자네가 보기에 Koo는 어땠나? 제대로 준비해왔나?”
수석 코치는 낮에 훈련장에서 보았던 구현기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 상태도 문제가 없었고, 타격 기술도 생각보다 몸에 익은 모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구현기는 오브라이언 감독이 지켜봐온 유망주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빅리그에 적응한 이들 중 한 명.
어쩌면 야구에 대한 열정이 차갑게 식은 상태에서 마지막 유희로서 타석에 서려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훈련 기록을 보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그럼 Koo는 가능하면 기회를 계속 주는 방향으로 하자고.”
“계속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일단 시범경기에 세 경기 정도 출전시켜. 나머지는 그 이후에 판단하고.”
아직 수비 훈련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에 포지션은 천천히 생각해봐야겠지만.
어차피 실력이 끔찍한 수준이 아닌 이상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정규 훈련 시간이 종료된 후 MLB 공식 사이트의 대문은 스프링캠프장 입구에서 인터뷰를 하는 구현기의 사진이 장식하고 있었다.
이목이 쏠릴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렇게 반응이 빠를 줄은 예상 못 했다.
아무리 선수 기용이 감독의 권한이라고는 해도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선수를 내려보내는 건 조금 부담스러운 일인데, 준비를 잘해왔다니 오히려 다행이다.
“다음 순서는 뭔가?”
“라이브 배팅 파트너를 짜야 합니다. 우선 베테랑 투수들을······.”
한 시즌의 향방이 달려 있는 스프링캠프.
코칭스태프들의 밤은 그렇게 깊어졌다.
* * *
첫날 훈련을 마치고부터 달라진 것들이 있다.
우선 훈련 시간에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사라졌다.
첫날 내 훈련에 정신이 팔려 집중력을 잃었던 선수들이 뭉텅이로 사라진 걸 보고 느낀 게 있었겠지.
또, 나를 ‘투수’로 보는 사람이 없어졌다.
이건 비단 나를 아니꼽게 보던 사람들 말고도, 친근하게 다가오던 동료들에게도 포함되는 거였는데.
겉으로 내색은 안 하더라도, 내 타자 전향이 현실도피인 줄 아는 생각보다 많다는 걸 느꼈다.
내 커리어를 걸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게 다저스의 동료들에게도 전해졌는지.
친절하게 말을 거는 건 그대로였지만, 괜히 타격에 대한 조언을 한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둘쨋날 훈련을 마치고 감독님이 나를 따로 호출했다.
“시범경기까지는 무조건 기회를 줄 거니까, 훈련할 때 괜히 무리하지 마. 부상은 항상 조심하고.”
감독실을 나오자마자 박도현이 놀려대듯 말했다.
[올, 특급 유망주~ 나도 감독님한테 이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
‘우리 첫 스프링캠프 땐 감독님 안 계셨잖아······.’
이듬해부터 박도현은 바로 주전 유격수로 낙점됐기 때문에 기회를 주니 마니, 그런 소릴 할 필요는 없었다.
[시범경기에 나가면 지금보다 포인트가 훨씬 많이 들어오니까 좀만 기다려봐!]
물론 상대하는 투수의 실력이나, 타점이나 득점 등 내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상황 등등 변수는 많지만.
지금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지겠지.
[오늘의 할 일을 끝냈습니다.]
[6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4960]
스프링캠프 기간이랍시고 획득 포인트가 2배로 늘긴 했지만, 여전히 훈련으로 얻는 포인트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스프링캠프의 일정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수비와 번트 등등, 야수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능력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주인 잃은 라커가 늘어갔고.
처음엔 라커를 나눠 쓰던 초청선수들도 각자 하나의 라커를 차지하게 된 어느 날.
“각자 지금 나눠준 조와 진행 순서를 숙지하도록!”
“예!”
다양한 상황을 재현하며 대처 능력을 보는 모의 수비 훈련.
오전조와 오후조로 나눠 수비수와 주자 역할을 번갈아 수행한다.
사실상 상대 조와의 직접적 경쟁이라고도 볼 수 있지.
“다음! Koo! 2루수 위치로!”
“예!”
현재 확정된 포지션 없이 내야 전 포지션에서 훈련을 소화하고 있는 나는 이번에 2루수 자리에 서게 됐다.
그나마 자신 있는 1루수였다면 좋았을 테지만, 메이저 캠프에 살아남아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안녕, Koo. 너랑 키스톤을 짜게 되다니, 정말 놀랍네.”
재수 없는 표정으로 유격수 자리에 선 카일이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카일! SNS에서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네!”
“······하하.”
카일의 미소가 찌그러졌다.
첫날 함께 찍은 사진을 자기 SNS에 올리며 친분을 과시한 카일이었지만.
원래 해놓은 밉상 짓이 있다 보니, 구단을 향한 성토의 목소리는 줄어들었을지언정 딱히 그의 이미지가 좋아지지는 않았거든.
“아직 내가 몸이 덜 풀려서, 송구 받을 때 주의해줬으면 좋겠어.”
설마 깽판이라도 쳐 보겠다는 건가.
수비 원툴로 주전 자리를 먹고 있는 입장에서 그러면 곤란할 텐데.
아무튼 그 말을 남기고 본인의 수비 위치로 돌아간 카일을 뒤로한 채.
모의 수비 훈련이 시작되었다.
“타자 주자는 타구와 함께 출발한다. 알겠나?”
일반적인 수비 훈련과 다른 점은, 타자 주자를 두고 아웃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
배터 박스에서 스윙 없이 바로 출발하는 만큼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다소 불리하다.
“써드(3루수)!”
“세컨드(2루수)!”
“숏(유격수)!”
코치는 수비수를 지정하기가 무섭게 타구를 날려대니, 잠깐이라도 멍 때리고 있다가는 타구를 놓치기 십상이다.
“세컨드!”
박도현이 말하길, 정상급 내야수는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타구의 방향을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경우 거의 본능에 가깝게 첫발이 나간다고 하던데, 나한테 그 정도의 미친 재능은 없고.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와 타구의 방향을 조합해서 이 정도 바운드가 나오겠구나, 뭐 이런 나름의 방식으로 타구를 판단하고 있다.
그렇게 판단한 이번 타구는.
‘미친 거 아냐? 이게 2루라고?’
딱 봐도 1루 쪽으로 치우친, 속도가 조금만 빨랐어도 무조건 안타가 됐을 타구.
저거 봐. 1루수도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나 움찔하잖아.
‘에이 씨, 까라면 까야지······!’
박도현이 그랬다.
어려운 타구를 보고 ‘저거 못 잡겠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면, 그 선수는 내야수로선 끝났다고.
생각보다는 몸이 먼저 나와야 한다 이거지. 지금처럼.
촤아악!
애매하게 굴러가던 땅볼을 슬라이딩으로 간신히 포구했다.
일어나서 던지기는 이미 늦었고, 슬라이딩하던 시점에서 글러브에 집어넣은 오른손으로 공을 잽싸게 빼낸 다음.
무릎만 간신히 일으켜 밀어내듯 1루수에게 토스했다.
내야수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안정적인 처리는 아니었지만.
1루수가 팔을 쭉 뻗어 내미는 글러브에 정확하게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아웃!”
1루심을 맡은 코치의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안도할 틈도 없이 바로 몸을 일으켜 원래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아직 훈련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거기! 바구니 하나 더 가져와!”
구단 직원이 공 바구니를 가져오며 생긴 찰나의 틈에 간신히 숨을 고르려는데.
[훈련 상황에서 놀라운 수비를 선보였습니다.]
[2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내게, 남들 눈에 안 보인다고 외야 쪽에서 어슬렁거리던 박도현이 말을 걸었다.
[이런 식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활약을 하면 추가로 포인트를 벌 수 있어. 실제 정규시즌에서는 이것보다 더 많이 주고.]
스프링캠프에서 열심히만 하면 포인트를 벌어갈 수 있을 거라더니, 이런 시스템이 있었구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새로 가져온 바구니가 텅 빌 때까지 한참을 굴렀고.
추가로 40포인트를 더 얻으며, 하루 훈련에 달하는 포인트를 벌어들이고 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주자 있는 상황에서! 주자는 호명하면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예!”
주자 1루 상황에서 병살을 잡아내야 하는 상황.
유격수 정면으로 굴러간 땅볼을 잡아낸 카일의 송구를 받아내려고 2루 베이스로 달려가는데.
‘이 새끼가······?’
제법 빠른 송구가 거의 머리 높이로 들어왔다.
베이스를 밟은 채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포구했다.
“아웃!”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을 무시하며 공을 뺀 다음.
재빨리 베이스에서 발을 떼고는 반대쪽 발을 축 삼아 상체를 돌리며 1루를 향해 던졌다.
팡!
“아웃!”
한숨 돌리고 있자니, 멋쩍은 웃음을 지은 카일이 글러브를 흔들어 보이며 사과했다.
“미안, Koo! 오랜만이라 영점이 안 맞았어!”
영점은 개뿔.
수비로 먹고사는 유격수가 이 정도 훈련도 안 해 왔을까.
조심 좀 하라고 정색이라도 해주려던 순간, 안내음과 함께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훈련 상황에서 까다로운 수비를 선보였습니다.]
[1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좀 전에 몸을 날려 가며 잡아낸 땅볼 타구만큼 화려한 플레이는 아니지만, 동료의 실책을 커버하는 플레이에도 포인트가 지급되는 모양이다.
정색? 동료끼리 이런 거 가지고 정색은 무슨.
싱글벙글 웃으며 글러브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마, 카일! 마음껏 던져! 내가 다 받아줄게!”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는지 카일의 표정이 또 일그러졌다.
처음 송구처럼 대놓고 위험하게 오면 자기 평가도 내려갈 거란 걸 모를 리가 없기에.
속도와 타이밍은 정확하지만, 초보 내야수라면 빠트리기 쉬운 묘하게 어긋난 송구가 연달아 날아왔다.
“카일! 송구 조금만 더 신경 써 주고! 다시 숏!”
물론 그래 봤자 눈썰미 좋은 코치에게는 걸릴 수밖에 없다.
찔끔한 카일이 제대로 된 송구를 보내오면서 포인트 복사 이벤트는 아쉽게도 일찍 끝났다.
* * *
체력 훈련과 스윙 연습을 훈련 시작 전 미리 마쳐둔 덕에 오전 수비 훈련이 끝나자마자 보상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
[오늘의 할 일을 끝냈습니다.]
[6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5080]
훈련 상황에서 제법 쏠쏠하게 포인트를 모으면서, 드디어 뽑기에 필요한 1만 포인트의 절반을 모았다.
맨날 이 훈련만 했으면 좋겠네.
물론 카일과 짝을 이루지 않았으면 이만큼 못 벌었겠지만.
[카일 그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너무하네.]
그런데 뜬금없이 박도현이 분기탱천하고 있었다.
[유격수라는 놈이 송구를 그따위로밖에 못 보내? 대체 겨울 동안 얼마나 놀아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조나단과 함께 명전에 도전했어야 박도현이 행복했을 것 같다.
눈치 더럽게 없는 놈들끼리 사이좋게 짝짜꿍했겠지.
“Koo! 얼른 밥 먹으러 가요!”
얘도 양반은 못 되나 보다.
“아냐, 난 오늘 간단하게 먹을래.”
“그래요? 이따 봐요! 랜디! 저예요, 조나단! 밥 먹으러 가는 거면······.”
언제 친해졌는지, 넉살도 좋게 팀의 대타 요원 랜디와 어깨동무를 하고 사라진다.
[쟤 평소처럼 막 주워 먹으면 이따 토 나올 텐데. 랜디가 잘 가르쳐주겠지?]
‘본인 책임이지.’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식당은 평소처럼 뷔페식 식단이지만, 도시락 형태의 간편식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오후에 빡세겠다 싶을 때 간단하게 먹고 한숨 돌리면 딱이지.
간편식 줄로 가보니 역시나 잔뼈 굵은 내야수들로 가득하다.
[어, 야. 저기 조나단이랑 랜디 있다. 나 잠깐 보고 올게!]
뷔페에서 막 음식을 담으려던 두 사람을 발견한 박도현이 잠시 사라지고, 나는 도시락 줄로 향했는데.
“아, Koo.”
줄의 맨 끝에는 카일이 서 있었다.
“어디 다친 덴 없어? 아깐 미안해. 몸이 좀 늦게 풀렸지 뭐야.”
차라리 쌩 까던가,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런 소리 해 봐야 짜증만 난다.
그러라고 하는 소리겠지만.
“아냐. 조금 까다롭긴 해도 다들 못 잡을 타구는 아니었는데 뭐. 내야수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카일의 표정이 다시 썩는다.
박도현처럼 단순한 애들은 이러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마는데.
얘처럼 사람 말 확대해석하는 버릇이 있는 애들한테는 이런 말투가 딜이 참 잘 박힌단 말이야.
“캠프 씨! 고르세요. 뭐 가져가실래요?”
어느덧 줄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쌓아둔 도시락 박스 중 대충 손에 잡히는 걸 집어 든 카일은 내 쪽을 돌아보더니.
“Koo, 맞지 않는 옷을 계속 입으려고 고집부리다가는 진짜 다칠 수도 있어.”
어째 표정 관리가 좀 안 되는 것 같더라니.
지금까지와 비교하자면 조금 선을 넘은 소리를 지껄였다.
“뭐라고, 카일?”
웃음기를 지우고 되물었다.
그러자 카일이 움찔하더니, 도시락 봉투를 품에 안고는 슬슬 멀어진다.
“······이따 주루 훈련 말이야. 무리하면 부상당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점심 맛있게 먹어, 라는 말을 남기더니 카일은 황급히 사라져버렸다.
제대로 들이받지도 못하면서 무슨 일진 놀이야. 안 어울리게.
[야, 쟤네 정신 나갔어. 식판에다 그냥 수북이······ 너 왜 그래?]
‘아냐, 가자.’
도시락을 들고 식당 밖으로 사라지는 카일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대충 대답했다.
안 어울리는 옷이라.
카일 너도 그 다저스 유니폼이 썩 어울리지는 않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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