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스프링캠프(4)
LA 다저스 스프링캠프 훈련장의 비디오 분석실.
퀭한 눈으로 화면을 쳐다보던 수비 코치는 선수 리스트에 메모를 남겼다.
수비 집중 훈련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야수들의 수비력 평가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똑똑.
“맷, 안에 있지?”
이 구단에 자신을 이름으로 부를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구단 모자에 선글라스를 걸쳐놓은 중년 남자가 도넛 봉투를 흔들며 흥겨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겉으로는 그저 풍채 좋은 다저스 팬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LA 다저스의 팜 디렉터였다.
그의 역할은 마이너리그의 젊은 유망주들을 관리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
스프링캠프 기간 내내 메이저 캠프와 마이너 캠프를 오가며 유망주의 플레이를 관찰하느라 바쁘다.
“마이너 캠프에서 이제 올라온 건가?”
팜 디렉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째 우리 감독님이 첫날부터 타자 유망주들을 우르르 내려보내시더라고.”
“아, 그거······.”
수비 코치는 첫날 회의에서 벌어진 칼부림의 풍경을 전달했다.
생각보다 제대로 준비해온 구현기와, 그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부담을 느낀 유망주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Koo? 내가 아는 그 Koo 말인가?”
“그래. 우리 팀에 Koo는 한 명밖에 없으니까.”
팜 디렉터의 표정이 묘해졌다.
“Koo는 은퇴하는 거 아니었나? 마지막으로 동료들과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구현기의 타자 전향 소식을 들은 많은 관계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당장 수비 코치 자신부터가 스프링캠프 시작 전까지는 그랬고.
“직접 한번 봐.”
수비 코치는 화면에 영상을 하나 띄웠다.
이날 낮에 막 촬영한, 수비 집중 훈련에서의 구현기의 모습.
“2루수네?”
“응. 빈 곳에 넣다 보니 그렇게 됐어.”
몇 시간 분량의 영상에는 각 타구가 어느 야수에게 갔는지 전부 표시되어 있었고, 수비 코치는 2루수 표시만 반복해서 눌렀다.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던 팜 디렉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참······ 애매하네.”
“그렇지?”
타구 판단 능력과 운동 능력 등, 내야수로서 필요한 선천적 재능은 어느 정도 엿보인다.
얼핏 보기엔 무난하게 타구를 처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핸들링과 송구 등,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 버벅대고 있다.
“만약 저게 투수 때 수비하면서 생긴 잘못된 습관이라면 길게 봐야 할 텐데······ Koo를 방출할 게 아니라면 마이너로 보내야 하잖아?”
수비 코치의 물음에 팜 디렉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만약 개선되지 않는다면 1루수 고정, 아니면 외야수로 전향하는 게 현실적인 선택일 거야.”
“우리 팀에 1루랑 외야 유망주는 차고 넘치지 않나?”
“많지. 게다가 Koo의 타격이 그만큼 받쳐 준다는 보장도 없고.”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로 수비 코치가 중얼거렸다.
“가장 중요한 건 Koo에게 마이너 생활과 수비 습관 교정을 견뎌낼 만한 동기부여가 남아 있는가야. 우리가 아무리 여기서 떠들어 댄들 결국 Koo가 못 하겠다고 나가버리면 끝이니까.”
팜 디렉터도 동의했다.
오프 시즌 동안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해온 모양이지만, 현재 다저스 야수진의 벽을 뚫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마이너에서 야수로 뛰다가 블래스 신드롬이 호전되어 투수로 복귀하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영상에 집중하려는데.
“······잠깐, 이거.”
화면 속 구현기는 1루 쪽으로 치우친 타구를 아슬아슬하게 잡아내서 송구까지 해내고 있었다.
“아까 내가 말한 게 이거야. 발이 빠르니까 타구를 잡아내긴 했는데 송구에 힘이 전혀 없잖아.”
그러자 팜 디렉터가 수비 코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친구야. 여기서 집중해서 볼 건 그게 아니지.”
마우스를 뺏어 든 팜 디렉터가 영상을 조금 전으로 되돌렸다.
뭔가 싶어 다시 화면을 쳐다보던 수비 코치는, 이윽고 팜 디렉터와 눈을 마주쳤다.
“바로 돌아가네. 자기 자리로.”
“그렇지?”
구현기는 1루수에게 송구를 마친 뒤, 곧바로 일어나 자기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자기 플레이에 확신이 있어서였든, 아니면 결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서였든.
지금 이 훈련 상황에 대한 엄청난 몰입과 진지한 태도 없이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감독님이 혹시 Koo에 대해 무슨 언질 주신 거 있나?”
“언질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회를 준다고 공언하셨지. 3경기 정도.”
감독이 준 기회에는 언론의 관심과 팬들의 기대를 충족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말로는 3경기라고 했지만, 실망스러운 태도나 플레이가 보인다면 첫 경기만에 바로 내려보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아는 오브라이언 감독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그럼 Koo가 선발 출장하는 날 나한테 연락 좀 넣어줘.”
반대로, 주어진 기회를 붙잡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노력하는 저런 유망주에게는 비교적 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저런 모습이 오늘 하루에 그치지 않는다면, 시범경기에서 구현기에게 선발 출장 기회가 올 거라고 팜 디렉터는 확신했다.
* * *
메이저리그가 실력으로 대놓고 차별하는 동네이다 보니, 자꾸 사소한 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라커룸 배정이라던가, 코치의 피드백이라던가. 그리고.
[순번이 바뀌었네.]
코치가 호명한 대로 줄을 서 있는 내 옆에서 박도현이 중얼거렸다.
첫날 훈련에서도 느낀 거지만, 팀에서 확고한 위치를 사수한 선수일수록 앞 순번을 받는다.
주전 자리가 가장 아슬아슬한 카일과, 초청선수 신분인 나.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다섯 명까지 줄어들었다.
선수들이 많이 빠진 덕도 있지만, 스프링캠프 시작할 때만 해도 밑바닥이었으니까.
마침 뒤를 돌아보는 카일을 향해 씩 웃어주니,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뭐 저렇게 오버한대.
“앞 순서가 출발하면 바로 배터 박스로 들어오도록!”
“예!”
오후에 수비 훈련을 진행할 첫 조가 자리를 잡고, 주자들은 대기 타석 근처에서 줄지어 섰다.
“3루!”
첫 타자인 주전 2루수 조지 라모스가 타구와 함께 출발했다.
3루 근처에 서서 코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조나단이, 덩치에 안 어울리는 날렵한 동작으로 공을 잡아챘고.
“아웃!”
조금 낮지만 상당히 빠른 송구를 1루의 랜디가 잘 잡아냈다.
조지의 주력은 메이저리그 전체를 놓고 봐도 최소 중상위권인데, 어깨가 좋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내야수 중에서 발 빠른 사람 누가 있지?’
[나?]
‘너 말고 등신아.’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박도현이 앞쪽에 선 카일을 가리킨다.
[초청선수까진 당연히 모르고, 메이저급 중에선 카일이 1등.]
‘또 누구 있지? 아까 오전에 랜디도 좀 빠르긴 했는데.’
[아, 랜디 빠르지. 2등이라 치고, 아까 조지랑 지금 뛰는 켄이랑 3, 4등 할걸?]
초반이라 그런지 야수들의 집중력이 다들 상당하다.
아직까지 세이프를 기록한 주자들이 없는 것만 봐도 알 만하지.
그러나 결국은 타자 주자가 스윙 없이 바로 출발하는 만큼, 조금만 버벅대도 언제든 1루를 허용할 수 있다.
“세이프!”
팀의 베테랑이자 백업 유격수인 클레망 파로가 타구를 한 번에 잡아내지 못하자, 넉넉하게 세이프를 얻어낸 카일처럼.
‘발 하나는 겁나 빠르네.’
1루까지 몇 초나 걸렸을지 궁금하다.
코치가 체크하고는 있지만, 여기서는 초시계가 안 보이니까.
다시 줄의 맨 끝으로 뛰어가던 카일이 이쪽을 슬쩍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린다.
칭찬해달라는 건가. 애도 아니고.
코치의 눈을 피해 윙크를 날려주니 표정이 썩는다.
“다들 집중해! 간격 빨리빨리 좁혀!”
수비 집중 훈련의 템포는 빠르다.
카일과 나 사이의 다섯 명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대기열 맨 앞에서 기다리다가, 앞선 주자가 출발하자마자 배터 박스로 향했다.
‘야, 나 몇 초 걸리는지 시간 좀 봐줘.’
[오케이!]
타격과 수비는 전담 트레이너와 함께 연습했지만, 주루까지 그럴 순 없었다.
대신 매 시즌 40도루 이상을 기록한 자칭 야구의 신(진)이 각종 노하우를 전수해줬지.
그걸 실전에서 수행할 수 있는가는 내 몫이지만.
“1루!”
코치가 콜을 내리고, 타구를 날리기 위해 공을 띄우는 순간.
상체를 숙이고 다리에 힘을 주어 지탱했다.
‘에이 씨, 세입은 글렀네.’
1루 커버를 들어올 투수가 없으니, 1루수는 날아오는 타구를 잡아 직접 베이스를 터치해도 되고, 아니면 1루심에게 토스만 해줘도 아웃으로 인정된다.
어차피 아웃될 거, 최대한 빠르게라도 도착해보자는 생각뿐이었고.
딱!
공과 배트가 부딪치는 소리를 신호탄 삼아, 정확한 타이밍에 첫발을 내디뎠다.
팍! 팍! 팍!
어차피 줄은 길고, 숨 고를 시간은 충분하다.
속도를 줄일 필요는 없다.
당장 끌어다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몽땅 다리에 보낸다는 생각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랬더니.
“앗!”
상대 수비수에게 ‘빠른 주자’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나면, 내야 땅볼에도 실책이 나올 확률이 늘어난다고 했던가.
랜디가 별로 어렵지 않은 바운드를 놓치고 뒤로 흘렸다.
“세이프!”
울상을 지으며 내 쪽을 쳐다보는 랜디를 외면했다.
그러게 점심 좀 적당히 먹지 그랬냐.
갑작스런 혹사에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호흡을 되돌리려는데.
코치 뒤편에서 초시계를 훔쳐보던 박도현이 날아오고 있었다.
‘몇 초 나왔냐?’
말로 뱉었으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을 텐데, 생각만으로 대화가 되니 이럴 땐 편하다.
[3.5초.]
보통 1루까지 3초대만 기록해도 발이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준족으로 유명했던 스즈키 이치로가 보통 3.8초 정도 걸렸다고 하니, 기록만 놓고 보면 좋아 보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나 진짜 오래 쉬긴 했다. 너무 느려졌어.’
[그러게.]
이건 배터 박스에서 바로 출발한 기록이다.
만약 실제 경기처럼 배트를 들고 임했으면 절대 이렇게는 안 나오지.
바깥쪽 공에 배트가 나갔다면 3초대도 아슬아슬했을지 모른다.
[부상 위험도 있으니까, 당장 속도를 늘릴 필요 없이 유지하자는 생각으로 달려보자고.]
‘오케이.’
그렇게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생각하며 줄 끝으로 돌아갔는데, 어째 분위기가 좀 싸하다.
‘쟤네 왜 저러냐?’
미리 줄을 서 있던 주자들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심지어 내 뒤를 이어 도착한 주자들까지도.
뭐. 왜. 니들 앞에 안 보냐.
“······Koo? 맞지?”
코치님은 또 왜 그러는데요.
내가 아니라고 대답해버리면 어떡하려고.
* * *
스프링캠프의 모든 훈련을 통틀어 가장 빡셌던 수비 집중 훈련이 끝났다.
사실 그래봤자 고등학교 때 전지훈련보다도 강도가 낮은데, 왜 이렇게 지치는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그치. 내가 현역으로 뛸 땐 오버 슬라이딩을 한 번도 안 했는데.]
‘안 닥쳐?’
사실 주자로서 오후 훈련을 수행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수비 훈련의 보조자 역할에 가까웠다.
상황 자체가 다르다 보니 실제 주루 능력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기본적인 주력이라면 몰라도.
그러니까 비록 이번 훈련에서 오버 슬라이딩을 저질렀지만, 코칭스태프들이 나를 주자로서 못 써먹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그래야 한다. 아니 그렇다고 해주세요. 제발.
[그나마 훈련 상황이었으니 망정이지, 경기에서 이랬으면 진짜 개쪽이다. 알지? 심지어 3루수가······.]
‘알았어······.’
2루로 뛰던 도중, 3루수를 보던 조나단이 러닝 스로를 하는 걸 보고 당황한 나머지 속도를 제때 못 줄인 게 화근이었다.
설마 그 짧은 타구를 마중 나갈 줄은 예상도 못 했으니까.
그렇게 온갖 갈굼을 먹으며 라커룸으로 돌아가던 도중.
“Hey, Koo.”
누군가 싶어 돌아보니 오늘 훈련에서 1루심을 맡은 1루 코치였다.
설마 이중으로 혼나는 건가.
타자 전향을 고집한다면 경력 없는 유망주 취급을 하겠다던 단장님의 말씀이 어른거렸다.
“잠깐 이리 와 봐.”
코치님이 나를 데려간 곳은, 면담실이라는 문패가 달린 작은 방이었다.
인테리어라곤 책상과 의자밖에 없어서 그런가. 분위기는 무슨 취조실 같네.
“Koo, 오늘 플레이 무척 인상 깊게 봤어.”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슬라이딩하겠습니다.”
“어?! 아, 그거? 그건 상관없어.”
이거 말고 코치가 나랑 독대할 일이 뭐가 있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코치님이 짧게 한숨을 쉬고는 무어라 주절주절 말을 꺼낸다.
“질문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이게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 물어보는 건 절대 아니야. Koo 자네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그치만 구단으로서는 꼭 필요한 절차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제야 코치가 왜 나를 여기로 불렀는지 알아챘다.
선수로서는 불쾌할 수 있지만, 구단은 꼭 알아야 하는 것.
한참을 머뭇거리던 코치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 혹시······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한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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