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3화 (13/200)

13. 스프링캠프(5)

모든 스포츠에 있어 도핑은 예민한 문제다.

특히나 메이저리그는 ‘약물의 시대’라는 얼룩진 역사가 존재하는 만큼, 도핑에 더욱 엄격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과거처럼 구단이 약물 사용을 묵인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

검은 손길이 언제 어떻게 퍼져나갈지 모를 일이니, 구단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색출하고 싶을 거다.

그런데 선수로서는 이게 또 느낌이 다르다.

깨끗하다면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 노력이 손쉽게 얻은 것으로 치부당하는 걸 좋아할 선수가 어디 있나.

사무국에서 주관하는 도핑 테스트야 선수가 당연히 감수해야 하지만, 구단에서 권유하는 건 다들 불쾌해하는 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와, 옛날 생각난다······. 나는 감독님이 직접 물어봤는데.]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도핑 테스트를 겪은 선수와 늘상 함께 지내다 보니, 뭔가 그러려니 하게 된다.

도핑 테스트에 순응하는 편인 한국 정서도 한몫했지만.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제가 왜요?”

도핑이 의심된다는 건 그만큼 단기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막말로 시범경기 나가서 홈런 몇 개씩 뻥뻥 쳐댔으면 의심해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럴 껀덕지가 없었으니 좀 당황스럽다.

‘체력은 근력’의 영향으로 증량을 좀 했지만, 투수 시절에 비해 눈에 띄는 차이는 아니고.

“그치. 기분 상하는 거 이해해. 하지만 상식선에서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생겨서 그래.”

1루 코치는 태블릿을 꺼내더니 숫자가 주르륵 늘어선 표를 보여줬다.

“오늘 네가 홈에서 1루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을 정리한 거야. 대체로 3.5~6초를 기록하고 있지?”

“네. 하지만 이건······.”

“나도 알아. 실제 스윙이나 번트 이후 출발했다면 더 늦었겠지. 그래도 넉넉잡아 4초 안에는 도착했을 거야.”

그렇게 말한 뒤, 이번에는 웬 동영상을 재생했다.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내가 주자 1루 상황에서 희생번트를 대는 모습.

“이건 네가 희생번트로 아웃되는 장면이고. 재작년에 촬영한 거야. 1루까지는 대략 4.7초가 걸렸어. 내 기억이 맞다면, 다른 상황에서도 이때와 기록 차이는 크게 나지 않았을 거야.”

[뭐야, 그런 거였어?]

박도현이 김샜다는 듯 중얼거렸다.

얘는 나랑 24시간 붙어 다녔으니, 애초에 도핑 시도조차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1루까지 0.7초, 100m로 따지면 최소 2초 이상의 단축이지. 코칭스태프들끼리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이게 과연 단순히 훈련으로 가능한 일인지······.”

“아, 저기. 저기. 죄송한데 잠깐만요.”

이야기가 더 복잡해지기 전에 오해부터 풀기로 했다.

“저 원래는 오늘 훈련 때보다 더 빨랐는데요?”

“······어? 뭐라고?”

입을 헤벌린 채 삐걱대는 1루 코치에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했다.

“저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발이 빨랐어요. 마이너에서도 그랬고요.”

투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주력을 평가받을 일은 없었지만, 학창시절 체력 테스트에 포함된 단거리 달리기에서 나는 박도현과 함께 1, 2등을 다퉜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는 경기 성적만 열람 가능하니까 몰랐어도 이상하진 않지.

심지어 마이너리그에서도 싱글 A 이하 레벨에서는 지명타자 제도가 있었으니까.

“어, 그럼······ 왜 지금까지 뛸 수 있으면서도 안 뛰었어?”

당황하긴 했나 보다. 당연한 걸 물어보는 걸 보니.

“투구 밸런스 때문이죠.”

아마 하이싱글 A였을 거다.

투수이자 9번 타자로 출장해 첫 타석에서 느린 땅볼을 쳤고, 세이프를 얻어보겠답시고 죽어라 달렸지만 결국 아웃됐다.

문제는 숨을 다 고르지 못한 상태에서 공수교대가 이루어지는 바람에 밸런스가 개판이 된 채 마운드에 올랐다는 거지.

그날 3회를 마치지 못하고 강판당한 후, 내 야구 인생에 전력질주는 없다고 다짐했었다.

“하······ 일이 그렇게 흘러간 거구만.”

1루 코치가 머리를 감싸며 탄식했다.

“그래. 그렇지. 누가 투수의 주력 따위를 신경 쓰겠어? 만약 누가 발견했어도 그때 주력을 지금까지 유지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을 거야. 너 하이 A때 몸무게가 몇이었더라?”

“한······ 190파운드(약 86kg) 정도 됐을 겁니다.”

“못해도 30파운드(약 13kg)는 불었군.”

불었다니. 공의 위력을 늘리기 위해 벌크업한 건데.

솔직히 옛날의 내가 너무 부지깽이였던 거다. 지금보다 5cm 정도 작긴 해도 185cm였으니까.

“코치님. 저 계약 끝내고 나서 트레이닝 센터에서 외출한 거 다 합쳐야 열흘도 안 돼요.”

“아, Koo 너네 에이전시가······.”

“애쉬튼입니다.”

업계에서 명망이 높은 에이전시에 명확한 정황이 더해졌으니, 의혹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결 상쾌해진 표정의 1루 코치가 태블릿을 주섬주섬 집어넣으며 툭 던지듯 물었다.

“시범경기에서는 오버 슬라이딩 안 할 거지?”

아까는 그건 상관없다면서요.

이놈의 메이저리그. 믿을 놈 하나 없다.

* * *

이번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는 구현기였다.

메이저에서 뛰던 투수의 타자 전향. 게다가 함께 사고를 당해 고인이 된 친구와 똑같은 내야수에 도전했으니까.

이 사실을 캐물었던 기자가 다저스 클럽하우스 영구 출입 금지를 당했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깊이 파헤치는 언론은 없었지만.

훈련 장면이 공개되면서, 구현기의 현재 수준을 추측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러나 구현기가 당장 팀의 전력에 보탬이 될 거라고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서비스타임 3년이 지난 그를 다른 팀이 웨이버 클레임으로 홀랑 데려갈까 봐 40인 로스터에서 제외하지 못할 뿐, 실력은 그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런 구현기가 마이너 캠프로 이관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여론은 묘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시범경기에 구현기를 내보내기 위해 평가상의 특혜를 주고 있다’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진 것.

구현기에 대한 질문에 “훌륭한 태도로 훈련에 임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평가 중이다”라는 원론적인 대답만을 내놓는 오브라이언 감독의 태도도 한몫했다.

외부에서의 소문은 어차피 시범경기가 개막하면 어떻게든 결론이 날 테지만.

내부에서도 잡음이 나오기 시작한 건 나름대로 문제였다.

“와, Koo 이 인간 아직도 남아 있어?”

일정상 스프링캠프 이전 마지막 평가가 될 라이브 배팅.

그 파트너가 적힌 대자보를 보던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제리 헤이즈택은 발걸음을 멈췄다.

투수조에서 함께 훈련하던 유망주들이었다.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목소리가 제법 크다.

“진짜 징하다, 징해. 지금 남은 사람들이랑 Koo가 상대나 되겠어?”

“프런트도 참 무슨 생각하는지 뻔하다니까. 고작 시범경기에 화제 좀 끌어보겠다고 애쓰네.”

제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훈련 프로그램상 야수조와 투·포수조는 만날 일이 적다. 특히 다저스처럼 훈련 공간이 넓은 구단에서는 아예 점심시간 말고는 만날 일이 없다고 봐도 된다.

저 선수들은 구현기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투수 출신이니 실력이 떨어질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거다.

화가 났지만, 함부로 끼어들 순 없었다.

그 역시 구현기가 어떤 심정으로 타자 전향을 선택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말리겠다고 찾아간 적이 있으니.

물론 실제로 상대해본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심정으로 버텨내고 있을 구현기에게 차마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가끔 마주치면 손인사 정도만 건네고 있다.

물론 오프 시즌 내내 함께 훈련했는데도 잘 지내냐는 연락 한 통 없는 게 괘씸해서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지만, 어쨌든 친구의 건투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냥 가자.’

어차피 합동 훈련 이후로는 무시하지 못할 테니.

신경 끄고 가던 길을 가려던 찰나.

“야, 너 부럽다. 솔직히 여기서 Koo가 제일 만만하잖아.”

“내가 원래 운이 좀 좋잖아. 한 명은 잡고 가겠네.”

구현기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열 받는 일이지만, 안일하기 짝이 없는 그 태도가 제리의 신경을 자극했다.

한 명은 잡고 간다고?

메이저리그에 무조건 잡을 수 있는 타자는 없다. 투수조차도 안타를 때려낼 수 있는 게 메이저리그다.

평소 후배를 잘 터치하지 않는 제리지만, 이런 썩어빠진 태도는 지적해야 한다는 생각에 뒤돌아섰지만.

“야수조 일에 관심이 아주 많은가 봐?”

누군가가 먼저 끼어드는 바람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조금 전까지 삐딱한 자세로 시시덕거리던 유망주들이 단숨에 정렬하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한 손을 들어 인사를 받는 그의 이름은 로버트 켈리.

작년까지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투수조의 군기반장을 맡았다.

“어디 보자. 라이브 배팅 파트너 나왔네?”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리 중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뿐인데도.

어깨를 내준 유망주는 순식간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키도 188cm 정도로 특출나게 크지 않고, 덩치도 보통 수준이었지만 로버트는 많은 선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의 별명은 헤드기어 컬렉터.

2030년대의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벤치클리어링 명장면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남자.

“자신 있어?”

“아닙니다!”

“나 함부로 말 바꾸는 사람 안 좋아해. 한 번만 더 물어볼게. 자신 있어?”

구현기와의 맞대결이 예정된 유망주 투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 다른 타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좀······.”

“그렇단 말이지.”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깨에 짚었던 손을 뗐다.

“Koo가 가장 많이 스윙하는 구종과 코스. 초구 스윙 비율. 얘기해봐.”

“······예?”

투수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스프링캠프에서의 훈련 데이터는 선수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게다가 1년에 많아야 60타석 정도 소화하는 투수의 타격 데이터를 무슨 수로 알겠나.

답은 그저 납작 엎드려 비는 것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졌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구현기의 뒷말을 하던 일행들도 덩달아 사과했다.

그러자 로버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유망주 무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에이, 괜찮아. 뭐 그런 거 갖고 사과를 해. 마음 약해지게.”

봐주려는 건가 싶어 표정이 밝아지는 선수들의 얼굴 앞에, 로버트는 손목시계를 들이댔다.

“모르면 알아봐야지.”

“······예?”

“어디 보자. 이따 오후에 라이브 배팅 시작하기 전까지 아까 내가 물어본 거 정리해서 가져와. 알았지?”

“그, 그걸 저희가 어떻게······.”

쾅!!!

로버트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벽에 날아가 처박혔다.

고작 가방이 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커다란 소리에 다들 움찔했고.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를 지워낸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해?”

“아닙니다!”

“그럼 빨리 뛰어 이 새끼들아!”

제리는 우르르 뛰쳐나가는 유망주들과 마주칠세라 재빨리 몸을 피했다.

한편으로는 조금 안도했다.

누구 하나 멱살 잡히는 일 없이 끝난 걸 보니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구나 싶어서.

“너도 일로 와 인마.”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던 사람과 독대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제리가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동안 로버트는 떨어진 가방을 주웠다.

“역시 가방은 아무것도 안 든 게 소리가 가장 크단 말이야. 너도 잘 알아둬.”

“예? 그건 왜······.”

“에이스가 되고 싶다며? 그냥 선발 투수는 몰라도 상관없는데, 에이스는 알아야 해.”

제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때마침 로버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기 혼자 유망주들에게 주의를 줄 수 있었을까.

할 수야 있지만 아마도 귀담아듣진 않았을 거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하다가 혀라도 씹으면 그나마 남아 있던 위엄도 사라졌겠지.

“Koo의 약점을 알아 오라는 건 진심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화제를 돌리려는 제리의 질문에, 로버트도 딱히 말꼬리를 잡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못할 건 또 뭐야?”

로버트는 진심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코치들이야 알려줄 수 없다고 해도, 야수조에 친한 선수가 있다면 가서 물어볼 수 있을 거다.

랜디처럼 오지랖 넓은 선수를 만난다면 지난 겨울 동안 구현기가 제리의 공을 상대했다는 사실도 알아낼지 모른다.

“저놈들 만약 너한테 물어보러 오면 제대로 대답해줘라. 맘에 안 든다고 엿먹이지 말고.”

“그런 짓 안 합니다.”

있는 대로 윽박질러서 패닉 상태에 빠트려 놓았으면서 그런 유연한 사고를 기대하다니.

이치에 안 맞는 것 같았지만 깊게 생각하지 말기로 했다.

“이따 훈련장에서 뵙겠습니다.”

로버트에게 인사를 건넨 뒤, 벽에 붙은 라이브 배팅 파트너를 확인하러 가려던 찰나.

“가긴 어딜 가?”

그대로 팔을 붙잡혔다.

“Koo랑 상대하면서 머리 많이 굴렸지? 정보 내놔 정보. 아는 거 다 불어.”

“······예?”

“설마 입 싹 씻으려는 건 아니지? 너 메이저 올라오고 나서 내가 그동안 사준 밥이 얼만데. 이번 오프 시즌 캠프도 끼워 주고.”

제리는 팔을 붙잡힌 그대로 고개만 돌려 벽에 붙은 종이를 확인했다.

로버트와 구현기가 파트너로 매칭되어 있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팔은 절대 놓아주지 않는 로버트에게서 제리가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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