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시범경기(1)
“30온스(약 850그램)짜리 티본 둘. 미디움 레어로. 술은 안 마실 거지?”
“스파클링 워터로 하겠습니다.”
스프링캠프 훈련장 근처 스테이크 하우스.
개별 룸이 잘 마련되어 있어 스타 플레이어들도 종종 찾는 이곳에서, 때아닌 저녁 모임이 열렸다.
“많이 먹어라. 먹다 모자라면 더 시키고.”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오늘 라이브 배팅에서 나한테 안타를 허용한 로버트가 저녁을 사주겠다고 부른 것.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싸, 개꿀. 로버트 것만 집어먹어야지.]
유령 비스무리한 존재인 주제에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던 박도현이 썰어둔 스테이크 조각을 마구 집어먹었다.
접시 위의 고기는 그대로인데, 반투명 상태의 고깃덩어리가 쏙쏙 올라오는 게 좀 징그럽다.
남자들끼리의 사적인 식사 자리가 그렇듯, 음식이 나와 있는 동안에는 다들 접시에 얼굴 처박기 바빴고.
로버트는 후식으로 커피가 나오고 나서야 본론을 꺼냈다.
“너 세 번째 공, 그거 어떻게 친 거야?”
‘노려서 잘 보고 쳤습니다’라고 하면 진짜 맞을 것 같아서 제대로 얘기하기로 했다.
“제가 횡 변화구는 대처를 잘한다는 걸 제리한테 들으셨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투심 아니면 종 변화구인데, 서클 체인지업 구사율을 지난 시즌부터 줄이시는 것 같아서······.”
“투심이 올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아, 네. 처음에는 투심 타이밍에 스윙했는데, 릴리즈 포인트에서 이대로 가면 헛치겠다 싶더라고요.”
“헛치겠다고? 그 느낌 더 자세히 말해봐. 혹시 내 공이 읽히기 쉬운 편인가?”
로버트는 타석에서 내가 느낀 것들에 대해 꼬치꼬치 물고 늘어졌다.
사실 내 입장에서 타격 메커니즘을 다 풀어버리는 건 영업 비밀을 공개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좀 주저하긴 했는데.
자신이 구사하는 온갖 변화구 그립이며 경기 운영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조건 없이 알려주던 로버트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줬다.
“후······.”
로버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준비해왔네. 이제 그만할 때가 됐나 싶었는데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못해도 4년은 더 뛰실 수 있잖아요.”
“4년? 실버타운 리그 드래프트 1픽은 가능하겠네.”
농담으로 얼버무리고는 있지만, 로버트도 올해로 36세의 노장.
올해로 장기계약의 마지막 해를 맞이하는 만큼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Koo, 하여튼 니가 문제야. 이 배은망덕한 놈. 속 썩이는 것도 모자라서 안타까지 뺏어가고.”
“제가 무슨 속을 썩였습니까?”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엉덩이를 걷어차야 하나, 그래도 고생했다고 위로라도 해줘야 하나······.”
어째 오프 시즌 내내 직접 연락 안 하고 제리를 통해서만 안부를 물어보더라니.
로버트는 로버트대로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됐나 보다.
“위로요? 로버트, 저 없는 사이에 그런 건 또 언제 배우셨어요?”
“일로 와 이 자식아.”
괜히 깝죽거렸다가 기름기가 덕지덕지 묻은 냅킨으로 입술을 얻어맞았다.
사람 많이 패본 사람은 다르다. 냅킨으로 때려도 아프네.
쓸데없이 진지해지는 게 싫어서 장난치긴 했는데, 솔직히 고마웠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베테랑에게 고액 연봉을 안겨주는 건, 팀의 분위기를 이끌고 어린 선수들의 멘탈을 케어하는 역할을 기대해서라는데.
그런 면에서 로버트는 나름대로 2,000만 달러의 연봉 값을 하는 선수가 아닐까.
[너랑 라이브 배팅할 때 어떻게든 이기려고 했던 게, 혹시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닐까?]
‘글쎼다.’
그렇게 감성적인 양반은 아닌데. 갱년기라도 오지 않고서야 그런 애틋한 생각을 했을까.
확실한 건, 내가 만약 삼구삼진이라도 당했다면 백프로 갈궜으리란 것뿐이다.
로버트가 점원을 불러 음료를 추가 주문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너 수비 포지션은 아직 안 정했냐?”
“내보내는 대로 뛰는 거죠.”
수비 집중 훈련에서는 2루수로 뛰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포지션.
내야 어디서든 최소한 구멍은 만들지 말아야지, 안 그러면 감독님 성향상 한 경기 만에 짐을 쌀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일 자신 있는 포지션이 있을 거 아냐.”
“그거야 뭐······ 1루수죠.”
아직 완벽하게 숙달되지 못한 송구 대신 포구에 집중할 수 있고, 좋은 1루수의 조건인 큰 키도 갖추고 있으니.
“너도 참······ 죽어라 고생해서 선발 경쟁 뚫더니, 이제는 1루수 경쟁 뚫게 생겼네.”
로버트가 혀를 찼다.
어느 구단이나 마찬가지겠지만, 1루수는 전통적으로 공격력을 갖춘 타자들이 즐비한 포지션.
특히 다저스처럼 팜이 튼튼한 구단이라면, 1루는 수비력이 애매한 거포들이 우글거리는 지옥도로 변모한다.
“어떨 것 같냐? 1루수로 출장할 자신 있어?”
“하하······.”
애매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백업 유격수 겸 주전 1루수로 뛰고 있는 클레망부터가 쉽게 밀어낼 만한 선수는 아니고.
유망주부터 AAAA리거, 내야 백업까지. 1루수 자리를 두고 다툴 만한 선수들이 너무 많다.
어차피 당장 주어질 기회는 대타나 대주자 정도겠지만.
만약 그 기회를 잡아 선발 출장을 하게 된다면······.
‘유격수지.’
팜도 좀 얇고, 당장은 전력 보강이 없던 포지션.
게다가 주전 유격수 카일이 지난 시즌 후반에 삽질한 게 있으니까, 여러 명이 기회를 받을 거다.
언제 백업 유격수를 보강할지 모르니, 눈도장을 찍어두기엔 지금이 유일한 적기일지도.
* * *
[업적 ‘시범경기 로스터 등재’를 달성했습니다.]
[2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 5980]
시범경기 로스터가 발표된 직후, 하룻밤 사이 8명의 선수가 자취를 감췄다.
내가 이 단계까지 살아남았다는 소식 역시 SNS를 통해 미 전역의 야구팬들에게 전달됐다.
[Koo의 시범경기 출전, 다저스의 화제몰이 기획인가, 사실상의 은퇴 경기인가?]
그 후 각종 커뮤니티에서의 논쟁과 전문가들의 논평을 한마디로 압축한 듯한 제목의 칼럼이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지.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투수의 내야수 전향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을 통해 지난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와 부족한 전력 보강 등의 허물을 가리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 제기와.
이미 야구판에서 마음이 떠난 내가, 마지막으로 마운드 위의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준 동료들과 함께 야구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게 아니냐는 낭만적인 해석이 교차하는 칼럼이었다.
‘X랄들 하네.’
근거랍시고 인용한 게 오브라이언 감독님의 기자회견 내용인데, 나를 다른 유망주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쓰임새를 검토 중이라는 원론적인 대답만을 고집하는 게 수상하다나.
어쩌라고. 그게 팩트인데.
감독님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훈련 열심히 받는 중이고 공정하게 평가하겠다고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으니.
가뜩이나 나에 관한 한국 언론의 질문 폭격에 시달려온 양반인데.
“Koo, 네 마음을 내가 미처 몰랐어.”
“맞아. 그런 감동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내가 이 자리 뚫어보겠다고 죽어라 뛰는 걸 곁에서 목격한 동료들 역시 저 칼럼이 개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오해를 정정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나의 은퇴 경기를 빛낼 영광을 주어 고맙다며 놀려먹기 바빴다.
[구현기 시범경기 출장, 美 여론 갑론을박··· 현지 전문가 “유망주의 소중한 기회 빼앗는 행태”]
[경쟁은 과연 정당했나? 갖은 의혹 제기에도 다저스 ‘묵묵부답’]
나와 좋은 기억이 없는 일부 한국 언론에서야, 늘 하던 대로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시는 중이었고.
이제는 저런 기사가 하나도 안 올라오면 조금 서운할 것 같네.
이렇듯 자칭 메이저리그 전문가 한 명이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은 나에게 짜증나는 일을 한가득 가져왔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듯, 좋은 일도 하나쯤은 사이에 끼어 있기 마련이다.
“개막전에서 경기 후반 대주자를 기용할 상황이 온다면, 내 첫 번째 옵션은 자네가 될 거야.”
갑자기 나를 개인 면담실로 부른 감독님이, 적어도 내가 자신의 구상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언급했다.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답을 정해둔 것 같더군. 덕분에 훈련 데이터를 공개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
기자들에게 공개되는 스프링캠프 훈련 내용은 일부뿐.
그것도 마이너행을 결정짓는 주요 훈련은 민감한 내용이라 공개를 피하다 보니, 감독님도 해명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신 모양이다.
사실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니만큼 해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긴 한데, 내가 생각보다 너무 화제가 되어버린 게 컸지.
“마지막으로, 이것 역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하는 말인데, 자네의 평가 기준은 다른 내야 유망주들과 완벽하게 동일할 거야.”
어떻게 보면 이것도 그리 유리한 정황은 아니다.
쓸데없이 주목받는 바람에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며 눈에 불을 켜는 사람들도 생겨날 테지.
이럴 때 괜히 삽질했다가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겠지.
[괜찮겠어?]
박도현도 그걸 걱정했는지, 면담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평소답지 않은 진지한 태도로 물었지만.
‘이미 한 번 해본 건데, 두 번이라고 못 하겠어?’
메이저리그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선수는 수많은 의심의 시선을 이겨내며 꾸준히 활약해야 한다.
고작 1년 만에 마이너리그를 패스한 박도현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입단 3년 차에 메이저 무대까지는 밟았지만 선발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진 대체 선발과 필승조로 뛰었으니까.
‘이것도 결국 야구의 일부야. 아웃되면 끝. 재도전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정확히 말하면, 지금 상황 자체가 두 번째 타석이라고 봐야지.
이미 투수로서 아웃 판정을 받았는데도 다시 뛸 기회를 얻은 거니까.
게다가 유망주의 기회를 뺏고 있다는 말도 어느 정도는 팩트다. 언제 모가지가 날아갈지 모르는 파리 목숨 신세이긴 해도 어쨌든 40인 로스터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으니까.
어떻게 차지한 자리인데 지키기 위해 기를 써야지, 부담스럽다고 징징거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기량과 컨디션을 점검했고.
마침내 시범경기 개막전이 찾아왔다.
* * *
개막전 상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선수단을 실은 버스가 파드리스의 스프링캠프 홈구장으로 이동했다.
생각해보니 야수조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투수조 버스보다는 확실히 조금이나마 활기가 있다.
거긴 지금쯤 냉골이겠네. 로버트가 선발 등판하는 날이니까.
[홈 경기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딱히.’
어차피 상대하는 팀들이 다 애리조나에 몰려 있다 보니, 원정팬들의 수도 정규 시즌보다는 많다.
국민의례를 하러 덕아웃 밖으로 나오자마자 관중석에서 다저스 유니폼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Kooooooo!”
“은퇴할 생각 따윈 집어 치워버려! 넌 다저스의 선발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각종 팻말을 흔들어대며 절규하다시피 외쳐대는 몇몇 팬들을 애써 무시했다.
“플레이 볼!”
주심의 경기 시작 선언 이후, 원정팀 다저스의 1회 초 공격이 시작되었다.
덕아웃 난간에 기대서 슬슬 응원에 시동을 걸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툭 치더니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기분은 좀 어때?”
다저스 원클럽맨이자 베테랑 내야수인 클레망 파로.
백업 유격수라고는 하지만 주로 1루수로 뛰고 있는, 어떻게 보면 포지션 경쟁자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은 나 혼자 경쟁심을 품고 있을 뿐인 확고한 주전 선수지만.
“좋아요. 어제 좋은 꿈도 꿨고.”
“여자 나오는 꿈이라도 꿨어?”
“틀린 말은 아니죠. 이혼하고 연락 끊긴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시더라고요.”
“······음, 차라리 틀렸으면 좋았을걸.”
까마득한 후배인 내가 편하게 농담을 건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같은 베테랑인 로버트에 비하면 조금 유한 사람이다.
클레망은 그 후로도 내 옆에서 떠나지 않은 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는데, 1회 초가 삼자범퇴로 끝나는 바람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했다.
공수교대를 위해 일어나고 나서야, 클레망은 아마도 자기가 하고 싶었을 이야기를 꺼냈다.
“부담 갖지 말라는 소리는 못 하겠다. 그래도 스프링 트레이닝 때 했던 것만큼은 보여줬으면 좋겠어.”
그러더니 자기 글러브를 챙겨 그라운드를 향해 뛰어갔다.
참 착한 사람이다.
나는 어떻게든 활약해서 MVP 인터뷰를 따낸 다음 저따위 팻말 다 불살라버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 * *
감독님과의 면담 이후.
나는 개막전에 바로 출전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주자라는 건 기본적으로 경기 후반에 비등한 경기가 치러지고 있을 때, 발이 느린 타자가 주자로 나가 있는 한정된 상황에서만 출전하니까.
경기가 터져버린다면 다음 기회를 노리며 응원이나 실컷 하는 거지 뭐.
말이 씨가 되기라도 한 듯, 경기는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
로버트와 상대 선발투수가 2이닝씩을 무실점으로 막고 내려간 이후, 5회까지 동점 상황이 이어졌다.
6회 말, 유망주 투수가 투아웃 상황에서 3연속 볼넷으로 만루를 만들고 나자 감독님은 베테랑 불펜을 올려 소화를 맡겼는데.
따아악―!
[스윗 스팟에 제대로 맞았고! 높이 뜬 타구가 오른쪽 담장을, 담장을,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포수 레이먼드 토레이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시범경기 첫 홈런을 그랜드 슬램으로 장식합니다!]
한 번 넘어간 흐름은 되찾기 어려운 게 야구라고 했던가.
6회의 남은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기 위해 다저스는 세 명의 투수를 더 올려야 했고, 스코어는 6:0으로 바뀌었다.
전광판에는 한 팬이 ‘Don’t Go, Koo’라고 적힌 팻말을 무릎으로 부수는 모습이 비쳤다.
“하하하. 점수 차이가 좀 많이 나네.”
로버트는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돌아온 투수들의 등을 두드려줬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이따 다른 버스 타고 가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전들이 대거 교체될 것을 알아챈 유망주들은 덕아웃 밖으로 뛰쳐나가 몸을 풀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출전 기회가 날아갔음을 짐작한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응원에만 집중했다.
분명 그랬는데.
“Koo! 준비해.”
야구란 스포츠를 만든 사람은 변태가 분명하다.
끝내 나에게 기회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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