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7화 (17/200)

17. 시범경기(3)

애리조나주에서 열리는 시범경기, 캑터스리그의 개막전이 모두 끝났다.

모든 메이저리그 팬들은 각자 응원하는 구단이 오랜만에 선보인 경기에 열광하고, 좋아하는 선수나 새로 발견한 선수에게 응원을 보냈지만.

그중 압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경기는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경기였다.

우선 경기 내용부터가 비범했다.

빅이닝에 빅이닝으로 응수한 끝에 9회 역전승.

기존 주축 선수들을 대신해 대거 교체 출전한 백업 선수와 유망주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그러나 이 경기가 메이저리그 팬들의 눈길을 끈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Koo, 시범경기 개막전 9회 대주자 출전! 히트 앤드 런으로 진루에 끝내기 득점까지!]

투수로서의 재능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젊은 선수가.

자신의 타자 전향이 은퇴를 앞둔 퍼포먼스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사건이었다.

어그로성 게시글과 트래픽 테러가 난무한 끝에 서버가 다운되고 만 파드리스 팬 커뮤니티를 제외하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다저스 팬들이었다.

[이게 맞아? 정말로 이게 맞다고 생각해? 최소한 앞으로 몇 년은 다저스 선발진을 책임져줄 수 있는 솔리드한 선발 투수를 불확실한 타자 유망주로 바꾸는 게 정말 최선의 선택이야?]

[Koo는 이제 25살이야. 대졸 신인이라면 아직 마이너리그에서 선발 수업을 받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고. 왜 벌써 재활을 포기한 거지?]

[마운드로 돌아와 줘, Koo! 난 이미 네 커브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고!]

구현기의 선택에 반기를 드는 팬들과.

[Koo is crazy!!! 이게 남자고, 이게 야구 선수지!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방식으로 싸워보겠다는 거잖아! 구단은 기회를 줬고, Koo는 증명했지. 뭐가 문제야?]

[나이가 어리면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더 좋은 거 아닌가? 설레발인 것 같긴 하지만, 나는 Koo가 타격하는 모습과 수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어.]

[심지어 Koo한테 농락당한 저 투수, 무슨 마이너 선수도 아니고 작년에 파드리스에서 제법 쏠쏠하게 활약했던 셋업맨인데? 이 정도면 진짜 재능 있는 거 아냐?]

구현기의 결정을 지지해주는 팬들.

막장으로 흘러간 시범경기 개막전 이야기는 어느새 시들해지고, 구현기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사람들.

서로 의견은 갈렸지만, 이제 그들이 공유하게 된 하나의 사실이 생겼다.

구현기의 타자 전향은 진짜였다.

그에게는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다.

구현기의 은퇴 가능성을 시사한 자칭 전문가들의 게시글 링크가 팬 커뮤니티에 나돌았고, 그들은 정정하는 글을 올리거나 기존의 글을 삭제하느라 바빴다.

특히 온라인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칼럼의 주인공은 아예 계정을 비공개로 돌려버렸다.

이렇듯 난장판이 벌어지는 가운데, 하나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구현기 오늘 인터뷰 영상 올라왔는데, 너희 지금 이거 보고 떠드는 거야?]

막장을 향해 치닫던 커뮤니티는 이후 잠시 글 업로드가 뚝 끊겼다.

* * *

시범경기 개막전의 승장 인터뷰.

LA 다저스의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코칭스태프 일동은 원칙에 따라 선수를 평가했고, 출전을 지시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겠군요.”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고, 심지어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기자들이 속출했기에 오브라이언 감독은 시무룩해져서 돌아갔다.

“지난 오프 시즌 동안 노력해온 보람이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고, 최선을 다해 그 기회를 잡을 겁니다.”

동점 적시타를 포함한 5타수 3안타로 MVP에 선정된 말릭이 주전으로 발돋움하고 싶다는 각오를 담아 인터뷰에 임했으나, 마찬가지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꿍얼거리며 돌아갔다.

기자들의 신경은 온통 한 사람에게만 쏠려 있었고.

마침내 그 사람이 인터뷰 스페이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투수 출신 내야수라는, 메이저리그에서 전례가 없던 출전 기록을 만든 데다가 심지어 그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였는데도.

구현기의 표정은 과거 늘상 마운드에서 선보이던 포커페이스 그 자체였다.

“Kooooo! Kooooo!”

“베이스볼 타임즈입니다! 오늘 경기에 대해······!”

“주루 훈련은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질문의 열기부터 카메라 플래시까지, 앞선 두 번의 인터뷰와는 차원이 다른 관심이 쏟아졌고.

“손만 들어서 질문해주십시오! 계속 시끄러우면 인터뷰를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단 직원이 제지하고 나서야 정상적인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첫 질문으로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많은 팬들이 궁금해하실 거라 믿고 질문하겠습니다. 은퇴설은 루머인가요?”

“맞습니다. 루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나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제가 타자로서도 이 팀에 필요하다는 것을 코칭스태프에게 증명해야 했어요.”

구현기는 은퇴설을 반박하는 한편, 평가상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동시에 부인하는 인터뷰 스킬을 선보였다.

그러자 다른 기자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발표 이전부터 타자 전향을 준비해오신 겁니까?”

“지난 시즌 종료 직후 결심했고, 그때부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구단에는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전달했고요. 발표 시점보다 대략 2~3주 전부터 준비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기자들 사이에서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고작해야 오프 시즌 기간. 스프링캠프를 준비하는 것도 벅찬 시간이었으니까.

“투수와 타자의 메커니즘은 완전히 다른데, 적응에 문제는 없었습니까?”

“타격 인스트럭터의 도움이 컸습니다. ‘투수로서의 너를 전부 버려라’라고 지시했고, 저는 따랐죠.”

“투수로서의 커리어를 전부 포기했다고요?! 그 인스트럭터가 대체 누구입니까?!”

“훌리안 로페즈입니다.”

폭탄이 터졌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 박도현을 키워내면서 스타덤에 올랐지만, 제자의 죽음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잠적한 명코치.

그가 복귀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죽은 제자의 절친한 친구를, 그것도 투수를 가르쳤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Koo! 로페즈 코치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습니까?”

“혹시 그와 함께 스프링캠프 일정을 소화했습니까? 아니라면 지금은 어디 있죠?”

“타격에 대해서는 어떤 조언을 받았나요?!”

“Kooooooo! Koooooo!”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구단 직원은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소란이 벌어지자마자 인터뷰를 강제 종료시켰고.

[Koo의 타자 전향, Park의 전담 인스트럭터의 도움 있었다!]

[명코치 훌리안 로페즈, Park에 이어 다시 한번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기자들은 자극적인 타이틀을 위해 훌리안 로페즈와의 인연을 강조했고.

덕분에 고작 한 경기, 그것도 경기 후반 대주자로 출전했을 뿐인데도.

모든 메이저리그 팬들이 자연스레 구현기를 주목하게 되었다.

물론 구현기에게 취재를 따내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미국 언론뿐만이 아니었고.

미국 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 자리가 따로 마련되었다.

“시간 관계상 10분 동안만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촉박한 시간에 기자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원정 경기 특성상 이것도 많이 배려해준 것이었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손을 든 언론 중에는 구현기에 대한 의혹 기사를 실었던 언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스포츠문화의 이재상 기자처럼 선을 넘는 질문을 하거나 선수 측에서 먼저 요청하지 않는 이상, 해외 언론의 출입을 금지하지 않는 구단 방침 덕분이었다.

“거기 안경 쓰신 여성 기자분.”

그러나 구현기는 얄밉게도 그런 기자들을 쏙쏙 골라내면서, 중립적인 기사를 작성해온 기자들에게만 질문을 허락했다.

“오늘 대주자로서 좋은 활약 보여주셨는데요.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타자로서도 인정받아 메이저리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 알렉스 프랑코 선수가 다섯 번이나 견제구를 던졌는데, 모두 세이프였습니다. 혹시 견제 동작을 읽어내셨던 건가요?”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견제사를 당하지 않을 거라 판단되는 정도로만 리드폭을 벌렸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구현기의 경고이자 배려였다.

지금까지야 기사로 헛소리를 써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그랬다간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경고.

더불어 팩트만 가지고 정상적인 기사를 쓴다면 취재를 막지는 않겠다는 배려.

“······이후 출전 기회에 대해서는 저도 언질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다른 타자 유망주들과 마찬가지로 대타나 대수비로 나올 것 같습니다.”

정확히 10분.

틈틈이 시계를 쳐다보며 대답을 이어온 구현기는 주어진 시간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구현기 선수! 질문 하나만 더······!”

“향후 메이저리그에 잔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막 현지 매체에 구현기 선수의 타격 인스트럭터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는데요, 여기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대부분 기자들이 그렇듯, 조금이라도 더 무언가를 캐내려 달려들었지만.

“저기요, 기자님들. 우리 되게 오랜만이죠?”

구현기는 그저 방긋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스프링캠프 초반에 어떤 기자님이 룰을 어기는 바람에, 한동안 이런 자리를 만들기가 어려워졌잖아요.”

구현기가 스포츠문화 이재상 기자의 행동을 구단에 알리자, 구단은 즉각 한국 언론의 취재 허가 여부를 재검토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상의 취재 제한이라는 것을, 그리고 구현기의 의향이 들어갔다는 것을 모르는 기자는 없었다.

“다행히 이렇게 일이 잘 풀려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됐는데, 그런 불상사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이후, 구현기는 한국 언론의 취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는 않았지만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구단에 소속된 박도현이 한국 언론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

일부 기자들은 생각했다.

박도현이 사라진 지금, 구현기는 수틀리면 한국 언론의 접근을 아예 차단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입국 기자회견에서 베테랑 기자들에게 대놓고 들이받았던 저 또라이라면 가능하다고.

구현기가 메이저리그로 올라가지 못하고 KBO 유턴을 택하거나 은퇴한다면 문제 될 건 없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대참사가 벌어지겠지.’

웬만큼 짬을 먹은 기자들은 대충 의중을 파악하고 몸을 사리기로 했다.

* * *

개막전 이후, 나는 다섯 명의 선수를 내려보낸 1차 컷오프에서 살아남았고.

두 경기에 더 교체 출전 기회를 얻었다.

[LAD Koo, 9회 말 대주자로 두 번째 출전··· 런 앤 히트 작전 실패로 더블아웃되며 경기 종료]

[Koo, 9회 말 대타로 시범경기 첫 타석 출전··· 출루 성공했으나 후속타 불발로 득점 실패]

두 번째 경기에서는 런 앤 히트가 걸렸고, 나름 괜찮은 타이밍에 출발했지만 3루수의 호수비로 라인드라이브가 나오며 그대로 더블아웃이 확정됐고.

세 번째 경기에서는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상태에서 마이너리그 투수를 상대했는데, 스트레이트 볼넷이 나오는 바람에 뭘 보여줄 수조차 없었다.

[아니, 타석에서 좀 기회를 주면 안 되나? 시범경기 개막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Koo가 스윙하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어!]

└ 진정해, 친구. 지금은 대타 기회를 줘야 할 인원들이 많잖아. 다저스가 팬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지금 당장 Koo를 마이너로 내려보내진 않겠지.

└ 상대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못 던졌는데 별 수 있나. 지금은 거의 투수들만 탈락했지만, 야수조에서 탈락자가 더 나오면 기회가 오지 않겠어?

팬들은 적어도 내가 시범경기에서 제대로 된 타석을 소화하는 모습은 봐야겠다며 벼르고 있다.

당장 우선순위가 밀리는 거야 나도 각오하고 있었지. 기존 주전과 백업, 초청선수들, 스프링캠프에 여러 차례 초청받은 유망주까지.

특급 유망주로 분류되는 조나단도 나와 비슷한 정도의 기회밖에 얻지 못했을 정도니까.

그래서 내게 기회가 조금이라도 더 올까 싶어 훌리안의 이름을 팔았는데―

[이 망할 제자 놈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

아니나 다를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훌리안이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에이, 어차피 기자들도 알아보려면 1시간 안에 다 알아봐요. 훌리안이 센터 오가는 거 동네 사람들 다 봤을 텐데.”

[타이밍을 잘 맞췄으면 내가 말을 안 하지!! 꼭 그 개똥 같은 경기 끝나고, 사람들 눈 너한테 다 쏠릴 때 그때 터트려야 했냐?! 내가 너 때문에 지금 번호만 두 번을 바꿨어!]

“훌리안 코치님,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우리 이번 시즌 끝나면 한국에서 감자보다 고기가 더 들어가는 Potato stew라도 한 그릇 해요.”

[너 Park네 가게에서 공짜로 때우려고 그러는 거지?! 이 새끼가 그 돈 아끼겠다고······!]

“어이쿠, 감독님이 부르신다. 나중에 봐요, 훌리안!”

[야! 야! Motherf······!]

더 뭐라 그러기 전에 재빨리 통화를 끊고 핸드폰 전원도 꺼버렸다.

오늘은 다시는 안 켜야지.

[너 그러고 끊어도 돼? 훌리안 영감님 진짜 빡친 것 같던데······.]

“에이, 니가 훌리안을 몰라서 그래. 내심 뿌듯하면서 괜히 그러는 거야.”

[개소리 마. 내가 너보다 훨씬 오래 알았거든?]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어제와 같이 이어지는 스프링캠프의 하루를 보내러 라커룸으로 향하는데.

“Koo, 잠시 이리로.”

말이 씨가 됐던 걸까. 정말로 감독님이 나를 호출했다.

슬쩍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20분.

[아······.]

박도현이 탄식한다.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를 마이너로 내려보내는 시간은 보통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

감독이나 코치가 훈련 시작 전 갑자기 면담을 요청하면 거의 확정이라고 보면 된다.

‘참······ 본인이 하신 말씀 칼 같이 지키시네.’

감독님이 언질하셨던 기회는 3경기.

큰 기회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걸 전부 살리지 못한 책임도 있으니까.

면담실에서 감독님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허공만 쳐다봤고.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쳤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감독님의 표정이 장난스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축하해, Koo.”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던 내게.

“자네는 내일 오클랜드와의 B 게임에서 유격수로 선발 출장하게 될 거야.”

감독님은 놀라운 소식을 전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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